49화
선뜻 받아들지 못하는 베스의 손에 거칠한 편지 봉투가 들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편지를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구기듯이 편지를 손아귀에 집어넣고 두 손을 모았다.
예를 보이기 위해 애써 미소 지은 베스는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베스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아더뿐이었다.
“정신 차려. 아더 메이너.”
제 가슴팍의 셔츠 자락을 세게 쥐었다 놓자, 주름 하나 없이 빳빳했던 자리가 꼴사납게 구겨졌다. 어쩌면 잔뜩 구겨진 건 마음인지도 몰랐다.
숨겨야만 하고.
더 자라서는 안 되는.
“정신 차려. 제발.”
스스로를 다잡는 다짐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베스가 지나간 자리를 보지 않으려 억지로 돌아가는 걸음 끝이 무거웠다.
* * *
“베스! 왜 이렇게 얼이 빠졌어?”
소피아가 가볍게 베스의 팔을 흔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베스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일할 때는 아이네스만큼이나 빠릿빠릿한 베스의 낯선 모습에 소피아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베스는 말갛게 웃으며 하던 비품 정리에 몰두했다.
둘은 약품 창고에서 마지막으로 수량 점검을 하던 중이었다. 이젠 슬슬 병원을 비울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종전과 함께 제약 없이 뚫린 보급로를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이송 차량이 오갔다. 위급한 부상병들이 먼저 웨인으로 돌아갈 만큼, 성큼 다가온 마지막이 눈에 보였다.
바쁘겠지.
며칠째 데베르를 보지 못했단 생각이 스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군대장의 일을 일개 간호사로서 다 알 순 없었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적군과 마지막 종전 협상 중이라고 들었다.
다들 협상이 아니라, 데베르 클리프가 코바흐 황제의 멱살잡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베스는 웃지 못했다.
“어? 여기 수량이 안 맞는데?”
소피아가 베스를 불렀다.
진통제와 안정제가 진열된 선반 앞에선 소피아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손에 들린 종이 뭉치와 선반을 번갈아 봤다.
“여기 봐봐. 좀 차이가 크게 나는데. 누가 기록을 잊은 건가?”
소피아의 손이 가리킨 곳은 데베르가 찾던 안정제였다. 베스는 데베르의 약을 처방해줄 때마다 기록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간호복 아래 보이지 않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베스가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내가 저번에 가져갔는데 깜빡한 거 같아.]
익숙지 않은 거짓말에 괜히 입안이 바짝 말랐다.
“베스 네가 깜빡했다고? 이걸 처방받는 환자가 있었나…. 이걸 다 먹어야 할 정도면 중증 아니야? 오후 이송 차량에 자리를 하나 비워달라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 환자는 벌써 이송됐어. 이름은 기억이 안 나.]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를 보던 소피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바쁜 전장 병원이니 베스도 실수하는구나 싶어질 뿐이었다.
제 친구의 생각을 모르는 베스는 입술 끝을 자근자근 짓씹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거짓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열쇠도 없는데 어떻게 가져간 걸까. 차라리 가져달라 부탁하지.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그날 밤에도 약이 없다고 했었다. 바보같이 제 생각에만 골몰해, 그를 챙기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상념이 떠오를 때마다 일에만 몰두한 나날이었다. 때마침 바쁜 병원 분위기 또한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질 정도였다. 몇 번 베스를 귀찮게 하던 딕시도, 평소보다 가라앉은 그녀의 모습에 입을 다문 지 오래였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지면 안도감이 들었다.
모두가 잠든 뒤, 조용히 침대맡 창문을 열어보는 것도 어느덧 습관이 되어 있었다. 창을 열 때의 마음은 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 남자가 있었으면 하기도 했고, 없었으면 하기도 했다.
그를 보고 싶으면서도, 그 얼굴을 보면 해야 할 대답이 두려웠다.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 꾸역꾸역 쑤셔 넣어놓은 편지 또한 아직 읽지 않은 채였다.
“드디어 내일이면 우리 모두 웨인으로 떠나네요.”
이른 아침, 병원장실에 모인 의료진들을 향해 부인이 미소 지었다. 부족한 일손을 도우며 여태 병원에서 함께하던 콜린스 또한 “지긋지긋한 이곳을 드디어 탈출하는구먼!” 하며 털털하게 웃었다.
베스는 비로소 마지막이 왔음을 깨달았다.
잠들지 못하던 밤이 거짓인 것처럼, 답이 이미 정해진 마음은 담담하기만 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일부러 약품 창고를 들렀다. 이젠 텅 빈 그곳을 보자 마음이 작게 일렁였다.
‘어젯밤에 코바흐와의 협정은 모두 끝났답니다.’
오늘 낮에 게일이 살짝 귀띔해준 소식이었다. 오늘 밤이면 제 대장이 당신을 찾아갈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베스는 이젠 아무것도 없는 선반을 손으로 쓸었다.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텅 비었네.”
베스는 선반에 올린 손을 천천히 내렸다. 익숙한 군화 소리가 흐트러짐 없이 다가오는 게 들렸다.
“아쉽네, 조금은.”
