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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42화 (42/206)

42화

짙은 감색 제복 위로 흰 눈발이 내려앉았다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데베르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죠.”

베스는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봤다. 손을 잡는 대신 한 걸음 다가가자, 비어버린 그의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아프게 쥐고 있던 그의 브로치를 풀이 빳빳하게 먹은 가슴팍에 끼워 넣었다. 귓가에서 그의 작은 탄식이 들린 것도 같았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약속의 증거.

약속을 지킨 이 남자에게 이젠 돌려줘야 할 때다.

때마침 조금 더 굵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한 번 올려 본 베스는 그 하늘과 닮아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베스는 데베르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눈처럼 생겨서는, 눈보다 따뜻하게 웃는 베스였다.

왁자지껄한 인파 사이로 간간이 철 지난 노래가 흘러들었다. 상기된 얼굴의 병사와 의료진들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베드를 치운 일 층 연회장에서 이름 모를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다.

계급과 의무를 모두 내려놓은 그들은, 그저 보통의 청년들이었다. 전쟁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일 뿐이란 걸 모두 알았다. 총성만큼이나 지독한 삶 또한 있는 법이니까. 다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웨인으로, 또 다른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잠시간의 평화에 온몸을 맡기기로 했다.

칼 같던 상관들도 유한 모습으로 부하들을 대했고, 남몰래 품어온 간호사에 대한 연정을 고백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자, 주목!”

작은 연회장의 중간에 선 아더가 와인잔에 티스푼을 부딪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위에 아더는 짧게 웃었다.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긴 그는 평소보다 성숙한 인상을 주었다. 갈색빛이 도는 짙은 눈썹이 장난스레 꿈틀거리며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 파티가 즐거우신가요?”

곧이어 “예!”하는 우렁찬 남자들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너무 큰 소리에 아가씨들은 저들끼리 키득댔다.

“저 또한 즐겁습니다. 우리가 무사히 종전을 맞이했다는 것이요.”

아더가 게일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휠체어에 앉은 게일은 제 약혼자의 손을 꼭 쥔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청혼한 용기 있는 사내 또한 있죠.”

또다시 “와!”하는 함성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외친 “게일 웰링턴!”가 점차 파도처럼 번져나가, 홀 안의 병사 전부가 “게일 웰링턴! 게일 웰링턴!”를 외쳐대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게일 웰링턴! 소감을 안 물어볼 수가 없겠죠!”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홀 중앙으로 게일이 나왔다.

그의 휠체어를 잡은 아이네스의 볼은 그녀가 입은 연분홍색 드레스보다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게일은 짧은 소회를 밝혔고, 아이네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우레같은 박수 사이로, 아더는 데베르를 찾아 짧게 손짓했다. 군대장의 연사가 빠질 수는 없으니까.

베스는 제 곁에 서 있다가 천천히 걸어 나가는 데베르의 등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핏자국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아더가 건네는 샴페인 잔을 든 데베르는 잠시 말을 골랐다. 수백 개의 눈이 저를 향한 게 느껴졌다. 등을 돌리자, 그를 향한 올곧은 시선 하나가 들어왔다.

“제군들은 모두 이 전쟁의 영웅이다. 나는 그대들이 있어 넥서스의 군대장을 맡을 수 있었고, 전투의 승리라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

데베르는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부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도, 살리지 못했다는 후회도 하지 말길 바란다. 이건 내가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그럼, 파티를 즐기도록.”

그가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자 우레같은 환호성이 쏟아져나왔다. 타이밍을 재다가 잽싸게 전축 음향을 최대로 높인 딕시가 달아오른 분위기를 한층 더 돋웠다.

웨인 사교계에서 쓸 법한 오케스트라 선율이 부드럽게 좌중을 압도했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남녀 몇 쌍이 눈치를 보더니, 홀의 중앙으로 나와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배운 정식 사교춤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우스워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구석 기둥에 얌전히 기대선 베스에게 데베르가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술은 마실 줄 알아?”

베스는 샐쭉 그를 흘겨보고는 한 모금을 삼켰다. 쌉쌀하면서 톡 쏘는 알코올 향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자, 곁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시지도 못하면서.”

잔을 뺏으려는 그를 피해 베스는 머리 위로 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봤자 그의 턱 정도밖에 안 오는 위치였지만, 데베르는 굳이 뺏지는 않았다.

취한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차피 밤새 곁에 있을 것이기에, 조금 취한 베스 제인스를 이 기회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스쳤다.

“적당히 마셔.”

데베르는 능청맞게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 모습에 오기가 생긴 베스는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굳이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난방이 잘되지 않는 병원인데도 덥기만 했다.

그런 그들을 멀리서 주시하던 딕시가 슬금슬금 걸어왔다. 이 답답한 인간들이 판을 깔아줘도 저 모양이니. 파티의 주최자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 좋은 날. 춤을 안 추시고….”

