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30화 (30/206)

30화

『어젯밤은 이상했다.

내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는 너도.

네 얼굴에 닿아서인지 유난히 희던 달빛도.

내 눈을 가린 손에서 느껴지던 미지근한 온기도.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유독 그 모든 게 평소와 다르다 느꼈던 것은 닥쳐올 불행에 대한 예고였을까.

베스, 나는 불행에 익숙한 인간이야.

그러니 내게 익숙해지지 마.

내 익숙한 불행이 되지 말아 줘. 제발.』

* * *

눈을 떴을 때, 의자는 비어 있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시선은 당연히 없을 줄 알면서도, 베스의 흔적을 찾았다.

눈을 가리던 손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로 잠들 줄은 몰랐다.

그저 그 여자의 향이, 그 손의 온기가 잠깐은 그래도 된다 말하는 것 같아서. 꼴사납지만 정말 그렇게 느껴져서 눈을 감은 거였다.

약을 먹지 않고 잠든 게 언제였는지.

엎드려진 몸을 일으키는데, 저도 모르게 손안에 잡혀있던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과 쇠붙이가 부딪히는 마찰음이, 불길을 점치는 점쟁이의 산통 소리처럼 섬뜩하게 울렸다.

거의 다 쓴 연고 통과 열쇠가 걸린 목걸이.

그 순간, 놓친 퍼즐 조각을 주운 듯 지나간 기억의 앞뒤가 맞춰졌다.

어젯밤 유난히 표정이 어둡던 베스, 약혼자를 봐서 들떠 있을 때는 언제고 죽상을 하고 있던 게일, 답지 않게 입을 다물던 아더, 이상할 정도로 군대장을 찾지 않던 바텀까지.

“젠장.”

급하게 옷가지로 손을 뻗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아물지 못한 어깨가 쑤셔댔지만,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데베르의 손이 순간 멈췄다.

전장으로 간 게 아니라, 그저 제집으로 돌아간 거라면.

베스와 장터를 가던 날, 창문 밑에서 여자를 기다리며 스스로 물었던 질문이다.

저 여자가 작정하고 숨으면 찾을 수 있을까.

끼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서 있는 사람은 그의 기대와 달리 딕시였다.

딕시 또한 제 예상과 다른 인물의 등장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말없이 짐을 챙기는 아이네스와 베스를 보고, 비밀 전투임은 얼추 감을 잡았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사 층을 부탁하진 않았지만, 친구를 대신해 이제는 비었을 사 층을 정리하려 오지랖을 부린 거였다.

하지만 당연히 비어 있어야 할 그곳에, 당연히 없어야 할 인물이 있다니.

저 사람이 여기 있으면 전장에는 누가 있는 거야?

딕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작님. 여기서……. 뭐 하세요?”

* * *

다듬어지지 않은 흙길을 달리는 전투 차량이 덜덜 떨렸다. 짐짝처럼 수송 차량 뒤편에 욱여넣어진 병사들과 의료진 또한 함께 덜덜거렸다.

트인 사방으로 새벽 칼바람과 흙먼지가 불어댔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추위 때문인지, 거친 운전 때문인지, 아니면 극한의 공포 때문인지. 모두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떨어대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네스는 차에 타서도 계속해서 게일이 있나 두리번거렸지만, 공군 대령인 그가 함께 있을 리 없었다.

베스는 아이네스의 어깨를 껴안았다. 제 작은 품이 위로라도 됐으면 해서.

아직 집결지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곳곳에서 토악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이네스의 기도 같은 중얼거림이 구역질 소리 틈에 섞여들었다. 어제의 담담함이 우스울 만큼, 베스 또한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낼 것만 같았다.

어젯밤, 한참을 데베르의 눈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몰랐다. 그가 깊은 잠을 잤으면 하기도 했고, 긴장한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하고 온 전장에서, 가끔 다정한 빛을 띠는 그 눈을 보면 속절없이 나를 살려달라 애원하게 될까 봐 겁나는 것도 있었다.

