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이른 새벽부터 병원장실에 모여앉은 얼굴들 위엔 피로감이 역력했다. 자정이 넘어 끝난 파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하품 소리와 깨지 못한 숙취로 앓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특히 바든은 몰리 부인이 오지 않은 틈을 타 쪽잠이라도 자보려는 것인지 대범하게 테이블 위로 팔을 포개고 누워있었다. 그가 고주망태가 된 채 병원 화단에 널브러져 있었다는 건 모두가 아는 비밀이었다.
항상 칼 같던 아이네스도 바뀐 일상의 여운에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종전 이후 모두의 분위기가 한결 풀려있는 게 보였다.
“다들 나사가 풀렸지, 아주?”
부인의 등장에 모두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 못 차리던 바든도 제법 능청스럽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가장 상석에 앉은 몰리 부인이 차트를 넘기며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을 훑었다. 예리한 눈빛이 자신을 향할 때마다 괜스레 뜨끔해진 그들은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정신 차려요. 우린 일을 마무리 짓는 중이지, 마무리한 게 아니니까. 이곳을 완벽하게 비우고 웨인으로 떠나는 날이 우리의 임무가 끝난 날이란 걸 명심하세요.”
엄한 일침에 기가 죽은 대답이 슬며시 흘러나왔다. 그나마 가장 제정신인 아이네스와 베스가 잔류 환자의 상황과 남은 보급품 따위를 정리한 서류를 내밀었다. 작게 한 번 들썩인 부인의 눈썹에서 자료를 향한 만족감이 얼핏 비쳤다.
간호학교 시절부터 수석인 베스와 차석인 아이네스는 부인의 큰 자랑임과 동시에 믿을만한 후임이었다. 앳된 아가씨 둘은 전장에서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항상 기대 이상으로 잘해줘 가슴 한구석이 찡할 때가 많았을 정도였으니까.
“음, 수고했어요. 일이 끝물인 게 보이네.”
간밤에 아이네스와 게일이 부인을 찾아와, 결혼 소식을 밝혔다. 비록 게일의 부상이 있긴 했지만, 웨인으로 가 좀 더 체계적인 수술과 재활을 거친다면 늦은 봄에 결혼하는 것도 무리는 없을 성싶었다.
자료를 덮은 부인은 슬쩍 안경 너머로 베스를 훔쳐봤다. 노상 단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아이의 얼굴에선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베스가 성인이 되자 공식적인 몰리 공작가의 후원은 끝났었다. 부인은 조심스레 개인적인 후원을 얘기했지만, 베스는 절대 그럴 수는 없다며 자진해 가장 먼저 전장 병원으로 향했었다. 베스가 간호학교를 졸업하던 즈음부터 쉴 새 없이 터지던 전쟁이 아이에겐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아이의 얼굴은 조금 더 단단히 여물어 있었다. 그게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파져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러분 중 사상자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요.”
회의를 마무리하는 담담한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금테 안경을 벗어낸 갈색 눈동자가 따스하게 모두를 한 명 한 명 눈여겨 봤다.
“다들 사망금 증서는 가지고 있겠죠. 설마, 사망금을 받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벼운 농담에 작은 웃음소리가 피어났다.
“증서를 가지고 웨인 제국 은행으로 가면, 의료진 격려금이 지급될 예정이에요. 모두 짐 챙기면서 사망금 증서 챙기는 거 잊지 말고.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먼저 부인이 병원장실을 나서자, 장내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격려금 생각에 다들 들뜬 계획을 너도나도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좌판을 하시는데 좀 더 좋은 목의 자릿세로 쓰겠다, 참전한 애인과 결혼 지참금으로 쓰겠다. 쓰임새도 제각각이었다.
긴 기다림의 보상이었다.
“베스, 넌 어디에 쓸 거야?”
소피아의 해맑은 물음에 베스는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글쎄, 항상 생각했던 일인데 어쩐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이 끝나면.
주문처럼 몇 년간 읊조리던 말이었는데, 왜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까.
안개가 낀 듯 뿌연 머릿속으로 단 하나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맞아. 내 사망금 증서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목숨줄처럼 붙들던 게 제 손을 떠난 지가 언젠데, 그걸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제정신이 아닌 건 그 남자가 아니라 저인 모양이었다.
[잘 모르겠어.]
솔직한 마음이었다.
* * *
은근히 베스의 옆으로 와, 선술집을 열겠다는 제 계획을 밝히는 바든을 향해 딕시가 “헛바람 들이켜지 마세요, 바든 씨.”하고 일축했다. “베스 제인스, 함부로 돈 빌려주는 거 아니야.”라며, 꽤 엄하게 제 친구를 단속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투덜대는 바든의 중얼거림과 약간의 들뜬 기색이 남은 발걸음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막사 왕진을 가기 위해 일 층까지 함께 내려온 셋을 낯선 목소리가 붙잡았다.
“콜먼 가의 딕시 양.”
어울리지도 않는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딕시를 불러세웠다. 떨떠름한 기색으로 인사를 한 딕시가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라며 예의상의 질문을 던지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은밀히 눈짓을 한 아이네스가 조용히 베스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어젯밤에 딕시를 두고 싸운 두 명 중 한 명이야.”
아, 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를 눈여겨 봤다. 딕시의 표정으로 봐선, 남자가 썩 마음에 드는 상대는 아닌 듯했다.
“어제 무사히 돌아가셨나요.”
“숙소가 코앞인걸요.”
“숙녀가 술에 취하면 위험한 게 많으니까요.”
