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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28화 (28/206)

28화

인적이 없는 병원 복도 어귀에서 결국, 아더는 주저앉았다.

이게 최선이야. 최선이야.

쉼 없이 제게 되풀이했다. 마른세수를 하는 손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꼴사나웠다. 이건 두려움일까, 죄책감일까. 아님, 모두일까.

나가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사라졌다.

“제발….”

누구에게 애원하는지, 저조차도 모를 탄식이 새 나왔다. 벽을 짚고 일어섰다. 가야 한다, 잠시라도 이곳을 벗어나려면.

비틀비틀 병원의 정문으로 향하던 몸이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반대편, 후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아.”

하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던 두 사람 중 한 명을 만날 줄이야.

확실히 눈이 마주쳤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를 붙잡은 건, 베스의 미약한 손길이었다.

아더의 눈이 천천히 제 팔꿈치께로 내려갔다. 작은 손이 옷깃을 쥐고 있었다. 보지 못했노라 거짓으로 속이고 지나쳐도 될 법한 연약한 손길.

하지만 그 거짓말만큼은 할 수 없었다. 잡힌 게 옷깃이 아니라, 제 심장 한 귀퉁이를 붙잡힌 것만 같았으니까.

내리깐 시선의 끝으로 작은 반창고가 내밀어졌다. 베스는 제 손가락 근처를 콕콕 가리켰다.

“괜찮은데….”

반창고를 붙이기에도 민망할 만큼 작은 상처였다. 역겨운 모습만 들키게 한 작은 흔적일 뿐인데.

베스는 아더가 반창고를 받아들자, 곧 병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최선이야. 이게 최선이야.”

나직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난 황제의 눈이니까. 어쩔 수 없이 황족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책임을 져야지. 이건 넥서스를 위한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단 한 번, 데베르를 전투에서 제외하는 것뿐이야. 이미 다쳤으니까.

그렇다면 베스는.

“젠장.”

데베르의 바람이니까.

바람에 흔들릴 수많은 것들이 있다면, 그 바람을 없애는 게 내 몫이니까. 고작 저 여자 하나 사라지는 게 무슨 대수겠어.

막사로 가는 숲길, 아무도 아더를 보지 못할 그곳에서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데베르가 가진 걸 탐내는 건 아니고?

“못난 새끼. 덜떨어진 새끼.”

제 안에 떠오른 물음 하나. 고작 그 물음 하나 때문에.

간절한 기도라도 하듯 무릎을 꿇은 아더의 몸이 둥글게 말렸다. 넥서스의 황자이자, 사령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약한 모습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주 시리고, 차가운 바람이었다.

* * *

“편지 왔어요. 편지요.”

오랜만에 도착한 우편에, 딕시는 병원이 떠나가라 외쳐댔다. 누워서 낑낑거리던 병사들도 편지란 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이곳에 도착하는 편지 한 장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이반 병장, 부인이 보내셨네요. 오, 메이든 이병, 아버지가 보내셨어요.”

언제 그 많은 부상병 이름을 다 외운 것인지, 딕시는 집배원을 자처했다.

“아이네스.”

뜻밖에 불린 제 이름에, 아이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니셔. 약혼자 왔다고 이젠 편지엔 관심도 없구나? 내가 웨인에 가면 부인께 모두 일러야지.”

간만에 활기찬 기운이 도는 병동에서, 유일하게 베스만이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벌써 편지뭉치가 반이나 사라졌지만 베스의 이름은 아직이었다.

딕시의 손에서 마지막 편지 한 장까지 주인을 찾아가고 나서야, 베스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베스, 편지가 아직 여기까진 도착하지 않았나 봐. 요즘 보급로가 자주 막히잖아.”

다들 베스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를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편지가 오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다면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베스는 위로의 소리를 뒤로하고, 아무도 없는 약제실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잔뜩 쿵쿵대던 심장도 조금씩 잠잠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차분히 마음을 다독였다.

아까 전 격리실을 갔을 때, 데베르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협탁 위엔 술병 대신, 어지럽게 펼쳐진 지도와 뭔가를 잔뜩 휘갈겨 쓴 종이들이 가득했다. 마지막 전투가 코앞이라는 소문이 진실이긴 한 모양이었다.

또 무슨 트집을 잡진 않을까 걱정한 마음과 달리, 남자는 시답잖은 놀림 하나 없이 시키는 대로 약을 먹고, 드레싱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줄곧 서류 더미를 향해 있었다. 베스가 짐을 챙겨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스. 아이네스. 닥터 바든. 지젤.”

손을 딱딱 부딪쳐 들뜬 분위기를 주목시킨 부인은, 몇 명의 이름을 더 연달아 불렀다.

“병원장실로 오세요.”

영문도 모른 채 계단을 오르는 얼굴들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병원장실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부인은 차분한 표정으로 모인 인원을 둘러봤다.

“야전병원 차출 명단입니다.”

누군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훌륭한 인재들로 구성됐으니, 여러분은 자부심을 느껴도 좋아요.”

부인은 초조함을 감추려 등 뒤로 손을 숨겼다. 군 병원의 수장이 움츠러든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약한 모습은 이들의 공포를 가중할 뿐이니까.

