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베스는 나른한 몸을 꼼지락거렸다. 머리맡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피해 고개를 더욱 깊숙이 배게 속으로 파묻었다.
오랜만의 깊은 잠이었다.
‘나는 너 때문에 못 자는데.’
부끄러운 마음을 대신해 하얀 발가락이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바스락대며 침대보를 스쳤다.
어젯밤, 데베르는 베스를 잠잠히 올려보기만 했다. 베스 또한 그런 그를 가만히 마주 봤다.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는 걸 느낄 때쯤, 남자는 입을 열었다.
‘아쉽네. 어깨가 덜 아물어서.’
그 말이 무슨 의민지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분명 발개졌을 제 얼굴을 보며, 잠시간 웃던 그는 ‘잘 자’라는 마지막 인사를 던지고 막사로 걸어갔다.
베스는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그 남자는 어떤 밤을 보냈을까.
잘 잤을까.
약은 먹었을까.
저번에 준 약은 벌써 동날 때가 됐는데 모자라진 않았을까.
마음만큼이나 서툴고 성급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베스! 일어나!”
일 층에서 딕시가 소리를 내질렀다. 이어 그 큰 목소리를 핀잔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뒤따라왔다.
베스는 일어났다는 표시로 벽에 튀어나온 나무 골조를 쿵쿵 쳤다. 그 소리에 잠시 조용해졌던 아래층이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다시 제 일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준비였다.
늘 하듯 깨끗하게 다린 간호복을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묶고. 지루하다면 지루한 일상의 시작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이네스의 아침 단장이 조금 더 길어졌다는 것뿐이었다.
“너무 일찍 일어난 거 있지?”
아이네스가 상기된 표정으로 침실로 들어왔다. 갓 청혼받은 앳된 아가씨의 설렘이 말간 얼굴 위로 여과 없이 드러났다.
“밑층은 어찌나 참견하는 사람이 많은지. 저 얘기 다 들으려면 얼굴이 하나로는 부족할 거야.”
그녀의 손엔 거울과 화장품이 들려있었다.
베스의 시선을 느낀 아이네스가 민망한지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알아, 베스. 내가 지금 좀 흥분해 있다는 거. 하지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분홍빛 뺨이 발그레했다.
“청혼이잖아! 평생에 단 한 번뿐인!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아이네스의 표정이 돌연 진지해지더니, 베스의 손을 잡아 왔다.
“어제 그냥 한 말 아니야. 네가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집으로 돌아가기 힘들면 우리 집으로 와. 웨인 제국 병원에서 일하면 기숙사도 있잖아.”
“아냐! 집은 내가 구해줄게!”
언제 따라온 건지 뛰어 들어온 딕시가 말을 가로챘다.
“우리 집 졸부인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우리 아빠가 또 집 매물 구하는 거에 환장했거든.”
딕시는 제 부적절한 언사를 책망하는 아이네스의 손을 요리조리 용케도 피해, 베스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웨인으로 가서 사업을 하고, 너는 병원에 다니는 거야. 어때? 밤마다 아이네스도 초대하고. 너무 좋은 생각이지?”
“공작님과 연애도 하고.” 마지막 말은 베스만 들을 수 있게끔 귓속말로 속삭였다. “무슨 얘기야?” 아이네스가 물었지만, 딕시는 시침을 뚝 뗐다.
“아, 재밌겠다. 얼른 웨인으로 돌아갔으면!”
딕시는 발을 동동 굴렀다.
* * *
“그럼, 딕시 양이 전야제 소식을 병사들에게 전해줘요.”
서류철을 덮으며, 부인은 회의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미 소문날 만큼 다 났던걸요. 흐흥.”
“분명 말하는데, 전야제는 밤부터 시작이에요. 여러분은 오늘도 자신의 몫을 해주어야 합니다. 전쟁이 끝나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어요. 그 부분 다들 명심하길 바라고.”
엄한 부인의 얼굴 위로 미소가 스쳤다.
“전야제를 기대하며 해산하죠.”
병원장실을 쏟아져나오는 모두의 얼굴에 평소와 다른 설렘이 감돌았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로비와 연회장으로 쓸 일 층을 꾸며야 하니 모두 협조해주세요.”
딕시가 제일 먼저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외쳤다. 그새 지나가는 병사 몇 명까지 동원해 이젠 얼추 눈에 익은 창고로 들어갔다.
천장을 꾸밀 붉은 벨벳 천을 털자, 부옇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콜록, 어유. 이거 못 쓰겠는걸요.”
병사 하나가 투덜대자, 딕시의 얼굴이 부인만큼이나 엄해졌다.
“불가능은 없어요. 전투까지 해내신 분께서 고작 먼지 하나에 포기하시나요?”
칭찬인지 질책인지 모호한 말에 병사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과연 조련에 능한 딕시였다.
때에 맞게 보급 차량 또한 쉴 새 없이 도착했다. 폭격으로 길이 막혀 있다 뒤늦게 도착한 보급품부터, 승전을 축하하는 황제의 하사품까지. 때아닌 문전성시를 이뤘다.
소름 끼칠 정도의 정적 아니면 끔찍한 비명만이 가득했던 병원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죄책감 없는 웃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부상병들은 마당을 뛰어다니는 닭과 오리들을 꼴사납게 쫓아다니는 동료를 보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축음기는 가끔 쇠 긁는 소리가 나긴 해도 제법 제 역할을 잘해주고 있었고, 깨끗이 닦은 샴페인 잔들도 레이스를 두른 협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아, 이거 너무 높은데.”
의자 위에 올라간 딕시가 아슬아슬하게 손을 뻗었다. 발끝을 세워봐도 손에 들린 샹들리에는 천장에 닿기엔 한참 모자랐다.
“바든 선생님은 왕진가셨는데.”
