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베스는 입술 끝을 깨물었다.
저 남자는 항상 그랬다. 저런 표정을 하고, 저런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면서 자꾸만 그녀 안의 선을 넘어 들어왔다.
“한 번만.”
나직한 읊조림까지 잘 들리는 건, 겨울밤의 배려일까. 아니면 저 남자의 말을 듣고 싶은 제 마음일까.
창턱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데베르는 여자에게서 나올 승낙을 위해 기꺼이 기다림을 택했다. 고민하는 까만 속눈썹이 내리깔리고, 여린 어깨가 오르내리고, 가끔 입술을 깨물기도 하는. 그를 승낙하기 위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기다림은 전혀 지루하지 않으니까.
마침내 베스가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데베르는 불현듯 가슴께가 아릿했다. 바닥에 내던져진 연고 통을 주워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성급한 시선은 계속해서 문가로 향했다. 기대선 벽에서 한기가 올라왔지만 춥지 않았다. 이상스러울 만큼 열기가 뻗쳐댔다.
바스락, 마른 풀 밟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달콤한 꿈처럼 베스가 있었다.
닿지 못할 높은 곳이 아니라,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베스 제인스가.
베스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에도 다가가지 않았다.
“안 들어갈 거야.”
베스의 미간이 슬그머니 찌푸려졌다.
“들어가기 싫다고.”
되지도 않은 고집에 더는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술에 취했나 싶었는데,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서늘한 눈 또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연고 통으로 손장난을 하던 남자는 그대로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당황한 베스는 머뭇거리며 그의 소매 끝을 잡았다.
이 추운 밤에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대체 무슨 짓인지.
조급하게 소매를 잡아당겨도, 고작 그 정도 힘에 끌려올 리 만무했다. 소름 끼치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사방을 에워쌌다. 어째 애가 닳은 쪽은 베스였다.
[가요]
“격리실로 가긴 싫어.”
[왜요]
데베르는 말을 골랐다. 수없이 떠오르는 거짓말 중, 가장 그럴듯한 것을. 그래서 이 여자가 할 수 없이라도 제 말을 또다시 따라 줄 수밖에 없게 하고 싶었다.
“무서워서.”
낮게 가라앉은 눈에서 꽤 처연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 눈을 마주한 까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데베르에게도 확실히 보였다.
평생을 상대의 약점을 탐색하며 살아왔다. 때론 살아남기 위해, 때론 죽이기 위해.
어릴 적엔 아버지 카시우스를 쉬지 않고 살폈고, 조금 더 커서는 적군, 더 자라서는 아군과 황족들까지. 그를 둘러싼 것 중 편히 시선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베스 제인스는 상처에 약하다.
더럽게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고, 그가 하는 말마다 인상만 찌푸려대는 이 여자는, 약한 모습에 무너진다. 그게 연민이든 동정이든 간에.
그 마음 한 자락이라도 붙잡으면 그만이다.
기어코 놓아주지 않으면 되니까.
[그럼 어디로 가고 싶어요]
역시나.
베스는 데베르의 말에 격리실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무르게 굴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결국 또 원점이었다.
“병원 말고 어디든.”
그 말에 잠깐 고민하던 베스는 다시 한번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번엔 순순히 따라 일어나준 남자의 어깨 위로 덮고 있던 숄을 둘렀다. 야전에서 함께 밤을 새웠을 때, 재킷을 벗어 준 그에게 늘 마음에 빚이 있던 차였다.
“뭐 하는 거야.”
어깨를 다 감싸지도 못하는 숄이 어설프게 걸쳐졌다. 까치발을 들고 몇 번 낑낑거리던 베스는 이내 포기했는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작은 등을 데베르는 굳은 듯이 바라봤다.
“미치겠네.”
나직한 중얼거림도 바람결에 흩어졌다.
벌써 저만치 걸어간 베스가 손을 팔락팔락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꼭 어둠 속의 신기루처럼 반짝댔다.
조금은 화가 난 듯 성큼성큼 베스의 코앞까지 온 데베르는 숄을 펼쳤다. 넓게 펼친 숄로 여자를 꽁꽁 감싸듯이 동여맸다. 왜 그러냐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둘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약품 창고로 향했다.
팔을 빼내려 꼼지락거리는 베스를 대신해, 데베르가 목덜미 사이로 드러난 목걸이를 풀었다. 오랜만에 제 주인을 만난 목걸이가 부드럽게 그의 손에 감겨들었다.
선반에서 새 붕대와 소독약을 챙긴 베스는 바깥 공기에 차가워진 손을 힘껏 마주 비비고 입김을 불어댔다.
“뭐해.”
[차가울까 봐요]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손가락이 말을 전했다.
협탁에 걸터앉은 데베르는 슬며시 빛바랜 간호복 끝자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난 괜찮아.”
한참을 손을 데우던 베스는 어느 정도 체온이 미지근해지고 나서야, 붕대로 손을 가져갔다. 셔츠를 벗은 데베르가 등을 돌렸다. 베스는 순간 터져 나오는 숨을 삼켰다.
