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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39화 (39/206)

39화

딕시는 이런 부분에 있어 꽤나 추진력 있는 편이었다. 당장 다음날 몰리 부인과의 오전 회의에서 파티 얘기를 꺼냈으니 말이다.

파하는 분위기 속, “건의 사항 있니.”라는 마지막 말에 딕시는 번쩍 손을 들었다.

“건의 드릴 게 있습니다.”

“그, 그래요. 말해 봐요.”

유독 반짝이는 눈빛과 야무진 목소리에 부인은 걱정이 앞섰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라는 손짓을 했다.

“다가오는 건국기념일에 파티를 열면 어떨까요?”

“파티? 여기에서?”

베스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부인과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모두 어제 베스가 그랬듯, 폭격으로 깨진 유리창과 마감이 덜된 낡은 마룻바닥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아직 어수선한 게 많다는 걸 알지만, 건국기념일까지 이곳에서 보낼 부상병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주근깨 섞인 딕시의 방긋 솟아오른 광대는 설렘을 숨기지 못했다.

“본래 여기가 호텔이었잖아요. 창고에 쓸만한 게 남아있을 거예요. 친구들이 도와주기만 하면 제가 추진해보겠습니다!”

호텔… 은 호텔이긴 했다. 다만, 넥서스 가장 후미진 곳에서 뜨내기손님만 받다 망해버린 허름한 여관 수준이었다는 게 문제지.

하지만 몰리 부인은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얼굴들에 슬며시 들뜬 기색이 올라오는 게 보였으니까. 만개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다들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부인은 그들을 보며 누워있는 병사들을 생각했다. 완연한 청년의 태가 나는 데베르와 아더의 얼굴 또한 겹쳤다.

가장 끔찍한 곳에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모여있다니. 이 모순을 어찌할까.

부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물러나 줄 때다.

“좋아요. 딕시가 책임지고 건국기념일 파티를 맡아줘요. 이 일에 관해선 전권을 딕시 간호사에게 맡기죠.”

“정말요?!”

깐깐한 부인이 막상 흔쾌히 승낙하자, 딕시는 제가 더 놀라 벌떡 일어섰다.

흥분을 못 참고 부인을 껴안은 통에 그녀의 품 안에서 부인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딕시! 어유! 망아지처럼 굴지 말고!”

방 안이 깔깔대는 웃음으로 가득 찼다.

속절없이 딕시의 ‘친구들’ 명단에 든 몇 명이 지하로 통하는 창고 문 앞에 섰다. 다들 얼굴에 하기 싫은 기색이 가득했지만, 파티의 지휘관은 이들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딕시를 선두로 한 이들이 쭈뼛대며 지하 계단으로 들어섰다.

몇 년은 열린 적 없는 게 분명한 창고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뿌연 먼지가 날렸다. 아이네스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콜록댔고, 베스는 뻑뻑한 눈가를 문질러야 했다.

“전구가 있을 텐데….”

가장 먼저 내려간 딕시가 마침내 작은 알전구를 발견했다. 몇 번 지지직거리던 전구가 이내 사방을 밝혔다.

“엄살 부리지 말고 얼른 내려, 우와!”

주저하던 걸음들이 딕시의 탄성에 조금 더 빨라졌다.

“우와.”

아이네스의 입에서도 작은 감탄사가 나왔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시골 호텔 로비를 꾸몄을 붉은 천들과 샹들리에, 그리고 축음기까지. 희미한 노란 전등에 드러난 창고는 딕시의 예상대로 꽤 쓸만한 것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궤짝 안엔 샴페인 잔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먼지가 소복하긴 해도, 닦으면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다들 장식품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을 때, 베스는 축음기 앞에 섰다. 본래의 검은색은 보이지도 않는 축음기를 후우 불자 덩어리진 먼지들이 입김에 밀려났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무렵 만져 본 게 전부인데도 손에는 제법 그때의 기억이 녹아 있었다. 붉은 나팔꽃처럼 열린 파이프에서 곧 선율이 흘러나왔다.

“어? 이 노래.”

아이네스가 알은 척을 했다.

