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예상치 못한 권유에 베스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막사 왕진이라면 못 갈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게 혹시 다른 의미인가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망금 증서도 받아야 하잖아.”
데베르는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느른한 미소가 걸쳐진 얼굴은 여유롭기만 했다.
“너무 불순한 생각만 하지 말고.”
마지막에 픽, 웃음을 흘리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더불어 베스의 눈가도 함께 찌푸려졌다.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저를 놀릴 때면 항상 지는 건 베스였다.
베스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의 말대로 가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몰리 부인도 사망금 증서를 챙기라 했고, 허울뿐인 전담 간호사일지언정 그의 상처를 들여다보기도 해야 했다.
베스는 자신이 가도 되는 수많은 합당한 이유를 되뇌며 어두운 숲길을 턱짓했다.
“얼마든지.”
데베르는 한발 물러서 한쪽 팔은 숲길 쪽으로, 다른 한쪽 팔은 제 가슴팍으로 올렸다. 마치 여왕에게 길을 안내하듯 예법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베스의 미간이 다시 한번 잔뜩 찌푸려졌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베스의 곁에서 보조를 맞춘 데베르는 올라간 입매를 다시 한번 매만졌다. 이 여자와 있을 때면 간지러울 일이 많았다.
뽀득거리는 소리만이 적막한 숲길을 메웠다. 베스는 힐긋 제 옆의 남자를 올려봤지만, 무표정한 얼굴을 읽는 것은 어려웠다.
데베르가 입을 꾹 다문 탓에 조금은 서먹한 동행이 이어졌다. 베스는 이 길이 이토록 길었나 새삼스레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막사로 가는 숲길을 여유롭게 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렷한 정신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길을 가자니 덜컥 겁이 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짐승 소리인지, 바람 소리인지도 마음을 선득하게 만들었다.
데베르는 제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베스의 작은 머리통을 보며 슬쩍 웃음을 흘렸다.
순간, 베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왜 그래.”
그의 물음에 얼른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귀를 쫑긋 세운 베스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윙윙대는 바람결 사이로 짐승의 흐느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베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산짐승? 설마, 늑대인가. 넥서스의 야산에 늑대가 득실댄다는 건 어린아이도 알 얘기였다.
베스는 데베르에게 이 소리를 들으란 뜻을 담아 제 귀를 가리켰다.
설마. 데베르는 까마득한 기분을 절감하며 길게 숨을 뱉어냈다. 진즉부터 알아챈 소리였다.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용케도 지금껏 듣지 못한다 싶었는데.
바람 소리도 멎자, 고요한 수풀 사이로 짐승의 허덕거리는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베스는 울상이 되어 데베르를 올려봤다. 다소 난감한 표정의 그는 제 목덜미를 몇 번 주무르더니, 베스를 내려봤다.
“이 소리는….”
공포에 덧대진 호기심에 베스의 발이 살금살금 소리를 향해 움직였다. 어렴풋한 달빛이 새어 들어온 나무 등치 아래로 꿀렁이는 인영이 보였다.
순간, 베스의 발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짐승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이 아닌 것도 아니었지만….
베스는 제 뒤로 지르밟히는 눈 소리에 퍼뜩 뒤를 돌아 다가오는 데베르를 밀어냈다. 그토록 신중히 다가갈 땐 언제고, 소리가 나건 말건 무자비하게 밀어내는 손길에 데베르의 볼우물이 슬쩍 패였다.
“못 볼 거라도 있었나 보지?”
베스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날 생각으로 뛰듯이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미끄러운 눈길이 제 뜻을 따라줄 리 만무했다.
한창 자기네들의 일에 열중한 이들은 군대장과 간호사가 왔다 간 것도 모르는지, 듣기 민망한 소리는 계속해서 잎사귀 사이로 들려왔다.
“대단히 무서운 짐승이었나 봐. 그러니 이리 도망가는 거겠지, 안 그래?”
빙글거리는 그의 말에, 휙 뒤를 돌아본 베스는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여기서.
나무 등치의 ‘짐승’은 남녀 한 쌍이었다. 필시 전장에서 눈이 맞은 게 분명했다. 갈 곳이 요원치 않으니 밤을 틈타 숲으로 들어온 거겠지.
데베르는 어릴 적부터 전장을 돌며 질리도록 보아온 풍경이었다. 이곳에서도 저런 꼴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하는 거 보면, 후방 병원에 있을 때도 병원과 숙소만 왔다 갔다 했을 테니까.
“혈기 넘치는 남녀잖아.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지.”
무뚝뚝한 얼굴에서 나온 퍽 로맨틱한 두둔에, 베스는 과연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데베르 클리프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또 저 남자의 당황스러운 언변에 휘둘릴세라 베스는 먼저 등을 돌렸다.
아찔한 광경에 한 번 정신을 빼앗기자, 길기만 했던 길도 어느새 끝나 있었다.
어느덧 앞장선 데베르를 따라 그의 막사로 걸어갔다. 막사 왕진은 몇 번 왔지만, 그 위치는 항상 데베르의 막사와 정반대 쪽에 있었다. 베스도 굳이 뇌리에 박힌 그곳을 부러 쳐다보지 않았었다.