야전병원 명단에서 빼달라고. 아직은 더 살고 싶다고. 나를 좀 집으로 보내 달라고. 당신이면 그럴 수 있지 않으냐고.

사실 그의 눈을 가린 게 아니라, 약한 소리를 할 제 입을 막은 거나 다름없다.

눈을 가리면, 제 말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

손안에서 깜빡이던 속눈썹의 느낌이 지금도 선연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잿빛 속눈썹.

동이 트기 직전, 여전히 잠들어 있는 데베르를 보고서야, 그는 이번 전투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히 함께 갈 것으로 생각했기에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았었는데. 쓰다만 몇 개의 쪽지들은 아직 제 주머니 속에 있었다.

어떤 말을 쓰든,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답게 말하기도, 절절하게 굴기도, 딱딱하게 대하기도 이상해서.

설명되지 않는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관계와 같은 말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알고 싶었다.

잠에서 깨면 내가 없는 것에 놀랄까. 아니면 이제야 속 편히 약품 창고를 오갈 수 있어 홀가분할까.

내뱉는 숨에 허연 연기가 펄펄 피어오를 만큼 완연한 겨울이 닥쳐왔다.

사라진 나를 조금은 신경 쓸까.

“주목하십시오.”

병사 하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함께 있는 병사들이 여러분을 엄호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신변은 여러분이 먼저 지키셔야 합니다. 다들 총기 받으셨죠.”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다. 베스는 조금은 어색한 손길로 병사의 예시를 따라 했다.

‘팔꿈치를 조금 굽혀. 반동 못 이겨.’

기억 속 데베르의 목소리를 더듬어 팔꿈치를 조금 당겼다.

‘이제 쏴.’

희미한 웃음이 얼굴을 스쳤다. 그땐, 정말 미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이젠 그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으면서 기억할 줄이야.

나는 당신의 말을 기억하는데, 당신은 내 무엇을 기억해 줄까. 목소리가 없어 아무것도 기억날 게 없을까.

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의 상념은 사치다.

저 멀리서, 개미 떼처럼 모여든 군사들이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엎드려!!”

옆구리에서 피를 쏟는 병사의 붕대를 감던 베스는 얼른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하는 땅이 여실히 느껴졌다.

아무리 세게 귀를 틀어막아도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굉음은 쉬지 않고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 정도는 치료할 깜냥도 안 된다고!!”

누군가 사납게 베스를 일으켜 세웠다.

곧 눈앞에 나타난 건 잘려나간 제 한쪽 팔을 들고 있는 병사였다. 너무 놀라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얼이 빠진 남자가 떨어진 팔을 내밀었다.

“제, 제 팔이에요. 부, 붙여주세요.”

터지는 폭격 소리 사이로 웅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베스는 얼른 의료 가방을 뒤졌다. 통증을 줄여줄 주사기가 어딘가에 분명 있을 텐데, 아무리 뒤져대도 보이지 않았다.

“폭격기다!! 숨어!!”

얼른 참호 구덩이 벽에 몸을 구겨 넣었다.

코바흐군의 전투기가 기관포를 쏴대며 넥서스 진영을 지나갔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한 치 앞도 안 보일 만큼 연기가 눈앞을 메우더니, 방금까지 베스에게 팔을 붙여달라 얘기하던 병사가 사라졌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심장을 터뜨릴 듯이 터져대는 자주포 소리에 속이 메슥거렸다.

“베스! 여기 있으면 안 돼! 일어나, 얼른!”

헛구역질하는 베스의 손을 누가 잡아끌었다. 어디서 다친 건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네스가 베스를 재촉했다.

손을 맞잡은 채 뛰어가는 둘을 향해 쉬지 않고 총알이 날아들었다.

“간호사! 저기 군 깃발 보이는 곳으로!!”

누군지도 모를 넥서스 군의 명령에, 앞뒤 재지 못하고 뛰어갔다.

