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베스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얼핏 잠이 들라치면, 이내 정신은 또렷해졌다.
잠들고 싶단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데베르는 긴 밤 내내 한 번도 깨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베스가 뒤척일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곤 느슨해진 팔에 힘을 줬다.
처음엔 어색하게 몸을 꼼지락거리던 베스도, 결국엔 모든 걸 포기하곤 가만히 그를 안은 몸에 힘을 풀었다.
생각을 정리하기엔 짧은 밤이었다. 요란한 바람 소리가 막사를 뒤흔들었지만, 자신을 감싸 안은 남자의 열기 덕에 춥지 않은 밤이기도 했다.
막사 안으로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푸른 빛을 통해 새벽 미명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아챈 베스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얌전하게 내리깔린 잿빛 속눈썹을 보니, 아직 깊은 잠을 자는 게 분명했다.
베스의 뜻대로 데베르의 한쪽 손이 그녀의 허리에서 치워졌다. 한층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몸을 반쯤 일으켜도 그는 미동이 없었다.
이렇게 잘 자면서.
불편한 자세로 하룻밤을 보낸 탓에 어깨며 허리가 뻐근했지만, 베스는 그 불편한 자세 그대로 남자를 세밀하게 바라봤다. 새삼 딕시가 혀를 내두르던 클리프 공작의 미모에 대한 찬사가 떠올랐다. 군대장이란 무거운 직책만 아니었다면, 뭇 어느 여자의 마음이든 떨리게 할 만한 남자였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을 향하던 베스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무방비한 그의 얼굴 위로, 기억 속의 얼굴이 겹쳤기에.
그만.
베스는 속으로 자신을 다잡았다. 언제든 선을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선을 지켜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베스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 사람인지 모르지 않았다.
조금은 담담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킨 베스가 조용히 막사를 벗어나고자 할 때였다.
잠결이라곤 믿을 수 없는 악력이 그녀를 낚아채 침대로 잡아당겼다.
“어디가.”
잔뜩 잠긴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베스는 우악스런 힘에 뒤를 돌지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숨을 죽였다. 가야 한단 뜻을 담아 허리께에 감긴 그의 팔을 살짝 쳤지만, 데베르는 가뿐히 그 의사를 무시했다.
“나 버리고 어디 가려고.”
베스의 날갯죽지에 입술을 묻은 데베르가 낮게 일렀다.
“약속대로 했는데 뭐가 문젠데.”
가야 한다는데 엉뚱한 소리를 하는 남자에 답답해진 베스가 그의 팔을 아프게 긁었다.
[아침 회의 있어요.]
“살 놈은 어떻게든 살아.”
무책임한 말과 달리, 베스의 옷가지 위에서 나른하게 흩어지는 말꼬리엔 아직 잠기운이 서려 있었다.
베스는 조금 더 단호하게 그의 팔을 풀었다. 데베르도 이번엔 순순히 그녀를 놓아줬지만, 움켜쥔 손목은 놓지 않았다.
낮은 신음을 흘리며 침대 위로 엎드린 데베르의 어깨만으로도 작은 간이침대는 꽉 찼다. 새삼 얼마나 좁은 공간에서 그와 부대끼며 밤을 보낸 건지 깨달은 베스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른 새벽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데려다줄게.”
베스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남자는 그런 고민 따위 모르는지, 제 가슴팍밖에 오지 않는 여자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앞머리가 야살스럽게 목덜미를 스쳤다.
“나만 두고 가지 마.”
그래, 이런 말을 하니까.
베스는 어젯밤, 자고 가라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수락한 자신을 탓했다. 이른 아침, 막사에서 잠도 덜 깬 군대장과 나오는 걸 본 누군들 똑같은 생각을 할 게 뻔한데.
“약속하면 보내줄게.”
베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지만, 집요한 손은 여태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데베르는 구석에 반듯하게 개켜져 있던 모포를 들어 베스의 어깨를 감쌌다. 제 옷을 주면 군대장과 함께 있었다는 걸 들킬 테니, 줄 수 있는 건 야전용 모포뿐이었다.
잠기운이 완전히 달아난 날 선 시선이 베스를 단단히 옭아맸다. 답지 않은 투정을 부리던 남자가 사라지자, 왠지 모를 긴장감이 막사 안을 맴돌았다.
“날 두고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보내줄게.”
언뜻 협박 같기도 한 말이었다.
굳어가는 여자의 얼굴을 보던 데베르는 피식 웃었다.
“심각할 건 없고. 저번에도 날 버리고 전장으로 사라졌다가 큰일 날 뻔했잖아.”
그제야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베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데베르는 베스가 이날을 잊지 않을 것임을, 그날이 있었기에 지금 이 여자가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가끔은 지독하게 영악한 제 모습에 치를 떨 때도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모든 게 흡족했다.
“약속해 줘. 날 두고 가지 않겠다고.”
베스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젠 전쟁도 끝났고, 자신 때문에 그가 위험해질 상황도 없었으니까.
“그래, 그거면 됐어.”
데베르는 어서 가라는 듯, 고개를 까딱여 막사 입구를 가리켰다.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베스에 “조금 더 늦으면 순찰 중인 보초병을 만날걸.”이라고 하자, 베스는 잽싸게 밖으로 사라졌다.
“빠르기도 하시지.”
웃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막사를 맴돌았다.
* * *
이제는 이음새가 완전히 박살 난 숙소 문고리를 돌리며, 베스는 이 열악한 환경에 진심으로 감사해졌다. 만약 안에서 문을 열어줘야 열리는 형태였다면, 꼼짝없이 외박을 들킬 뻔했을 테니 말이다.
