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데베르에, 베스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가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덜 아문 목의 상처가 아릿했다.
잔뜩 찌푸려진 여자의 얼굴을 보던 데베르는 가볍게 혀를 찼다. 굽혔던 무릎을 일으켜 베드에 걸터앉자, 맞춰졌던 시선이 다시 어긋났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무방비한 말간 눈이 데베르에게 닿았다.
“하도 안 일어나길래, 여기서 같이 자려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멍하니 깜빡이던 여자의 눈이 순식간에 새초롬하게 변했다. 입술을 꼭 다문 채, 연고 뚜껑을 돌리는 손이 제법 제가 화가 났음을 알렸다.
데베르는 입꼬리가 간질거렸다. 벌레라도 붙은 마냥.
“네가 자는 얼굴 본 적 있어?”
생뚱맞은 소리에 부지런히 움직이던 베스의 손이 멈췄다. 남자는 어딘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체 무엇이 그를 즐겁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베스는 쓸데없는 물음을 무시한 채, 옷을 벗으라 손짓했다.
단추를 끄른 남자의 등은 처음 본 날과 다를 바 없었다. 총상이나 폭격 따위로는 이런 자국이 남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안다. 적진에 납치되어 채찍 고문이라도 당했다면 모를까.
데베르 클리프를 향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그중 그가 포로가 됐었단 소문은 그 어디서도 듣지 못했다. 그의 꼬리를 따라다니는 건 무성한 승리의 소식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좀 나은 거 같아?”
남자가 뒤를 돌았다.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 눈에, 베스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쭙잖은 연민이나 동질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 남자와 어느 한구석이 닮았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 때문일까. 감히 클리프가의 공작과 제 삶이 비교될 순 없겠지만, 끔찍한 과거를 지우고 싶어 하는 건 사람이라면 다 똑같은 거니까.
결국 흉터가 여전함에 실망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게 베스가 거짓말을 멈출 수 없는 이유였다.
데베르는 제 날카로운 송곳니를 혀로 툭툭 건드렸다. 입질을 시작하는 짐승 새끼처럼 입안이 간질대 어쩔 수 없었다. 이 여자는 딱 저 같은 착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어쩔 줄을 모른다. 손안에 작은 새끼 새를 올려놓고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약을 다 발랐는지, 여자가 어제처럼 작은 약 봉투를 건넸다.
“…….”
이미 베스 몰래 훔친 약병은 아더를 통해 받았기에, 밤마다 남몰래 안정제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소리를 할 필요가 있을까.
“고마워. 덕분에 오늘 밤도 무사하겠네.”
간호사를 하며 질리도록 들은 고맙다는 말인데. 데베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베스는 가슴께 어딘가가 울렁거렸다. 그저 인사말일 뿐인데도, 마음이 들뜨는…. 이래서 이 남자도 그토록 제 입에서 고맙다는 소릴 듣고 싶어 했나 싶을 정도로.
시계는 어느덧 한 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베스는 얼른 짐을 챙겨 들었다. 밤에 만나는 데베르 공작은 항상 조금 더 낯설었고, 이 기묘한 낯섦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이상했다.
함께 문밖을 나서는 기척에 베스가 휙, 뒤를 돌았다. 저 몸으로 또 어디를 나가려고. 베스의 손이 남자를 살짝 밀었다. 그 약한 손길에도 데베르는 기꺼이 몇 걸음 물러나 줬다.
“이 밤에 혼자 가겠다고.”
베스의 앞치마 주머니 속, 튀어나온 총부리가 보였다. 데베르는 여자가 반항할 틈도 없이 잽싸게 총을 꺼내 들었다.
“나 같은 새끼 만나면 어쩌려고.”
예전, 창고 안에서 했던 말.
신경질적으로 내뱉던 그때와 달리, 나른한 말투였다.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남자인데. 체념한 베스는 그저 걸음을 재촉했다.
딕시가 ‘죽은 떡갈나무’ 같다고 했던 코트를 가져올 때까지, 데베르는 문가에 기대 기다렸다. 단추를 채우며 오던 베스의 눈이, 눈앞 남자의 행색을 훑었다. 저렇게 입고 춥진 않을까 걱정이 스쳤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어디까지 그에게 간섭할 생각인지.
정작 남자는 추위보단 딴 데 신경이 가 있는 것처럼 보여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를 믿나 봐?”
오늘따라 던져대는 엉뚱한 물음이 그러했다.
“얼마 전까진 나만 보면 내빼기 바빴잖아.”
그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벙긋거리던 베스의 입술이 이내 가만히 다물렸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그를 마주칠 때마다 벌벌 떨었으니까.
언제부터 함께 있을 때 오히려 안심하게 됐을까.
도착한 숙소 문 앞에서도, 베스는 괜한 어색함에 허공 어딘가만 보고 있었다. 이러면 적당히 돌아갈 줄 알았기에 부러 시간을 끌어 본 건데도 남자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기어코 눈이 마주치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 있었으니까.
결국, 베스는 데베르와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한 곳만 보고 있었는지, 남자의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다.
“할 말 있어?”
목소리엔 희미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당연하단 듯 내민 손바닥에, 베스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낮에는 내가 오든 가든 신경도 안 썼으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 모습에 베스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 늘 혼자만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잘 자.”
이어지는 밤 인사에 베스는 잠시 숨을 멈췄다.
문을 닫고도 이 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가만히 문고리를 잡은 채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 때문일까. 얇은 문 너머로, 돌아가야 할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 * *
“베스.”
