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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31화 (31/206)

31화

문틈으로 총구가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데베르는 주둥이만 들어온 총구를 그대로 천장으로 비틀었다. 목표물을 빗나간 탄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 천장을 우그러뜨렸다.

“살았, 어억!”

외치는 적군의 입을 틀어막은 데베르는 그대로 남자를 끌어당겼다. 좁은 운전석 사이에서 두 덩치가 사납게 맞붙었다.

그 사이 베스 또한 사활을 건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늘어뜨려진 머리를 걷으려 코바흐군이 다가왔을 때, 곧장 주사기를 내질렀다. 마취제가 채워진 주사기 바늘이 푹, 남자의 팔뚝에 꽂혔다.

남자가 당황한 틈을 타 바로 총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완력 차가 있는지라 쉽사리 빼앗기지 않은 총구가 차 안 곳곳을 무질서하게 쏴댔다.

행여 데베르가 맞을세라,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베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죽고 싶어 환장했나!”

남자가 겨눈 총구가 점점 베스를 향해 돌아갔다.

더는 견딜 수 없는 한계점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탕, 하는 발포 소리와 함께 비릿한 액체가 얼굴에 뿌려졌다. 번쩍 눈을 뜨자 허옇게 돌아가는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옆을 돌아보자 코바흐군 총을 쥔 데베르가 제 위로 늘어진 시체를 밀어내는 게 보였다.

그들의 차 뒤에는 아무도 없는 포터 한 대만 있었다.

“나가야 해. 타이어 맞았어.”

먼저 운전석을 나온 데베르가 반대쪽으로 돌아가 베스를 끄집어냈다. 여자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큰 손으로 대충 지우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넥서스 후송 깃대만 보고 달려가. 해 지면 죽는 거야. 그 전에 가야 해. 알겠어?!”

베스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감싼 커다란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네 목숨이나 챙겨.”

팔뚝의 붉은 십자 완장이 거칠게 찢겨나갔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뛰는 거야.”

남자가 단단히 손을 얽어왔다. 서로의 유일한 구원이라도 되는 양, 빈틈없이 손을 맞잡았다.

목표는 오직 한 곳이었다.

옆에서 포탄에 맞은 시체가 날아들건, 전차에 불이 붙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수류탄 충격에 밀려난 코바흐군 한 명이 데베르에게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적군임을 안 남자는 그대로 데베르에게 덤벼들었다.

상황을 판단할 새도 없이 시작된 육탄전이었다.

데베르 위에 올라탄 남자가 체중을 실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윽, 제인스! 가!”

몇 발자국 떨어져 나동그라져 있는 베스의 시야로 떨어진 총이 들어왔다. 갑자기 자신을 성으로 부르는 그에 대한 의문이 생길 틈도 없었다.

혹시나 제 시선이 옮겨가는 것을 보고 타깃을 바꿀까 봐, 데베르는 다가오는 베스를 일부러 보지 않고 있었다.

엉금거리며 기어가 총을 쥐는 베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후들거리는 다리 탓에 기듯이 다가갔다.

살기 어린 등판에 총구를 댔다.

방아쇠를 당기자 제 몸도 함께 들썩였다.

데베르는 늘어진 코바흐군을 몸 위에 얹은 채, 거친 숨을 들썩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저앉은 베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보지 마.”

해는 너무나 빠르게 지고 있었고, 넥서스 후송 차량 깃대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데베르다! 데베르 클리프를 생포하라!”

“제길.”

이번엔 베스가 먼저 손을 잡아끌었지만, 발걸음이 턱 막혔다. 그는 후송 차량과 반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낭떠러지를.

데베르는 비탈진 언덕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랑 같이 생포해!”

가파른 비탈 아래로 우거진 나무와 수풀이 즐비했다. 어느덧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언덕 아래부터 이른 어둠을 몰고 온 게 보였다.

선택의 기로는 하나뿐이다.

“안아.”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베스를 꽉 끌어안은 데베르는 그대로 비탈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정신없이 굴러 내려가는 틈에도 그들을 겨냥하는 총탄 소리가 들려왔다. 옷가지가 바닥에 거칠게 비벼져 찢기는 느낌이 선명했다.

몇 번 튕기듯이 몸이 붕 떴다 아래로 떨어지기를 반복했지만, 데베르가 여자를 제 품에 욱여넣듯 끌어안은 탓에 둘의 몸은 떨어지지 않았다.

베스는 불현듯 생각했다.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이 남자와 함께 죽는 거였구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캄캄해졌다.

* * *

컴컴한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었다. 두들겨 맞은 듯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봤지만, 사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베스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군복이 수풀 더미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곳엔 엉망이 된 데베르가 눈을 감은 채였다.

그의 목에서 약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그러나 팔을 흔들어봐도 미동이 없었다.

피로 축축해진 가슴팍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베스는 제 몸을 더듬었지만, 메고 있던 의료 가방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쁘게 내뱉는 숨을 따라 흰 김이 풀풀 날렸다.

이대로 두면 죽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깨워야 할 텐데. 혹시 총상이라도 입었을까 세게 흔들지도 못하는 베스의 손이 데베르의 몸 위를 방황했다.

“읏….”

기적처럼 들린 신음에 얼른 시선을 맞췄다.

가늘게 떠진 남자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살았네….”

그 한마디가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막힌 감정의 응어리가 풀리듯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서럽게도 히끅거리며 우는 여자를 데베르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모든 게 미지수였다.

전장으로 쫓아와 베스를 찾은 것도. 비탈길로 몸을 내던진 것도.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불확실함을 감수했던 건.

