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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44화 (44/206)

44화

“돌아갈래?”

창고를 나온 두 사람의 걸음은 어디로 향할지를 모르고 헤맸다. 멀리서는 아직 파티가 끝나지 않았는지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베스는 병원 연회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밝은 샹들리에 아래 서 있으면 제 표정이 숨김없이 보이는 게 무서웠다. 차라리 이 어둠을 빌려 조금 숨고 싶었다.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만, 외투 없이도 추위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딕시가 준 벨벳 구두코 위로 나붓하게 눈이 쌓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발끝만 쳐다보는 그녀의 위로 데베르의 재킷이 내려앉았다.

“난 더워.”

재킷을 사양하는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단벌 셔츠의 맨 윗단추 두어 개를 푸는 게, 정말 더운 모양이었다. 베스는 잠자코 어깨 위로 걸쳐지는 그의 재킷을 받아들였다.

베스는 청혼에 대해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은 채, 묵묵히 발걸음을 맞추기만 했다. 느릿한 걸음새가 평소 시원하게 뻗는 그의 걸음의 반의반도 되지 않을 텐데 불평 한마디 없었다.

자연스레 걸음은 숙소로 향했다.

막사와 간호 숙소의 갈림길에서 이번엔 남자를 막사 쪽으로 떠밀지 않았다.

제 발 코만 보며 걷던 베스의 마음에 문득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이젠 제법 눈이 쌓인 길 위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자, 그의 걸음도 그만큼 빨라졌다. 다시 속도를 줄여 작은 새 마냥 총총거리며 걷자, 남자의 발걸음 또한 그만큼 확연히 느려졌다.

아, 나와 걸음을 맞추고 있구나.

이렇게 추운 날, 입을 열기만 해도 하얀 김이 나오는 한 겨울밤. 왜 자꾸 제 눈으로 열이 올라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꼭 이러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베스는 숨을 크게 푸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이내 사라졌다.

“올리버 집사라고 있어. 친절한 이야. 아마 널 좋아할 거야.”

데베르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하거든.”

너 같은? 베스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내리는 눈에 젖어 가닥가닥 진 긴 속눈썹도 함께 깜빡였다.

“칭찬이야. 믿어도 돼.”

못 믿겠다는 듯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베스를 보던 데베르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올리버 집사는 데베르가 태어날 때부터 집안을 관리하던 사용인이었다. 사용인의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모시는 가문에 대해선 충성심이 높고, 무엇보다 입이 무거운 자였다. 데베르의 어린 시절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올리버는 몇 년 전부터 방치돼 있던 온실 정원을 정성껏 가꾸기 시작했다. 제 주인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아도, 그게 언젠가 채워질 클리프 부인을 위한 것이란 걸 데베르도 알았다. 그러나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부질없는 짓일지언정, 노년의 취미생활 정도로 남겨주려 했다.

쓸데없다고 생각한 그 온실 정원이 생각난 건, 베스의 머리 장식 때문이었다. 설원에 핀 꽃가지 같은 은색 머리핀은 여자의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온실 정원 좋아해?”

어느덧 도착한 숙소 문 앞에서 데베르는 물었다.

베스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물음의 답을 고민했다.

온실 정원.

웨인으로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이네스의 백작 저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부득불 갈 수 없다는 제 손을 끌다시피 하고 데려간 아이네스와 함께, 그녀의 온실 정원에서 티타임을 했었다.

그때도 한겨울이었는데, 그곳은 계절을 잊은 듯 만개한 꽃으로 가득했다. 꼭 겨울이 없는 세상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름답긴 했지만….

베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곳은 슬펐다. 적어도 그녀에겐 그랬다. 겨울을 잊은 듯이 구는 그곳에서, 꼭 제가 그 잊힌 겨울이 된 것 같았다. 꽃이 모두 지고, 가지가 앙상해지고, 모두가 움츠러드는 계절이라 해서 의미 없는 게 아니었다.

겨울은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을 테니.

“그럼, 서재는. 간호학교 수석이시잖아.”

베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이 순간이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전장이 아니었다면 닿아보지도 못할 이 남자가 제게 청혼을 얘기하고, 대답을 바라는 이 모든 상황이.

곧 무거워질 마음이라 해도 지금 당장은 웃어 넘겨보고 싶었다. 그게 욕심이라 해도, 이번 한 번쯤은 욕심 내보고 싶어졌다.

[왜 당연히 승낙할 거로 생각하죠?]

손바닥의 글씨를 들여다보던 데베르의 눈썹이 작게 들썩였다. 잔뜩 불만스러운 기색을 담아 다소 불량스럽게 제 입술을 한번 쓸었다.

동그랗게 뜬 여자의 눈에 장난기가 어린 게 보였다. 하지만 그 장난기를 넘어가 주기엔 오늘은 마음이 조금 급했다.

“넌-”

쉿, 베스가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댔다. 문짝만 한 그의 뒤, 저 멀리서 왁자지껄하게 병원 후문을 여는 무리가 보였다.