총상이 아물지 않은 자리에 마구잡이로 난도질당한 어깨와 등은 엉망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몇 번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찔린 자국이 가득한 등은, 무질서하게 꿰맨 흔적이 덮고 있었다.
소독약이 닿을 때마다 고통을 참기 어려울 텐데도,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가장 살이 많이 벌어진 날갯죽지를 스칠 때만, 잘게 쪼개진 등 근육이 움찔했을 뿐이었다.
베스는 스스로에 대한 깊은 무력감에 막막해졌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은 숨이 고요한 창고 안을 울렸다.
“더는 이런 짓 안 해.”
핀셋을 쥔 손이 문득 허공에 머물렀고, 남자의 숨도 잠시 멈췄다.
데베르가 등 뒤로 연고 통을 내밀었다. 하지만 베스는 섣불리 받아들지 못했다. 더 이상의 기만은 두려웠다. 어쭙잖은 희망을 대체 제가 뭐라고 더 전할까.
연고를 받는 대신, 그의 손끝을 살며시 잡았다. 못다 한 거짓말을 고백하기 위해.
[사실]
“알아.”
듣기 싫다는 듯, 그의 손이 베스의 손을 꽉 쥐었다.
“안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
데베르가 돌아봤다.
베스는 거짓말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노라 되려 고백하는 그의 눈을 멍하니 마주 봤다. 한때는 저 눈이 무섭고 음울해 보인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그 안에서 다정한 구석을 발견한 건.
“해 줘. 난, 그냥. 그저….”
답지 않게 말을 흐리던 남자의 고개가 떨궈졌다.
“그거면 돼.”
나직한 한 마디를 뱉으며 데베르는 베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베스는 가만히 목덜미에 닿는 부드러운 머리칼과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을 견뎠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고 보잘것없는 연고 통은 깨끗했다. 분명히 흙바닥에 던졌는데도 먼저 하나 없이 말끔했다. 떨어진 연고 통을 줍고, 닦아냈을 그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마음이 이상하다. 자꾸만 그렇게 된다.
베스는 이젠 데베르가 홀로 겪었을 그 시간과 등의 흉터를 눈감고도 손으로 그릴 수 있었다.
이 남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베스가 숙소에 도착했을 땐, 잔뜩 들뜬 목소리와 탄성이 계단 아래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베스! 얼른 이리 와 봐!”
다소 피곤한 기색으로 들어온 베스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모두 흥분한 모습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베스의 손을 딕시가 잡아당겼다.
“이것 봐.”
딕시는 나머지 손으로 아이네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네스의 약지에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그래! 설마 하던 일이 드디어 오늘 일어났다고!”
소피아가 소리를 내질렀다.
“오늘 백작님이 청혼하셨대. 심지어 이 반지는, 훨씬 이전부터 웨인에서 사서 들고 다니셨대. 너무 낭만적이지.”
“얘는, 베스가 들으면 흉보겠다.”
아이네스는 민망해하면서도 상기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우리 중엔 아이네스가 가장 먼저 결혼하네.”
“이다음은 누가 될지 모르지.”
딕시는 슬쩍 베스에게 눈을 찡긋했다.
“결혼식은 당연히 웨인에서 할 거지?”
“응, 아마도.”
“참, 베스. 넌 고향이 어디랬지? 웨인은 아니잖아, 그치?”
갑작스런 질문에 베스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에게도 제 고향이나 가족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베스. 돌아가면 결혼식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도와주지 않을래? 나 혼자서는 결정이 힘들 것 같아서, 봐주는 친구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
아이네스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비록 사정은 모르지만, 누구에나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있지 않은가. 제 친구의 그 부분이라도 지켜주고 싶은 맘이었다.
“어? 우리 아빠 별장에서 지내자. 우리 셋이서 같이! 아이네스 결혼 준비도 돕고. 어때? 어때?”
딕시는 질기게도 “어때”를 연발하며 베스를 괴롭히다, 결국 마지못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베스도 그 옆에 털썩 엎어졌다.
“이게 평화구나. 평화야. 종전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 뒤로도 한참을 결혼 얘기에 열을 올리던 아가씨들은 새벽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베스만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더는 이런 짓 안 해.’
데베르의 목소리가 자꾸만 맴돌았다. 모로 누운 몸을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앉았다.
폭력에 쫓겨 다니고, 두려움이 일상이 되어버렸던 삶 속에서 그 누구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도하고, 울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잔인하고, 냉정하고, 무성한 소문을 이끌고 다니던 그 남자는 저를 찾아냈고, 구해냈고, 약속을 지켰다.
침대맡 창턱에 올라앉았다. 볼 것 없는 풍경은 고요한 어둠 속에 잠들어있었다. 찬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 손잡이를 쥐었을 때였다.
설마.
아니라는 생각과 달리, 심장은 속절없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낡은 창이 삐걱대며 베스 대신 입을 열었다.
“어.”
창 아래의 남자도 갑자기 창문이 열릴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왜 안 자.”
남자가 이내 웃었다. 아까 전 창고에서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로. 고작 그걸로도 충분히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생각나서 못 자는 거 아냐?”
베스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래. 내가 이 남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나는 너 때문에 못 자는데.”
저조차도 몰랐던 마음이 분명한 모양을 갖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