시체들이 발에 밟혔지만, 공포에 잠식된 그들은 자신들이 뭘 밟으며 달려가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헉! 헉,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전차 뒤에 기대 숨을 헐떡이는 사내에게 모르핀을 주사하고, 급한 대로 소독약을 환부에 부어댔다.

주위를 둘러보니 병원에서 함께 온 몇 명이 보였다.

정신 차려야 해.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사방에서 의료진을 불러대는 아우성들이 들렸다. 간절하게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소리가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베스는 세차게 제 뺨을 쳤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참호 구덩이 안으로 전염병 걸린 가축을 매장하듯 부상병들이 떨어졌다. 제 순서가 오는 몇 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어나는 이들 또한 넘쳐났다.

어린 병사 한 명이 일각 사이에 부상병에서 시체로 전락한 이들의 몸뚱이를 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제기랄! 이 미친 새끼들아! 작작 하라, 억!”

쏟아지는 폭격에 분을 참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저주를 퍼붓던 병사의 몸이 그대로 거꾸러졌다. 베스는 엎드린 제 위로 느껴지는 무게감에 기함하며 시체를 비집고 뛰쳐나왔다.

“그놈은 죽을 거라고!”

목이 찔린 병사를 지혈 중인 아이네스를 중사 하나가 끌어냈다.

“죽을 놈들 말고, 살 만한 놈을 살리라고!”

잔인한 선고다. 산 사람을 시체나 다름없이 취급하는. 하지만 그 모든 게 통용되는 게 전장이다.

베스는 밀려오는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벌써 가방 속의 붕대며 거즈 따위는 동이 나가고 있었다.

안돼. 아직 할 일이 있어.

베스의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어딘가를 뛰어가기도 하고, 장갑차 또한 몇 번 탔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렸을 땐, 죽음이 목전까지 온 지독한 현실 앞이었다.

“젠장! 후퇴! 후퇴!”

익숙하지 않은 군복이 보였다. 분명 야전병원 인원은 군대의 후방에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 선봉까지 온 걸까.

후들대는 다리는 이제 잘 뛰어지지도 않았다. 갓 태어난 망아지 마냥 몇 걸음 뛰다 넘어지고, 또 몇 걸음 떼다 넘어지는 베스의 손을 잡아 줄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막상 죽음이 코앞이라 생각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고통 없이 바로 죽었으면.

극한의 감정을 넘어가니 오히려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눈앞에서 터져대는 수류탄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혼미한 베스의 앞으로 뿌연 연기가 가득 찼다. 연막탄이구나.

“너 미쳤어!!”

노기 어린 음성이 먹먹한 귓가 사이로 희미하게 들렸다.

우악스러운 힘이 베스를 어딘가로 집어넣었다. 규칙적으로 덜덜대는 바닥에, 베스는 자신이 올라탄 게 군용차임을 알아챘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연기 사이로, 총알이 차체를 치는 적나라한 소음이 쟁쟁했다. 어딘가에서 ‘데베르’라는 이름이 들린 것도 같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이젠 귓가에 생생히 들려왔다.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베스는 제 옆에 있는 데베르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벌써 죽어서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다.

“총 꺼내!”

데베르는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소리를 질렀다.

“총 꺼내라고!”

베스는 그제야 급하게 가방 속을 뒤졌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배운 대로 해. 할 수 있어. 탄창 확인하고, 슬라이드하고, 발사.”

양 군이 개떼처럼 섞인 난리 통을 지나면서 데베르가 빠르게 설명했다. 급하게 꺾어대는 핸들이 지금 그들의 상황이 여의찮음을 말해줬다.

“윽!”

뒤에서 사정없이 받아오는 적군의 포터에 둘의 몸이 급하게 앞으로 쏠렸다.

“죽은 척해.”

데베르가 낮게 일렀다.

베스는 시키는 대로 처박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가방 속의 주사기를 쥐었다.

“죽은 거 같은데?”

“간호사도 있어.”

“간호사는 살았으면 데려가.”

벌컥, 코바흐군 하나가 운전석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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