슬쩍 데베르를 쳐다보며 딕시가 운을 뗐다.

베스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고, 그 옆의 목석같은 남자 또한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딕시는 일찌감치 제 친구는 포기한 채,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공작에게 타깃을 돌렸다.

“아니, 두 분 피곤하시면 저기 복도 끝 약제실이 쉬기에 딱 좋은데…. 좀 쉬셔도 괜찮고….”

은근한 권유에 데베르는 피식 웃었다.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권유였다. 베스의 친구라기에는 제법 앙큼한 구석이 있는 간호사였다.

데베르는 비스듬히 베스를 한 번 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한 채, 한껏 새침해진 얼굴은 ‘좀 쉬어라.’라는 제 친구의 말이 뭔지도 이해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러니 내가 미치지.

데베르는 제 눈가를 한 번 쓸었다.

“괜찮습니다. 딕시 양. 그보다 뒤에 찾는 사람이 있는 거 같은데.”

“네? 찾는 사람이요?”

휙 뒤를 돈 딕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딕시의 뒤에는 웬 멀대 같은 남자 하나가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누구세요?”

다소 날카로운 딕시의 물음에 다시 한번 남자의 얼굴이 후다닥 달아올랐다.

“저, 저번에 딕시 양이 창고 물건 옮기시는 걸 도왔던 이반입니다.”

아, 그제야 얼핏 그 얼굴이 떠오른 딕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부르셨죠?”

“아, 저, 저는. 그러니까. 지금 춤이, 아니 노래가.”

횡설수설하는 남자를 보던 딕시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요 귀여운 병사 하나가 또 자신에게 낚였다는 생각에 가슴이 몽글거렸다.

순박한 모습이 꽤 귀엽긴 해서, 한 번 놀려볼 요량으로 일부러 울상을 지었다.

“노래가 너무 시끄러운가요? 확! 다 꺼버릴까요?”

“아니요! 아니요! 노래는 너무 좋고, 그러니까.”

그래, 그래. 더 말해 봐. 딕시는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남자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저랑 춤 한 번만 춰 주십시오!!!”

하지만, 예상보다도 더 큰 외침에 순간 홀 전체에 정적이 찾아왔다. 웬만해선 당황하는 일 없는 딕시의 얼굴에도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그 모습을 보던 베스 또한 함께 헉, 숨을 들이켰다.

“받아줘라!”

쏟아지는 박수 세례에 딕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가 남작 이상이랑만 놀라고 했는데.”

빠르게 베스의 귓가에 속삭인 딕시는 용기 있는 병사의 손을 잡고 홀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베스는 그 모습이 귀여워 낮은 웃음을 흘리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그러다, 어느덧 빈 샴페인 잔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안을 들여다봤다. 왜 벌써 없을까.

레이스 천으로 둘린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이내 가득 채워진 와인 잔이 손에 들어왔다. 입가로 가져가는 잔을 누군가가 뺏어 들었다.

“그만 마셔.”

베스는 자신을 타박하는 눈동자를 살며시 노려봤다. 취기가 올라 끝이 불그스름해진 눈에 잔뜩 힘을 줬다. 이러면 겁을 먹어서라도 술을 돌려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데베르는 와인잔을 저 멀리 치우며, 단호하게 “안돼”라고 일축했다.

춤추는 사람들로 인해 적당한 쿵쿵거림이 마룻바닥을 타고 베스에게도 전해졌다.

쿵. 쿵.

그 발걸음들을 따라 베스의 심장도 함께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문득 자신은 보고만 있어도 재밌지만, 이 남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무려 넥서스의 공작인데. 화려한 파티며, 아름다운 여인들은 질리도록 겪었겠지.

그 생각이 스치자, 베스는 그만 들뜬 마음이 축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는 이 파티를 지겨워할까.

살짝 고개를 틀어 데베르를 보던 베스의 얼굴이 돌연 하얗게 질렸다.

기둥에 기댄 데베르는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고통을 참는지 이를 꽉 깨문 턱 근육이 불뚝 튀어나왔다.

베스는 얼른 무릎을 굽혀 남자와 시선을 맞췄다.

“야, 약….”

짓씹는듯한 음성이었다.

베스는 데베르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인파로 가득한 병원을 빠져나왔다. 분위기 좋게 춤추는 한 쌍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지나가기도 했다.

데베르의 약은 병원 내부에 보관하지 않았다. 웬만한 중증이 아니고선 처방하는 일이 없기도 했고, 부작용 때문에 다른 약이 있으면 그걸 먼저 처방하는 편이었다.

찬 바람을 뚫고 창고로 달려가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문을 열었는지도 모른 채, 베스는 빠르게 선반 깊숙이 숨겨진 데베르의 약을 찾아냈다. 돌아본 그는 벽에 기대 주저앉아 있었다.

너른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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