철 지난 노래를 흥얼거리는 허밍이 창고를 채웠다.

“좋았어. 이제 다들 이거 들고 올라가.”

엄한 지휘관에 즐거움은 금세 사라졌지만, 파티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상기되는 건 모두가 같았다.

낑낑대며 짐을 나르는 걸 본 병사 몇이 일을 도왔다. 베스 또한 그 틈에 섞여 궤짝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오던 데베르는 꽤 난감한 얼굴로 두어 걸음 위로 올라가 계단참에 몸을 숨겼다. 본래라면 베스가 가장 바쁠 시간을 골라 후문으로 진즉 나갔어야 했다.

틀어진 계획에 뻐근해지는 어깨를 돌렸다.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정문과 후문 모두 사람들이 득실댔다.

눈썹께를 긁적이던 데베르의 시선이 다시 계단 아래로 향했다. 왔다 갔다 하는 까만 머리통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베스는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 한 채, 채근하는 딕시의 등살에 밀려 짐을 옮기는 중이었다.

데베르는 그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듯이 지켜봤다. 그가 없는 곳에서 웃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못마땅한지 작은 입술을 내밀기도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데베르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가만히 지켜본 베스는 잘 웃었다. 제 친구들이 별말 하지 않아도 쉽게 웃고 즐거워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가볍게 까딱였다.

“예, 대장님.”

냉랭한 기운을 잔뜩 풍기는 대장을 눈치껏 피해 가려던 병사 하나가 안타깝게 걸려들었다.

“재킷 벗어”

“재, 재킷 말입니까.”

주섬주섬 벗어 내민 재킷은 그 흔한 훈장 하나 없이 말단 병사란 뜻의 검은 줄 하나만 그어져 있었다.

데베르는 제 옷을 벗어 건넸다.

“내가 올 때까지 입고 있어. 아무 데나 놔둬도 되고. 아, 군모도 주고.”

말단 병사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누군들 가슴팍에 달린 훈장만 봐도 군대장의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개의치 않는 건 데베르뿐이었다.

남의 군복에 제 몸을 욱여넣다시피 하고, 군모를 깊숙이 눌러썼다. 다시 한번 베스를 살피곤, 그녀가 등을 돌린 틈을 타 잽싸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베스가 고개를 돌렸을 땐, 어딘가 익숙한 뒷모습이 정문을 나서는 게 보였을 뿐이었다. 키가 저만한 남자가 이곳에 데베르 말고 있나 싶었지만, 설마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저었다.

바쁘게 놀리던 손이 멈칫했다.

얼핏 본 뒷모습을 다시 곱씹자, 스치듯이 잿빛 머리카락을 본 것도 같았다. 아무려면. 베스는 다시 잡념을 털어냈다.

제정신이면 다친 곳이 아물 때만이라도 가만히 있겠지.

베스는 벌써 잊고 있었다. 데베르가 그녀의 기준에서 제정신으로 행동한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그 옷은 뭐야. 오는 길에 강도라도 만났어?”

데베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눌러쓴 군모를 벗었다. 가볍게 머리를 턴 후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딨어?”

“오고 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사 안으로 들것 하나가 들어왔다.

거기엔 사람이라 하기엔 넝마나 다를 것 없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뭐, 정확히는 실려 오는 거지만.”

데베르는 대꾸 없이 들것 위에 널브러진 덩치의 턱을 이리저리 돌렸다. 단단한 손이 뺨을 몇 번 치자, 슬쩍 들어 올려지던 눈꺼풀이 이내 팍 감겼다.

“수작 부리지 말고 눈 떠.”

건조한 음성에 결국 덩치는 눈을 찔끔 떴다.

“사, 살려주십시오.”

덩치가 무색하게 파르르 떠는 목소리였다.

“왜 얼굴을 작살 냈어.”

두툼한 발목을 들어 올렸다가 허공에서 놓아버리자, 덩치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줄을 끊어버리지. 보초병 인력이라도 줄이게.”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진담인데.”

데베르는 협탁을 돌아봤다. 즐비하게 쌓인 서류를 넘기는 손길엔 성의라곤 없었다.