베스 제인스가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생각보다 너무도 성공적인 작전에 싱거운 웃음이 비식 나왔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등줄기가 찢어지듯 아팠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쳤어?”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됐어.”

몇 번 숨을 고르던 데베르는 몸을 일으켰다. 신음을 참으려 꽉 깨문 잇새로 찝찔한 피가 새 나왔다.

“내 주변 인간들은 다 명줄이 짧던데. 오늘은 네 덕에 내가 산 건가.”

당신이 나를 살린 건데, 내가 당신을 살렸다니.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그를 뒤따르며 베스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몇 걸음 떨어진 커다란 바위 밑, 움푹 팬 곳에 데베르는 몸을 반쯤 기댔다. 왼손으로 서툴게 제복 재킷을 잡아당기는 걸 베스가 얼른 도왔다.

데베르는 벗은 재킷을 여자의 어깨 위로 둘렀다.

“그 망할 옷은, 윽.”

베스가 얼른 등을 살폈다. 셔츠를 벗길 수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장터에서 총에 맞은 곳이 다시 찢어진 게 분명했다.

눈물로 얼룩진 까만 눈이 불안하게 그를 쳐다봤다.

“이렇게 걱정할 거면서 왜 내버리고 간 거야.”

데베르는 차마 ‘나를’이란 말은 덧붙이지 못했다.

그제야 베스는 남자의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열쇠가 보였다. 항상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낡고 얼룩진 열쇠.

“됐어. 울라고 하는 소리 아니야.”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허연 김이 풀풀 날렸다.

“더럽게 말 안 듣는 건 알고 있었어.”

남자가 제 배를 툭툭 쳤다. 손이 가리킨 곳엔 얼룩진 셔츠만이 있었다. 그 뜻 모를 행동에 베스의 눈이 바빠졌다.

바로 알아듣지 못하자, 대번에 서늘한 기색을 띠는 남자의 눈에 이번엔 베스의 입술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 나왔다.

저 서늘한 눈빛마저 안심이 된다 하면 정말 제가 미친 거겠지.

“올라와.”

주위엔 걸터앉을 등걸도, 앉을만한 바위도 없는데 어디를 올라오라는 건지.

데베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여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데베르의 몸 위로 올라온 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등허리에 감겨오는 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난리 떨고 얼어 죽기 싫으면 얼른 안아. 나도 추워.”

‘춥다’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베스가 얼른 몸을 숙여 남자를 껴안았다. 부끄러움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보다 이 남자가 자신 때문에 어떻게 될까, 그 두려움이 더 컸다.

이미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몸이었지만, 바짝 껴안으면 혼자일 때보단 나았다.

“자면 죽는 거야.”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게 울렸다.

허튼 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장터로 가는 차 안에서 시체 운운하더니 그날 보란 듯이 총에 맞았으니까.

베스는 조금 더 빈틈없이 몸을 맞댔다.

“추운 데 있으면 졸려. 계속 말해야 해.”

데베르는 손을 내밀었다.

“아무거나 말해.”

그의 손보다 한참은 작은 손이 머뭇거리며 올라왔다.

베스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무거운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왜 성으로 불렀어요]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봤으니까. 이제 적군은 너도 찾을 거야. 여자들은 결혼하면 성이 바뀌잖아. 이름보단 나을 거라 생각했어.”

가슴팍의 여자를 슬쩍 내려봤다.

“하고 싶은 성 있어?”

장난스러운 물음이었지만,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축했다.

“클리프는 어때. 베스 클리프.”

베스는 그저 감은 팔에 더 힘을 줬다. 낮게 웃는 소리가 그의 가슴팍을 타고 귓가에 닿았다.

짧은 웃음 뒤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왔다.

“네가 죽인 게 아니야.”

침묵 속, 베스의 상념을 읽은 데베르가 대신 말을 꺼냈다.

“후회해도 바뀌는 건 없어. 오늘 넌 코바흐군을 죽인 게 아니라, 나를 살린 거야. 그것만 생각해.”

후회. 베스는 가만히 그 단어를 곱씹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 순간,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이 남자는 눈앞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니까. 그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다른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 대가가 해결될 수 없는 죄책감의 무게라 할지라도.

“자면 안 돼.”

부드럽게 재촉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듣고 있으면 손가락으로 톡톡 치기라도 해.”

매섭게 굴다가도, 지금처럼 달래듯이 물러나 주는 게 좋았다.

베스는 지겹도록 끄덕인 고개 대신,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두어 번 쳤다.

“그래, 그렇게.”

긴 한숨이 너른 가슴 속을 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규칙적이던 심장 고동 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네가 그렇게 될 뻔했을 때.”

잠시 말을 멈춘 데베르는 품 안의 여자를 고쳐 안았다. 오르내리는 숨결이 손끝으로 가감 없이 전해졌다.

“널 모른 척한 게 아니야. 살리려고 애썼어.”

‘그 여자를 쏴.’

무던히도 그를 원망했던 날.

“한 번도 너를 내버려 둔 적 없어.”

이제는 믿는다. 이 남자의 말을.

“듣고 있는 거야?”

금방 날카로워지는 말투에 베스는 소리 없이 웃었다. 톡톡, 치는 가벼운 손가락에 들썩이던 그의 가슴이 다시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클리프는 정말 싫어?”

또다시 손가락을 톡톡, 쳤다.

“젠장. 빌어먹을 성인 줄은 알고 있어.”

베스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저 말속에 숨겨진 진심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아서.

어깨에 걸쳐진 재킷 안주머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동그란 통이 그의 마음을 대신 전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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