딕시와 친구들이었다.

급하게 숙소 외벽 귀퉁이로 데베르를 밀어냈다. 창가 쪽으로 그를 좀 더 밀어 넣고는, 귀퉁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친구들의 동향을 살폈다.

적당히 술과 파티의 여운에 취한 아가씨들의 볼이 발그레했다. 그 옆을 따라오는 몇 명의 병사들도 보였다. 아마, 그들의 파트너인 모양이었다.

“왜 숨어야 하는-”

데베르는 제 말끝을 먹은 작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봤다. 야무지게 그의 입을 막은 베스가 조용히 하란 눈짓을 했다.

가까운 곳에서 다소 아쉽게 이별하는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데베르는 적당히 베스의 장단에 맞춰, 잠자코 허리를 숙였다.

끼익하는 고장 난 문 이음새 소리와 노상 삐걱대는 나무계단 소리, 멀어지는 장정들의 취기 오른 웃음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베스와 데베르 위로 반짝, 창가의 노란 불이 들어왔다. 꼭 작은 달이 그들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베스는 그제야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군대장이자, 제국의 공작인데 체면을 너무 생각해주지 않았나 싶었다.

베스가 올린 손을 내리려 할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입술이 따라붙었다. 손바닥에 질척한 마찰음을 내고 떨어진 입술에 베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데베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체면 따위 없어서. 내 소문 알잖아.”

순간, 머리 위의 창문 고리가 삐거덕 소리를 냈다. 화들짝 놀란 베스가 얼른 그를 어둑한 그림자 속으로 잡아당겼다.

“좀 덥지?”

“눈이라도 먹으렴.”

“딕시라면 할 수 있을걸.”

깔깔거리는 수다 소리가 공중으로 퍼졌다.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쳐, 숙소 문 앞으로 온 베스는 얼른 재킷을 벗어 내밀었다. 더 있다간 정말 들킬 판이었다.

이젠 쏟아지듯이 굵은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잠시 내리는 눈을 보던 데베르는 마른세수를 한번 했다. 조금은 떨리는 것도 같았다.

“너무 오래 고민하진 마.”

마지막 고백이었다.

“애타.”

그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렸다.

하얀 눈밭 위로 홀로 걸어가는 데베르의 발자국이 내려앉았다. 베스는 그가 작은 점처럼 보이다 이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봤다.

함께 온 길을 홀로 되돌아가는 그의 너른 등이 쓸쓸해 보였다.

* * *

베스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디 있다 인제 오냐는 타박이 이어졌다. 다들 성공적인 파티의 후일담을 나누느라 바빴다. 주된 얘기는 각자의 파트너와 있었던 일, 혹은 대시를 받은 일과 같이 지극히 그 나이 또래 아가씨다운 주제였다.

예상치 못한 수확을 해, 아가씨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건 딕시였다. 몰리 부인은 항상 그녀를 보며 ‘제발 아가씨의 품위를 지키라’라며 잔소리했었지만, 딕시의 발랄함을 눈여겨본 병사는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베스, 너도 그걸 봤어야 했는데. 정말 장관이었다고.”

딕시를 두고 두 남자가 싸운 일은 이미 파티의 최고의 가십이 된 지 오래였다. 딕시는 “내가 좀 매력 있어야지”라고 말하며 능청을 떨었다.

“그래도 딕시 넌 누구랑 만나보고 싶어?”

“음….”

드물게 딕시의 얼굴에 고민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이내 밝은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난 아무도 안 만나고 싶어!”

“왜?”

“음, 난 결혼보단 사업이 하고 싶어. 울 아버지 들으면 기절하시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걱정 마. 너희들 연애랑 결혼은 내가 책임지고 감독해줄 테니까.”

능글맞게 베스에게 한쪽 눈을 깜빡인 딕시가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어 옆자리로 와 앉았다. 베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멀찍이 떨어져 아이네스의 곁으로 갔다.

아이네스의 어깨에 기대자, 그녀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보였다.

“게일과 돌아오는 봄에 결혼하기로 했어. 축하해줄 거지?”

아이네스가 베스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베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말고. 축하하지. 나의 사랑하는 친구의 결혼인데.

“고마워, 베스. 결혼식에 꼭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

또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베스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끄덕이는 고갯짓도 멈추지 않았다.

‘도망칠 곳이 필요하면 나한테 숨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숨겨줄게.’

꼭 뭐라도 알고 하는 말 같았다. 알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도 눈치가 빠른 남자이니,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와 있으면 자꾸만 이기적인 욕심이 생겼으니까.

이대로 모른 척 그의 뒤로 숨어버리고 싶다는 욕심.

아무것도 숨길 것 없는 베스 제인스를 흉내 내고 싶다는 욕심.

펑펑 내리는 눈이 베스의 가슴 위로도 소복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청혼을 받았는데 슬픈 날이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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