“야전병원을 이전에 경험한 이도 있고, 처음인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베스는 살며시 아이네스의 손끝을 잡았다. 아이네스는 잔뜩 힘을 주어 그 손을 맞잡아왔다.

“어떤 곳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죠. 조금 전까지 붙어 있던 팔이 날아들고, 아침에 본 사람을 저녁에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에요.”

부인은 베스를 바라봤다.

“특히, 이번 작전은 극비리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본인이 야전병원 차출 인력이란 걸 밝혀선 안 됩니다. 전투가 있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은 그날까지 평소처럼 본인의 자리를 지켜주세요. 이상. 해산.”

부인은 먼저 등을 돌렸다. 그녀를 신뢰하는 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려왔다.

베스는 훌륭한 간호사다. 그건 웨인 간호학교 때부터 자명한 사실이었다. 전방 병원으로 베스가 오고 나서는, 마음 약한 아이가 강해졌으면 해서 더 모질게 군 적도 많았다. 언젠가 야전병원으로 갈 수도 있단 생각 또한 종종 했었다.

하지만, 정작 아더의 입에서 ‘베스’란 이름이 나왔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소리 하나 지를 수 없는데. 대체 어쩌자고, 하필 베스를.

“폐하께선 무슨 생각이신지.”

데베르가 없는 전투. 심지어 그가 알지 못하는 전투라니.

적막한 방 안, 부인의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 * *

살며시 발을 들어, 격리실을 살피던 베스가 불현듯 문을 벌컥 열었다.

데베르가 없었다. 한눈에 보이는 격리실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 층에 격리돼 있어야 할 사람이 어디로 사라진단 말인가.

말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창문까지 열어 밑을 내다볼 정도로, 베스는 지금 황당했다. 밤마다 오라 할 때는 언제고. 시계는 벌써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의자에 기대앉자, 낮보다 더 어질러진 협탁이 눈에 들어왔다.

전투. 야전병원. 낯설면서도 익숙한 단어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언제나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불안한 마음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맞잡은 아이네스의 손을 통해 전해진 떨림에서, 야전병원이 얼마나 힘겨운 곳인지가 느껴졌으니까.

만약 그곳에서 죽는다면.

주머니 속에서 연고와 함께 차가운 총구가 만져졌다. 그 차가운 촉감은, 벌써 아주 먼 기억이 된 것 같은 코바흐 첩자와의 난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땐 그렇게 살고 싶어 했으면서.

스스로 사선으로 걸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전방을 선택한 순간부터 마음먹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먹게 한 이유가 적힌 사망금 증서는 지금 그녀가 기다리는 남자가 가지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지만, 남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딜 간 걸까. 피로가 몰려온 눈이 점점 감겨왔다.

딱 자정까지만 기다리자.

희미한 다짐이 잠결을 타고 흩어졌다.

데베르가 격리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협탁에 엎드려 잠든 베스였다. 시계는 자정을 넘긴 뒤였다.

데베르는 부상병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가 사 층에 있다는 게 비밀이지, 군대장의 존재 자체가 비밀은 아니지 않은가. 군대장이 어디를 돌아다니건 이상할 게 없었다.

애초에 그가 오른손잡인지 왼손잡인지 따위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게 막사를 돌아다니다 오는 길이었다.

초저녁부터 이어진 참모 회의는 자정이 가까워져 올 때쯤 끝났다. 그나마도 사실은 그가 임의로 끊은 것이었지만.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따지는 여자니, 밤마다 와서 약을 발라 달라는 약속을 지킬 게 분명했다. 어쩌면 벌써 도착해 자리에 없는 그를 찾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자정 전에는 도착할 생각으로 꽤 먼 거리를 뛰어왔더니, 오른쪽 어깨와 날갯죽지가 욱신댔다.

올라오는 몸의 열기를 추스르려 창문을 열던 데베르는 다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저 낡은 간호복은 사시사철 똑같은 건지, 겨울이 왔는데도 옷감이 두꺼워질 기미가 안 보였다.

제복 재킷을 벗고, 편하게 셔츠 단추 몇 개를 풀 때까지도 여자는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군대만큼이나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곳이 군 병원이란 것을 잘 알았다.

데베르의 눈이 작전지 위에 엎드린 베스에게로 다시 향했다. 여자는 고개를 베드 쪽으로 돌린 채였다. 베드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쭈그려 앉자, 얼추 시선이 맞았다.

흰 얼굴과 대비되는 새카만 머리카락 몇 가닥이 여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데베르의 손이 그 머리칼을 향했다. 닿는 느낌도 안 날 만큼 가벼운 게 여자를 닮아 있었다.

찡그리지도, 겁먹지도, 화가 나 있지도 않은 베스 제인스.

더는 닿을 핑계를 잃은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제 불순한 마음을 알아챈 걸까.

여자의 감긴 눈꺼풀이 떨리더니, 이내 그 칠흑 같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봤다.

무엇을 묻더라도 진실만을 답해 줄 것 같은 그 눈에,

“잘 잤어?”

참지 못하고 숨겨둔 마음을 꺼내는 건.

너무나 궁금해서.

나의 밤은 지옥인데, 너의 밤은 안녕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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