닥터 바든이 소곤거렸다.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키는 게 병원장실로 오란 뜻이었다.
바든은 병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똑같은 손짓을 했다. 모두 야전병원 차출 인원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올라갔던 어제와 달리, 이유를 아는 오늘은 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마워요. 다들 바쁠 텐데.”
몰리 부인이 무리를 맞이했다.
“게일….”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게일을 발견한 아이네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게일은 아이네스가 있음을 알고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오늘 부른 이유는….”
부인의 목소리 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모두가 그 뒷말을 예상했지만, 감히 먼저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런 부인의 말을 받은 건 아더였다.
“전투 일자가 앞당겨졌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야전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침묵이 공간을 채웠다.
베스는 오늘에 오자, 되려 담담한 기분이었다. 꼭 이때를 기다렸나 싶을 정도로.
“여러분은 전선에서 군대와 함께 이동하게 되실 겁니다. 야전병원은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합니다. 여러분 자체가 병원이지, 따로 막사 따위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마 처음으로 진짜 전장을 보시는 분도 계시겠죠.”
아더의 눈이 베스를 향했다.
“여러분을 엄호하는 병사들이 붙겠지만, 장담할 수 없습니다. 총기 기본 교육은 받으셨겠지만, 오늘 다시 한번 교육할 테니 꼭 숙지해주십시오.”
이어 게일이 아더의 말에 맞춰, 총기의 장전과 발사, 탄창 교체 예시를 보였다.
게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들지 않았다. 아이네스의 눈은 그를 떠날 줄 몰랐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더 외에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저는… 여러분이 반드시 살아남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사기를 전혀 북돋아 주지 못하는 마지막 말이 끝나고, 무리가 해산할 때까지도 그 이상스러운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시간은 잔인하게도 흘러갔다.
목숨이 달린 여정을 앞둔 이들에게조차 예외는 없었다.
이르게 지는 겨울 해는, 눈치 없이 진득한 노을빛을 병동 깊숙이 집어넣었다.
비품실에서 다가올 새벽을 위한 의료 가방을 싸던 베스와 아이네스 또한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만약에, 베스.”
아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석양빛을 받은 아이네스의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혹시 내가 죽으면.”
베스는 고개를 숙였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아이네스가 그런 베스의 손을 급하게 잡았다.
“베스, 만약 내가 죽은 걸 발견하게 되면, 이 목걸이를 빼서 꼭 게일에게 전해줘.”
아이네스의 목엔 평소에 없던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동그란 펜던트를 열자, 아이네스의 초상화가 나왔다.
‘예쁘잖아. 남겨놔.’
데베르와 함께 장터에 나갔을 때, 그가 샀던 것 같은 목걸이였다.
아이네스가 엷게 웃었다.
“몰랐는데, 이런 게 요즘 웨인의 연인들 사이에서 유행이래. 웃기지? 게일은 그런 건 하나도 모르는데.”
울지 않으려 힘준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해 줄 거지?”
베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 걱정 많은 거 알잖아. 괜히 한 번 부탁한 거야.”
밝은 척 너스레를 떨어봐도, 한 번 가라앉은 마음은 침잠하기만 했다.
석양은 너무도 빨리 어둠을 몰고 왔다.
아직 밤을 맞을 준비가 안 된 이들의 마음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야속한 모습이었다.
* * *
“무슨 일이야.”
유난히 창백한 안색에 데베르가 물었지만, 베스는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잽싸게 제 할 일만 마치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고.”
데베르는 돌아서는 베스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베스는 어쩔 수 없이 눈앞의 남자를 마주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당신 또한 내일 새벽 전투에 나갈 거면서, 무슨 일이냐니. 베스는 데베르의 물음이 이상하기만 했다.
“피곤해?”
그래. 어쩌면 이 남자는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평생을 밥 먹듯이 전투를 겪고, 전쟁을 치렀으니까. 내일 또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 중 하나라 여기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평온한 걸까.
“오늘 밤은 약 안 먹으려고.”
데베르는 습관 같은 거짓말을 매끄럽게 던졌다. 무슨 일인지 잔뜩 어두운 여자의 얼굴이 웃는 걸 보고 싶었다. 아니, 웃진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밝은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약을 먹지 않겠다는 말에 베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데베르는 그 작은 변화가 꽤 기꺼웠다.
“눈치챘겠지만, 난 안정제 중독이야.”
또다시 입안이 간질거렸다. 송곳니를 꾹꾹 눌러대던 혀끝에서 기어코 찝찔한 쇠 맛이 났다.
“약 없이 잠드는 밤은 꽤 두렵거든.”
거짓 속에 섞인 적당한 진실은 내뱉기가 훨씬 껄끄러웠다.
“내가 잠들 때까지 가지 마. 전담 간호사가 환자를 버려둘 순 없잖아.”
또 그를 노려보거나, 한숨을 쉴 줄 알았던 여자의 표정이 의외로 덤덤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가로 가 불을 끄자, 커튼 없는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여자의 얼굴을 비췄다.
엎드린 데베르의 곁으로 베스가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작고 부드러운 손이 그의 눈가에 닿았다. 가려진 시야를 대신해 익숙한 향이 풍겨왔다.
꼭 자신이 여기 있다고 안심시키는 것처럼.
버려두고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처럼.
눈을 감길 망설이던 데베르도, 결국 그 향에 취한 듯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