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함께 털썩 주저앉은 베스가 무릎걸음으로 데베르에게 다가갔다. 귓가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제 심장 소리인지, 아까 전 사람들의 구둣발 소리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보이는 건 고개를 푹 숙인 데베르의 반듯한 이마뿐이었다. 베스는 그만 조금 울고 싶어졌다. 떨고 있는 어깨에 손을 올려도 그는 시선을 맞춰주지 않았다.
채워졌던 마음이 무너지는 느낌이 났다. 항상 이랬다. 좋은 일이 있으면, 곧바로 나쁜 일이 닥쳤다. 제게 다가온 사람은 누구든 아파지고, 저에게서 멀어졌다.
너무 행복한 대가인 걸까.
급하게 약통을 열고 남자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때까지도 그의 어깨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희미하게 떨리던 어깨가 점차 크게 들썩였다. 뭔가 터져 나오는 숨을 애써 참는 것처럼 끅끅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처음엔 호흡이 불안정해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베스의 손이 불현듯 데베르의 귓가와 턱을 감싸듯이 들어 올렸다. 순순히 그녀의 손을 따라 올라온 얼굴은 허공에서 눈이 맞닿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휘어진 입꼬리 옆으로 깊게 팬 볼우물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찰랑이는 것 같았다.
베스는 망연히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제 얼굴을 고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번 붙은 시선은 질기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벽에 머리를 기댄 그는 천장을 보고 한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웃음을 갈무리하려 노력하는 모양이었는데,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놀랐어?”
곧 울음을 터뜨릴 얼굴을 하는 여자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평소 성질 같았으면 팩 그의 손을 팽개치거나, 멀찍이 물러나 노려봤을 베스가 웬일로 가만히 있었다.
데베르는 고개를 기울여 조금 더 깊게 눈을 맞췄다.
“많이 놀랐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울컥, 쏟아져나오는 감정을 참으려 베스는 약통을 말아쥔 손에 힘을 꾹 줬다. 진작 알아봤었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닌 남자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떨리는 게 보일세라 잔뜩 말아 넣은 입술을 아플 만큼 깨물었다.
“미안해. 그냥 장난쳐 본 거야.”
벌떡 일어나려는 베스의 손목을 붙잡은 데베르가 이번엔 조금 더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래봤자 여전히 말끝에 웃음기가 실려있었지만, 미안하다는 소리에 여자의 성난 기세가 조금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좀 쉬고 싶은데, 올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더라고.”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베스의 친구라는 계략가가 은밀히 그에게 신호를 줬지만, 그걸 냉큼 받아먹을 수는 없었다. 신사의 도리라는 게 있으니까.
이제야 놀란 마음이 좀 가라앉았는지, 베스의 동그란 눈매가 돌연 사늘해지는 게 보였다. 데베르는 어쩐지 그 모습에 또 마음이 간지러웠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다른 곳에서 쉬기는…… 좀 위험하잖아.”
베스의 뺨을 쓸던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붉은 입술 옆을 스쳐 아래로 미끄러졌다. 갸름한 턱을 한 번 쓸고는,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목덜미를 살짝 감쌌다.
데베르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담백하게 손을 뗐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
베스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발작이 온 것보다는 차라리 미친 짓이라도 장난인 게 낫긴 했다. 그래도 봐줄 생각은 없었기에, 베스는 엄한 표정을 풀지 않고 그의 손을 제 쪽으로 뒤집었다.
[정말 아프지 않은 거 맞아요?]
일부러 손톱을 세워 글자를 썼다. 이 남자는 알아채지도 못할 작은 복수겠지만.
“아프다고 하면 좀 더 다정하게 해주나?”
작은 손을 쥔 데베르가 이번엔 베스의 손바닥 위에 제 손가락을 움직였다. 경험해 본 적 없는 간지러움에 베스의 손이 움찔거렸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작은 손바닥 위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 그려지고 있었다.
[잘 들어.]
이 말이 뭐라고. 베스는 조금 긴장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요한 창고 안에서 슬며시 움직이는 데베르의 손가락만이 시간을 가진 채 흐르고 있었다.
[술은 좀 깼어?]
대단한 얘기라도 할 것처럼 굴더니 실없는 술 얘기라니. 베스는 맥이 탁 풀렸다.
힘없이 뚝 떨어지려는 손을 붙잡은 데베르는 그대로 베스의 허리를 감싸곤 일어섰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선 베스의 발이 허공에 붕 떴다.
데베르는 가볍게 베스를 협탁 위로 앉혔다. 그 옆에 양팔을 짚은 채 허리를 숙이자 시선이 같은 위치에서 마주쳤다.
조금 전의 싱거운 소리와 달리, 묘해진 분위기의 무게에 베스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데베르는 조용히 멀어진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까만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거리면서 떨리는 게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취하면 안 돼.”
마음이 선득해지는 목소리였다.
“주정뱅이한테 청혼할 수는 없잖아.”
청혼. 베스는 그의 입에서 나온 비현실적인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청혼이라니. 그것도 제국의 공작이라는 이 남자가.
잔뜩 찌푸려진 여자의 미간에 데베르의 검지가 닿았다.
“인상 찌푸리지 마. 좋은 날이잖아.”
필시 술 취한 건 제가 아니라, 이 남자였다. 종전의 기쁨에 취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픽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도, 저도 평소와 다른 이 분위기에 취해있는 것이리라. 저 안의 작은 연회를 즐기는 이들이 그러하듯.