“살려 보낼 생각이야.”

종이엔 조약을 빙자한 각서들이 그득했다. 일 년여 간의 전쟁 후, 그것도 코바흐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의 끝이 어떨지는 뻔했다.

데베르는 덩치의 손에 펜을 억지로 쥐었다.

“이, 이게 뭡니까.”

한껏 눌린 턱살을 들어 올리며 덩치가 눈을 끔뻑댔다. 사리 분별도 못 하는 놈이 눈앞의 서류를 알아볼 리가 없었다.

데베르는 덩치의 손을 잘라버릴 듯이 움켜쥔 채 펜을 휘갈겼다.

“데려가.”

짧은 명령에 입구를 지키고 선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덩치의 들것을 들어 올렸다.

“아, 잠시.”

데베르는 잊은 게 떠올랐는지 나가는 병사를 다시 불러세웠다.

“저 자도 의료진에게 치료받나?”

“내가 받게 했어. 일을 정리하기 전까진 죽이지 말라며.”

데베르는 느릿하게 제 볼 안을 혀로 쓸어내렸다. 볼록해졌다가 이내 홀쭉해지는 볼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부터 포로는 철저한 격리야. 의료진도 예외는 없어. 나가봐.”

포로가 사라지고 나자, 데베르는 서류에만 몰두했다. 수십 장의 종이 곳곳에 군대장의 서명을 필요로 하는 공란이 있었다.

모든 전쟁은 삶의 바닥을 기는 진창일 뿐인데도, 끝은 제법 배운 행색을 내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그 우스운 짓조차 데베르만의 특권이었다.

“이젠 이 짓도 마지막이지.”

셀 수 없는 조약들의 마지막 장. 그와 닮은 날카로운 필체의 클리프가의 서명이 그어졌다.

* * *

바쁜 하루였다. 병원의 모든 이들이 근무시간 외에는 딕시의 지시에 따라 창고 용품을 씻고 정리해야 했다.

“다신. 절대. 파티 안 해.”

아이네스가 이를 꽉 깨문 채 내뱉은 한 마디가 모든 걸 말했다.

베스도 지치긴 매한가지였지만,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꽤 괜찮은 보상을 해 주고 있었다. 계단에 앉아 흘러나오는 음에 귀를 기울였다.

때아닌 선율은 병원을 오가는 병사들과 부상병의 마음 또한 들뜨게 했다. 철 지난 노래였지만, 오히려 전쟁 이전의 평화롭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약과 붕대를 챙겨 든 베스는 익숙한 복도를 걸어갔다. 사 층에 도착했을 땐 노랫소리도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싶었다.

노랫소리가 격리실 안에서도 들릴까. 들렸으면 좋겠는데.

제가 준비한 선물도 아닌데, 베스는 붕 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그 마음은 바닥으로 처박혔다.

또 사라졌다.

방 안 어디에도 데베르는 없었다. 설마 하며 넘겼던 아침의 의심에 확신이 서는 순간이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옷까지 바꿔입고 간 걸 보면 작정하고 속인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병원 뒷마당을 걸어오는 데베르가 보였다.

저렇게 말을 안 듣는데 어떻게 군대장을 하는 걸까. 아니, 말을 안 들으니 대장 노릇을 하는 건가.

베스는 머릿속으로 쉴 새 없이 불만을 쏟아내며, 주머니 속에 있던 연고 통을 집어 들었다.

탁, 하고 내리꽂히는 둔탁음에 남자가 위를 올려봤다.

“들켰네.”

말과는 달리 일말의 놀라움조차 없는 얼굴이었다. 숨길 의지 따위 내버렸는지 군모와 부하 병의 재킷도 사라진 채였다.

“추워, 문 닫아.”

데베르는 사 층에서 저를 노려보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멀리서도 발그레한 얼굴이 씩씩거리는 것만은 선명했다.

어느덧 창 밑까지 온 데베르는 벽을 한 손으로 짚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간지러움에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올려다본 곳엔 여전히 베스가 있었다.

데베르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올라가기엔 좀 높다.”

닿기 너무 높은 곳이라도.

“내려와 줘.”

이젠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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