소피아가 울상이 돼 중얼거렸다.
“도와드리고 싶은데, 다리가 이 모양이라.”
목발을 짚은 게일 또한 멋쩍게 한마디 거들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와주던 병사들은 상관의 부름에 뛰어간 지 오래였다.
딕시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완벽한 전야제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니.
마당으로 걸어간 딕시는 허리춤에 손을 턱 올렸다. 가축과 차량, 사람이 한데 엉긴 인파 틈으로 이 일에 적격인 두 사람이 보였다.
키 크고, 힘 좋고, 부를 상관이 없는 사람.
“거기 데베르 공작님과 아더 황자님! 좋은 일에 동참하시죠!”
보급 차량을 확인하던 데베르와 아더의 눈이 한곳으로 꽂혔다. 그곳에 장군 같은 기세로 저희를 부르는 딕시 콜먼이 있었다.
“잘못 걸린 거 같지 않아?”
아더가 활짝 올린 입꼬리를 움직이지 않으며 속삭였다.
“얼른 오세요!”
답지 않게 주저하는 넥서스 군대장과 사령관의 발걸음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멀뚱히 샹들리에를 들고 선 베스였다. 적어도 데베르에게 보이는 건 그게 전부였다.
“저 샹들리에 좀 달아주시겠어요?”
딕시의 부탁에 아더가 먼저 나섰다.
아더가 의자를 밟고 올라서자, 할 일이 없어진 베스는 빈손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앞에 데베르가 있었지만, 어째 오늘은 눈을 마주치기도 민망했다.
“어제는-”
“베스!”
비로소 운을 뗀 게 우습게도, 화통을 집어삼킨 목소리가 데베르의 말을 잘라먹었다. 데베르는 이젠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베스에겐 고개를 대충 저어 보였다.
“얼른!”
성질 급한 딕시가 베스의 손을 낚아챘다.
밖으로 달려간 딕시는 막 도착한 보급 차량 짐칸에서 커다란 소포를 끌어 내렸다. 질질 바닥에 끌리는 소포를 겨우 수레에 싣더니, 그대로 후문 쪽으로 밀고 갔다.
“어우. 왜 이렇게 무거워.”
숙소 앞까지 와서야 허리를 펴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얼굴엔 감출 수 없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이게 뭔 줄 알아?”
고민하던 베스는 손을 들어 먹는 시늉을 했다.
“먹을 거? 훗, 아니야. 이거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오늘 파티 때 우리가 입을 옷이랑 구두야.”
딕시는 팔랑팔랑 병원으로 뛰어갔다.
“기대해도 좋아! 이제 일하러 가자!”
해가 질 때쯤 병원은 제법 연회장 분위기가 났다.
전구가 없는 복도 창가마다 달린 등유 램프는 꼭 웨인의 전등 축제를 작게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일렁이게 했다. 낡은 바닥과 칠 벗겨진 벽조차 어둑한 불빛에 운치 있게 보일 정도였다.
깨진 창문은 나무판자로 막고, 바느질 솜씨 좋은 몇 명이 터진 숄을 이용해 커튼을 만들어 달았다.
딕시가 심혈을 기울여 매단 샹들리에가 흐르는 음악을 따라 간헐적으로 반짝였고, 이르게 도착한 몇 병사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이를 모르는 간호사들은 숙소에 모여앉아, 딕시의 소포를 풀어보느라 난리였다.
먹고살기 바빠 전장까지 따라온 이들에게 드레스라니. 아이네스와 딕시를 제외하면 고급 옷은 엄두도 못 내 본 이들이었다. 그걸 알고 딕시는 모두의 몫을 챙겨달라 제 아버지에게 부탁했더랬다.
곳곳에서 찬탄이 터져 나왔다.
“어, 이건 베스랑 아이네스 거야.”
딕시가 옷더미 속에 파묻힌 드레스 두 벌을 얼른 꺼내 들었다. 은은한 하늘빛과 연분홍색 드레스는 너무 요란하지도, 밋밋하지도 않았다. 딱 평소보다 기분을 띄울 정도로만 화려했다.
“소피아에게 파트너 신청하는 남자 얼굴 봤어? 토마토인 줄 알았잖아.”
“저번에 팔 다쳐서 온 사람 기억나? 이마에 흉터 있던. 그 사람이 나한테 데리러 오겠다던데.”
“아무도 내겐 신청하지 않아. 휴,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혼자 춤추지 뭐.”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잘대는 소리가 숙소의 라디오가 돼 주었다. 준비를 마친 이들이 하나둘 병원으로 떠났다.
꾸미는 것쯤은 눈감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딕시는 순식간에 제 단장을 끝내고 베스를 불렀다.
“첫 데이트 때는 푼 머리를 보여줬으니, 이번엔 땋은 머리야.”
소곤소곤 단장 계획을 읊조렸다.
“딕시, 베스. 가자.”
마지막으로 남은 둘을 아이네스가 재촉했다.
잠깐 고민하던 베스는 펜을 들었다.
[먼저 가. 나는 조금 있다 갈게.]
“그럼 얼른 와.”
여닫히는 문소리를 듣고서야 베스는 거울 앞으로 갔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가 곧게 뻗은 빗장뼈를 간지럽혔다. 머리칼이 내려오지 않은 반대쪽에 꽂은 자잘한 꽃가지 모양의 머리 장식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장터를 갈 때처럼 낯선 모습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민망하지 않을 만큼 패인 푸른 앞섶 위로 흰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심장도 함께 쿵쿵 뜀박질했다. 데베르와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라면 있을 것 같았다.
기다릴 때마다 찾아왔던 그였으니까.
입술만 깨물어대던 베스는 마침내 고장 난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밖은 하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전초에서 맞는 첫눈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리던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