그의 막사로 처음 끌려갔던 날의 공포가 생생했다. 그건 그를 지금 믿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베스는 몰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스스로도 못난 모습이라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박힌 공포의 경험은 늘 저를 웅크리게 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과 아무렇지 않은 체하는 것은 달랐다.
베스는 늘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살아왔다.
“들어와.”
막사 앞에 선 보초병을 물린 데베르가 입구에서 손짓했다.
베스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곳으로 걸음을 디뎠다. 다른 장교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막사였다. 다를 게 있다면, 군대장의 특권인지 협탁 위에 마개가 열린 술병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데베르는 자연스럽게 술병을 치우며 말했다.
“내가 마신 거 아냐. 콜린스 병원장이 마신 거지.”
가뿐하게 콜린스를 방패 삼은 데베르는 의자를 가리켰다. 쭈뼛대며 베스가 앉은 자리는 이미 앉아 본 적 있는 자리였다.
그가 비상용으로 갖다둔 소독약과 붕대를 찾는 사이, 베스는 협탁 위를 일렁이는 램프 그림자 속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손장난을 했다. 이거라도 해야 이 하릴없는 긴장감이 좀 풀릴 것 같았다.
한참 손장난을 하고 있는데, 노랗게 일렁대는 그림자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막사 중앙에 달린 램프를 등진 데베르가 소독약을 내밀었다.
이젠 익숙한 듯이 셔츠를 벗은 그는 녹슨 철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과연 회복력 하나는 좋은 남자였다. 물론 그것이 모든 게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은 분명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구나.
콜린스 몰리를 보는 순간, 베스가 깨달은 것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이, 아물지 않을 것만 같던 이 남자의 상처도 아물 듯이. 모든 것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남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겠지.
베스는 가만히 오르내리는 그의 등을 보면서, 꼭 이곳이 온실 정원인 것처럼 느껴졌다.
외부의 찬바람이 차단되고, 만개한 꽃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천국 같던 그곳.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서운 바람이 들이닥치는 전장이 제겐 아늑한 온실 정원 같았다. 그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눈앞의 이 남자일 것이고.
그도, 자신도 짧은 착각을 하는 것일 거다.
이 온실 정원이 영원할 것이라고. 이 세상이 우리의 것이라고. 바깥의 얼어붙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서 말이다.
베스는 소독을 마무리하고, 그의 두툼한 어깨에 붕대를 동여맸다.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는 것은 모른 체했다. 더 이상의 것이 뭐가 됐건 서로에게 위험할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물품을 차곡차곡 정리한 베스는 남자를 한 번 일별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려는 그녀의 손목을 데베르는 가볍게 쥐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가녀린 손목은 성기게 쥔 그의 손안에서 놀고 있었다. 꽉 쥐면 아플 수도 있단 생각에 헐겁게 쥐긴 했어도, 그 매듭이 풀릴 리는 없어 보였다.
“밤이 깊었어.”
조금 더 힘을 줘 손을 당기자, 여자의 몸이 한 발자국 더 그에게로 다가왔다. 데베르는 조심스럽게 눈앞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았다. 조금은 가쁘게 오르내리는 숨이 데베르의 귓가로 와닿았다.
베스는 제 허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기댄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이는 팔이 허공을 부유했다.
“자고 가.”
그 한마디에 베스의 숨이 뚝 그쳤다. 막사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베스의 사고회로도 멈췄다.
데베르는 조금 더 팔에 힘을 줘, 여체를 끌어안았다. 중심을 잃은 여자의 손이 지지대를 짚듯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은 약도 없고, 나는 너무 피곤하고.”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얇은 간호복 위로 스며들었다.
“정말 자고 싶은 마음뿐이야.”
속삭이는듯한 목소리의 끝에 나직한 한숨이 묻어났다. 정말 지친 목소리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데베르가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올곧은 시선을 내려다보며, 베스는 언제부터 자신이 이 남자를 내려다보는 것에 익숙해졌는지를 고민했다. 세상 모든 것을 발밑으로 보는 그가, 저를 간절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때는 무겁다고 생각했던 이 시선의 무게가 싫지 않았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게.”
달콤하게 권유하는 목소리는 나직했다.
“믿어 줘. 나는….”
뒷말을 망설이는 남자의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짜인 듯 빼곡한 근육이 그의 숨을 따라 움찔거렸다.
“정말로 잠들고 싶어.”
베스는 결국 항복의 의미로 제 품에 기댄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스쳤다. 그 작은 닿음에도 데베르는 더 깊이 베스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레 베스를 당겨 침대에 앉힌 데베르가 일어섰다.
막사 천장에 달린 램프의 연약한 불씨가 이내 사라졌다. 협탁 위에 홀로 남은 램프 불빛에 음영 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 나머지 불마저 꺼지자 막사 안엔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베스는 제 위로 훅 끼쳐오는 그의 향을 맡으며 몸을 뉘었다. 데베르는 팔딱거리는 목덜미에 얼굴을 한껏 비볐다. 어디로도 제 허락 없이는 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베스를 옥죈 팔의 근육이 불거졌다.
베스는 가만가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숨소리가 마침내 규칙적으로 잦아들 때까지 그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적당히 모든 것을 눈감아버리기 너무도 좋은 밤이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