베스는 남자의 팔을 잡아 내렸다.
[취하셨-]
“안 취했어.”
데베르의 숨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장난치는 건 더욱 아니고. 내가 그렇게 재미있는 남자는 아니라서.”
데베르는 동그래지는 눈을 보며, 순간적인 정염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조금만 기울이면 닿을 것 같은 저 입술에 당장 제 숨을 때려 넣고 싶다는 다소 저열한 욕망이 가슴께를 긁적였다.
신사라는 명목하에 꾹꾹 눌러 내린 욕정이 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새삼 아랫도리 간수 못하는 발정 난 개새끼로 치부했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저도 그중 한 사내일 뿐이었다.
데베르는 조금은 제 욕망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뭐든 이 여자에겐 빠를 테니까.
“전쟁이 끝나면 공작가로 들어와.”
대신, 이미 넘쳐흐른 마음은 동그란 이마에 짧게 입맞춤으로 대신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닿은 온기에 베스가 얼른 두 손으로 제 이마를 감쌌다. 남자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난 지금 너에게 청혼하는 거야.”
입맞춤과 함께 떨어진 청혼에 베스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붉은 입술이 어둠 속에서 올망졸망 움직이는 게 얼마나 눈앞의 남자를 힘들게 하는지도 모르고, 베스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가만두질 못했다.
데베르는 씁, 어린애를 달래는듯한 소리를 내며 죄없이 물어뜯기는 입술을 툭 건드렸다. 얼른 입술을 말아 넣은 베스는 다시 쿵쾅대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번엔 필시 제 심장 소리였다.
이 남자는 청혼의 무게를 모르는 걸까.
장난이 아니라 말하는 남자의 눈빛은 무거웠다. 가만히 침잠하는 시선 안엔 오직 베스만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았다. 왜 하필 나를.
베스는 넥서스를 지독히도 잘 알았다. 그 안의 계급이 얼마나 정교한지, 그리고 얼마나 틈을 주지 않는지 누구보다 절절히 체감했었다. 견고한 틀 하나를 깨부수는 데는 온몸을 부딪쳐도 모자랐다. 그런데 그걸 이 남자가, 자신을 위해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나죠?]
당신이 무엇 때문에 나를 위해 그러는 거지.
베스는 차라리 이 모든 게 취기의 농담이길 바랐다. 밝아올 여명과 함께 바래질 마음이라면, 적당히 겨울바람에 흘려보내는 게 나았다.
“너니까.”
단단한 목소리가 베스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곧 꽃을 피울 씨앗 하나가 넘어온 것이었다.
“나는 베스 제인스 아니면 안 돼.”
꽤나 순수한 고백이었다. 베스는 그건 말이 안 된다는 듯, 짧게 고개를 저었다.
데베르는 조심스럽게 작은 턱을 쥐었다. 어둠 속에서도 머리에 꽂은 머리 장식이 달빛처럼 반짝였다. 몇 가닥 이마로 흘러내린 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정말이야. 난 너 아니면 안 돼.”
데베르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넌 나를 지나치지 않았으니까.”
이유를 묻는 까만 눈이 사랑스러웠다. 저를 향한 동정심이라도 상관없었다. 뭐가 됐든, 이 여자를 제 옆에 묶어두고 싶었다.
같은 마음이 아닐지언정, 그조차 괜찮다고 여길 만큼.
“네 현실이 어디에 있건 상관없어.”
데베르는 별것도 아닌 편지 하나에 쓰러졌던 베스를 기억했다. 전쟁 후 돌아갈 곳이 있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헤매던 시선을 잊지 않았다.
만약 정처 없이 맴도는 마음이라면, 제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이 여자의 약한 부분을 붙잡고 늘어질 수 있었다.
죄책감 따위 없으니까.
“도망칠 곳이 필요하면 나한테 숨어.”
데베르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숨겨줄게.”
달콤한 말이었다. 충분히 베스의 마음을 흔들 법한 고백이었다. 베스는 문득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말하지 못하는 게 전혀 답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손을 올려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튀어나온 눈썹뼈를, 곧게 뻗은 콧대를, 옅게 패인 볼우물을 훑었다. 간지럽게 스치는 손끝에 데베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너 자꾸 이러면 안 돼.”
잿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숨기지 못할 마음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여자의 드러난 목덜미를 살며시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금은 밀어버릴 창턱도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데베르의 입술이 베스에게 닿았다. 틈 없이 맞닿은 입술의 열기가 온전히 서로에게 전해졌다.
데베르의 셔츠 깃을 붙잡은 베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데베르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 손을 잡아 제 목에 올렸다. 곧 베스의 손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감겨들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바스락거리는 드레스 너머 데베르의 손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깊은 입맞춤의 여운이 남은 자잘한 키스가 베스의 턱을 지나 목으로 내려왔다.
하얗게 뻗은 빗장뼈 위에 입술을 붙인 데베르는 그대로 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팔딱거리는 여자의 숨이 여과 없이 느껴졌다.
“미치겠다, 진짜.”
품 안의 베스를 세게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이 함께 쿵쿵거렸다. 폐부 깊숙이 베스의 향을 들이마시고서야, 취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단단히 팔을 고쳐 안았다. 이 여자가 도망갈 수 없도록.
이젠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