“위험하게 만드는 것들이 문제지, 제가 문제는 아니지요. 그리고 저는 술이 세답니다. 그것도 무척이나.”
흡사 창과 방패 같은 대화였다.
몇 발짝 멀리서 황망하게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앳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베스도 아는 얼굴이었다.
데베르가 미친 연극을 시작하기 전, 딕시에게 첫 춤을 신청한 병사였다.
“웨인으로 돌아가면, 계획은 있으신지.”
“있긴 하지만, 굳이 제가 말씀드려야 할까요.”
“하, 이것 참.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그런데.”
콧수염을 쓱 쓰다듬은 남자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마치 못 볼 걸 본 듯 딕시의 눈가가 얄궂게 찌푸려졌다.
“남들은 제 가문을 두고 망했니 어쩌니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서 깊은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딕시는 요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눈치 없는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콜먼 씨를 좀 압니다. 상당히 부호, 시죠.”
‘부호’를 강조하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상이 돈으로만 되는 게 아니란 건 아가씨도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유일한 ‘흠’을 채워줄 남자는 저란 것도요.”
하, 코웃음을 친 딕시의 귓가가 새빨개졌다.
좋게좋게 받아주니까 이게. 딕시의 이성을 붙잡던 끈이 뚝, 끊어지는 소리가 베스와 아이네스에게까지 들렸다.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콧수염 하나뿐이었다.
“뭐, 웨인으로 돌아가면 영애들이야 많지만, 전 이곳에서의 인연을 조금은 소중히 여기고 싶네요. 필시, 콜먼 씨도 이 행운에 기꺼이 감사해할 겁니다.”
“아니, 이보세요.”
“숙녀가 바로 승낙하는 게 미덕이 아니라 여기시는군요. 좋아요. 하지만 길게는 못 기다립니다. 후후.”
“아니-”
“배워야 할 사교 예절이 많을 거예요. 배움이 느린 편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집안은-”
“이봐요!”
더 이상 참지 못한 딕시의 우레같은 외침에 콧수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콧수염의 멱살을 잡다시피 양어깨를 꽉 잡자, 큰 눈이 끔뻑끔뻑 딕시를 바라봤다.
주홍색 눈동자가 타오르듯이 콧수염을 노려봤다.
“정신 차리세요. 제 입에서 험한 말 나오기 전에.”
작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콧수염은 입술을 움찔거렸다.
“수, 숙녀 입에서 어찌 그리 험한 말이.”
“그놈의 숙녀 갖다버리시고요.”
콧수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게 선명했다. 한미한 시골에서, 이름만 남은 남작가의 성이 유일한 자랑인 남자의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다.
아이네스가 한숨을 내쉬며, 딕시를 말리기 위해 한발 다가갈 때였다.
“에이! 이 옹졸한 귀족 놈 좀 보게!”
벼락같은 중년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 목소리는. 휙 돌아본 아이네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콜린스 아저씨!”
“에그, 이놈아! 아저씨가 뭐냐, 아저씨가! 교수님 아니면 선생님이라 해야지.”
껄껄 웃는 호탕한 소리에 콧수염도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봤다.
그곳엔 한쪽이 부러진 금테 안경에 대충 반창고를 발라 붙인 중년 신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옷 입은 거 하며, 헝클어진 희끗희끗한 머리까지. 풍채가 좋긴 했지만, 콧수염이 열광하는 부호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저씨!” 딕시의 입술도 가만히 벌어졌다.
중년의 신사는 뚜벅뚜벅 걸어와, 콧수염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거센 악력에 콧수염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우리 딕시를 괴롭히고 있었나? 설마, 아니겠지?”
“아니, 당신은 누군데 다짜고짜.”
“아이고, 미안하오. 청년. 내 소개가 늦었네. 나는 콜린스 몰리요.”
큰 손아귀에 붙잡혀 속절없이 악수하던 콧수염이 불현듯 아연실색했다.
설마, 그 몰리 가의 몰리?
“콜먼 씨를 잘 알면 나도 잘 알 텐데?”
“아, 아니. 그건. 제가.”
“딕시에게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짐짓 근엄한 채근에 콧수염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더니,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복도 너머로 줄행랑을 쳤다.
콜린스는 뒤를 돌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병사를 돌아봤다.
“사내놈이 용기가 있어야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거냐!”
“네, 네?”
콜린스가 딕시를 향해 고갯짓하자, 쭈뼛거리던 병사가 후다닥 뛰어와 딕시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막사와 병원을 잇는 숲길에 핀 들꽃이었다.
시뻘건 얼굴을 한 병사가 “어제 즐거웠습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도망치듯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것들 똑똑하게 키워놨더니, 몹쓸 놈들이 다 채가네.”
콜린스는 호쾌하게 웃으며 품에 안기는 딕시를 마주 안아주었다. 울먹이는 아이네스도 그 품에 겹쳤다.
저를 반기는 둘을 떼놓은 콜린스가 여전히 몇 발자국의 거리를 좁히지 않고 서 있는 베스를 바라봤다.
주름진 눈가가 인자하게 휘어졌다.
“우리 베스도 벌써 이만큼이나 컸네. 다이애나에게 들었다. 고생 좀 했다며?”
그간의 고생을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콜린스만의 배려였다. 오랫동안 그리워한 목소리에 베스의 물기 어린 두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콜린스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고생 많았다. 아저씨랑 웨인으로 가자.”
베스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콜린스의 품으로 뛰어올랐다. 한참은 큰 품이 베스의 등을 토닥였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나는 네가 다 해낼 줄 알았어.”
쏟아지는 따스한 위로 속에서 베스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