살금살금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문가의 낡은 테이블 위로 먹다 남은 비스킷과 술병이 어지럽게 나뒹구는 것으로 보아, 콜린스와 옛 제자들이 거하게 종전의 회포를 푼 게 분명했다.
이대로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갈 요량으로 발걸음을 뗄 때였다.
“!”
발에 채는 둔탁한 무게감에 베스는 기겁을 하며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아무리 놀란들 목소리가 나올 리는 없었지만,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발에 챈 건 테이블 밑으로 삐져나온 누군가의 다리였다.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무릎을 굽히자, 테이블 밑을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형체가 보였다.
“뭐야….”
오만상을 찌푸린 딕시가 네 발로 땅을 짚은 채 위를 올려다 봤다. 베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는 딕시를 경악스런 얼굴로 마주 봤다.
“너-”
“어? 베스? 간밤에 어디 있었어?”
지난 밤을 물으려던 딕시의 물음은, 계단을 내려오는 이의 쨍한 물음에 묻혔다. 딕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낯선 모포를 두른 채 종이를 찾는 베스를 눈여겨 봤다.
베스는 허둥지둥 테이블 위에 대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딕시는 어느새 정자세를 하고 앉아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 엄한 모습이 꼭 몰리 부인이 예전 학생들을 훈계할 때와 비슷했다.
테이블 위로 고개를 숙인 베스와 테이블 아래 주저앉은 딕시의 눈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딕시는 계단에 선 간호사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입 모양으로 ‘도와줄까?’를 읊었다. 그 말을 알아들은 베스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주억거려졌다.
“베스, 미안해. 내가 나이트 때 해야 할 일을 홀랑! 네게 맡기는 바람에 간밤에 콜린스 아저씨랑 한 잔도 못 해서 어떡해?”
실제 어제 나이트 근무는 딕시와 아이네스였다. 하지만 몰리 부인이 특별히 나이트를 자처했다. 콜린스와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싶은 제자의 마음을 알아준 것이었다.
딕시는 옳다구나 그 제안을 잽싸게 받아들였지만, 제 약혼자를 홀로 두는 것이 마음에 걸린 아이네스는 부인과 함께 나이트를 보냈다.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아이네스는 지금 한창 곯아떨어져 있는 참이었다.
“어? 그래? 고생 많았겠다. 얼른 쉬어, 베스.”
“그러니까 말이야! 얼마나, 간밤에, 고생이! 많았겠어.”
딕시는 능청스레 눈을 치떴다. 베스는 그 과장된 언사에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물음을 던진 간호사는 별생각이 없는지 이내 산책한다며 바깥으로 사라졌다.
둘만 남은 일 층 안이 다시금 고요해졌다.
“흠, 베스 제인스 양.”
의자에 걸터앉은 딕시가 테이블에 턱을 괬다. 이미 이채가 돌기 시작한 눈은 이번에야말로 먹잇감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씻고 얘기하자. 제발.]
베스는 간절한 마지막 소망을 꾹꾹 눌러쓰고, 위층으로 터덜터덜 올라갔다. 끈질긴 시선은 베스가 마침내 사라져 발끝 하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서, 벌써 해가 중천이야.”
베스는 찰거머리처럼 제 옆을 떠나지 않는 딕시를 애써 모른 척하며, 부상병의 머리 붕대를 갈았다. 딕시 또한 손으로는 부지런히 진통제를 놓으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베스를 들볶고 있었다.
한숨을 삼키며 병동을 나가던 베스의 눈에 익숙한 병사가 눈에 띄었다. 딕시에게 들꽃을 건넨 병사였다. 그는 이번엔 어디서 꺾어왔는지, 이 겨울에 빨간 열매가 앙증맞게 달린 가지를 꽃다발처럼 들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베스가 그 병사에게 다가가자, 얼굴이 시뻘게진 병사가 쭈뼛쭈뼛 손에 든 걸 내밀었다.
“그, 자유 시간이 생겨서 잠시 숲에 갔는데, 그, 이게 있어서, 딕시 간호사님이 그날 입으신 드레스 색깔과 비슷해서.”
“아니, 전 이런 거 필요 없는데.”
한숨을 쉬면서도 병사의 선물을 받아드는 딕시를 본 베스는 이 틈을 타 잽싸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종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혼자 생각을 정리할 틈은 필요했다.
자꾸만 나풀대며 날아오르려는 마음을 저 아래에서 붙잡는 묵직한 죄책감이 고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 베스 간호사님.”
정문을 들어오던 아더의 눈이 계단 위에 가만히 서 있는 베스를 향했다.
베스 제인스를 야전병원에 넣어달라 은밀한 제 속내를 고백한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본 적 없었다. 아더는 제 표정이 어떤지 한번 상기했다. 그리고 적당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랜만이네요.”
거짓된 인사말 끝이 희미하게 떨렸지만, 부디 눈치채지 못하길 빌었다. 애써 감춘 표정이 들킬세라 얼른 고개를 제 손으로 떨구었다. 손에는 편지뭉치가 들려있었다.
“여기 간호사님의 편지도 도착해 있던데, 일찍 뵐 수 있어 좋네요.”
아더는 잠들지 못한 새벽, 이르게 도착한 소포 차량을 가장 먼저 받아든 자신에 안도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못난 모습을 이 여자에게 또 보였을 테니까.
적당한 핑계 감을 베스에게 내밀었다.
“베스 양의 편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