어느새 귓가에 성큼 다가온 목소리에도 베스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오랜만인데 얼굴도 안 보여주는 건 너무하지 않아?”
빈 선반 위에 올려진 길쭉한 손가락이 툭툭 바닥을 쳤다. 베스는 그를 대신해, 그 손가락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흐음, 낮은 허밍을 내던 데베르의 손이 우뚝 멈췄다.
“내일이면 웨인으로 돌아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야속한 어깨를 살며시 붙들었다. 구두코에 눈을 박은 여자를 그의 쪽으로 돌려 세웠다.
“대답은 생각해봤어?”
베스는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오늘 밤에 막사로 갈게요.]
데베르의 입가가 삐뚜름해졌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베스의 표정을 읽었다.
“무슨 꿍꿍이야. 얼마나 대단한 거절을 하려고.”
베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저 남자도 거절을 걱정하나 싶었다. 물론, 그 목소리에 진심 어린 걱정은 묻어나지 않았지만 조금은 눈앞의 남자가 보통의 남자처럼 느껴졌다.
눈을 반짝 뜬 베스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이잖아요.]
“무슨 생각을-”
[여기서 마지막이라고요.]
얼른 뒷말을 덧붙인 베스는 잰걸음으로 문가를 향해 갔다.
한 번 뒤를 돌아보았지만, 남자는 선반 앞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주친 시선을 먼저 피한 베스는 뛰듯이 숙소로 걸어갔다.
걸음을 빨리하던 베스는 결국 내달리기 시작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땐 턱까지 차오른 숨에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그대로 쉬지 않고 침대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여태 피한 편지를 꺼내 들고는 그대로 봉투를 찢었다.
지긋지긋한 이 누런 종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끔찍한 필체.
천천히 편지라 할 수도 없는 그것을 읽는 베스의 작은 턱에 힘이 들어갔다.
털썩 무릎으로 떨어지는 손끝에서 얇은 종이가 힘없이 미끄러졌다.
『데베르 클리프. 네 어미를 잊지는 않았겠지.』
가장 끔찍한 장을 열어본 마음은 외려 차분해졌다. 한참을 헤매던 마음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 * *
“베스, 좋은 일 있어?”
며칠을 아픈 사람처럼 끙끙거리다, 마지막 밤이 와서야 화색이 돌아온 베스를 향해 아이네스가 물었다.
다들 짐을 싸느라 밤이 깊어가는데도 숙소는 소란스럽기만 했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겹치는 수다 소리가 겨울밤을 포근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에이, 얘기 좀 해줘,”
며칠 내내 베스의 기분을 살피던 딕시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나중에.]
“진짜?”
졸라댈 때는 언제고, 딕시는 오히려 믿기지 않는 듯 반문했다.
“아니, 공작님하고의 일 말이야.”
제 뜻을 모르나 싶어 베스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뭐든 말해주겠다는 선선한 대답.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꼭꼭 숨겼잖아.”
하도 주위가 소란스러워 딕시는 귓속말은 포기하고 주어를 생략한 물음을 툭 던졌다.
펜을 쥔 베스는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이내 움직이는 펜 끝을 따라 입꼬리도 함께 호선을 그렸다.
[좋아서.]
눈이 휘둥그레진 딕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얼른 대답이 써진 종이를 가렸다. 베스는 그 모습에 또 한참을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딕시는, 얘가 단단히 공작에게 빠졌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천하의 베스 제인스를 이렇게 만들다니. 아, 물론 공작도 잘생기긴 했지만.
딕시는 지레짐작을 기정사실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대답을 들여다보던 베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짐을 싸고, 옮기느라 정신이 없는 탓에 그녀를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베스는 그 틈을 타 밖으로 나왔다.
이젠 숨을 쉬기만 해도 허연 김이 풀풀 날렸다. 펑펑 날리는 함박눈이 발자국을 모두 지워 사위는 하얀 들판 같기만 했다.
다들 내일 아침에 웨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지, 바깥엔 오직 베스 한 명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걸어가는데도 겁나지 않았다. 이 길 끝에 있을 남자 때문인 걸까.
성긴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실없이 웃었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걸어가자,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단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데리러 갈 텐데 왜 혼자 왔어.”
다정한 물음에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베스는 그저 또다시 웃음을 흘렸다. 눈앞에 보이는 손을 잡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데베르는 단단히 손을 고쳐잡았다.
하얗기만 했던 설원 위로 둘의 걸음이 나란히 찍혔다.
막사로 들어오자 훈기로 인해 베스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젠 조금은 자연스럽게 협탁 앞 의자에 앉은 베스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를 만난 첫날에도, 이렇게 서로를 마주했었다.
사뭇 많은 게 달라진 나날이었다.
데베르는 품 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베스 또한 그게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돌려주는 게 늦었어.”
이젠 의미 없는 사망금 증서. 고작 이 종이 안에 얼마나 많은 소원을 담았는지.
이루어지지 못할 소원의 무게가 아프게 가슴을 짓눌렀다. 베스는 손안의 증서는 협탁 위로 떨궈버리고, 제게서 멀리 떨어진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이젠 나를 믿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