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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27화 (27/206)

27화

“대장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태 결혼 얘기를 열을 올렸으면서. 게일은 되려 얼빠지게 되물었다.

군대장과 사령관의 사이만큼은 아닐지언정, 부하로서 그래도 꽤 오래 데베르를 봐 왔었다. 게일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그러고 보니, 군대장의 약간 풀어진 모습이 부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생각해 놓은 사람이라도 있어?”

감히 게일이 물을 수 없는 질문을 아더가 대신했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창밖으로 던져진 시선은 묘하게 무거웠다.

“후작 가? 백작 가? 하긴. 무슨 상관이겠어. 결국 클리프 부인이 될 텐데.”

푸른 눈은 이제야 제 친구를 향했다.

“적당히. 수준 맞는 여자면 되지.”

평소처럼 짓는 미소인데, 어째 입꼬리가 뻐근했다. 제 딴엔 무슨 경고라도 하려는 거였을까. 굳이 ‘수준 맞는 여자’라는 소릴 한 게 못내 우스웠다.

데베르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들을 필요도 없다 생각하는 것인지 제 손바닥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잿빛 머리통 속을 들여다볼 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 여자가 들어있을 테지.

“저번에도 얘기했었지.”

아더는 더 해사하게 웃었다. 삐뚤어진 속내가 들키지 않게. 데베르가 그의 저열한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게.

“자네는 참 징글맞게도 대답을 안 해,”

* * *

“대장님이 전투 전까지 회복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회복 따위 안중에도 없으신 분이지만요.”

계단을 내려가며 게일이 말했다.

“게일.”

아더가 멈춰 섰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누군가 대신해 줬으면.

“잠깐 밖에서 얘기하지.”

“예. 알겠습니다.”

사령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격리실에서 웃고 떠들던 모습과는 판이하였다. 그런 제 상관을 따라 게일도 덩달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더는 병원 후문으로 향했다. 간호 숙소로 이어지는 후문 공터는 인적이 드물었다. 모두가 병원에 있을 때면 낮인데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풍길 정도였다.

일부러 그곳으로 걸음한 아더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곤, 시가를 꺼내 들었다. 남들 눈엔 한심하게 시가나 태우는 장교들로 보여야 했으니까.

게일은 아더가 내민 시가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설핏 손가락으로 병원을 가리키는 게, 제 약혼자에게 들킬까 염려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더는 싱겁게 웃었다. 때 묻지 않은 게일의 모습이 싱그러운 청년 같다고 말하면, 아마 질겁을 할 것이다.

“젠장.”

저도 모르게 땀이 배어 나온 탓에, 라이터가 자꾸만 헛돌았다. 몇 번 시도하던 아더는 이내 욕설을 내뱉으며 입에 문 시가를 뱉어냈다. 안 그래도 바짝 마른 입안이 뻑뻑한 시가 탓에 더 타기만 했다.

뜸을 들이는 상관에 애가 타는 건 게일이었다. 전시상황에 심각한 얘기라면, 목숨이 달린 사안일 것이다. 기적처럼 아이네스를 다시 만났는데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제발 별일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가 떨렸다.

“사령관님, 무슨 일이신지-”

“데베르는 작전에서 제외한다.”

게일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아더는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말 그대로. 데베르 대장은 이번 작전에서 제외한다. 총지휘관은 바텀 대령과 나야. 본격적인 작전 회의는 오늘 밤 자정부터 내 막사에서 할 테니, 시간 맞춰 오도록.”

똑똑한 대령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데베르 대장님 없이 전투를….”

아더는 쓴 물이 올라오는 입안을 달싹였다.

“황제 폐하의 명이다.”

“폐하의 명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심지어 황제의 명이라니. 게일의 얼굴엔 정제되지 못한 혼란이 가감 없이 떠올랐다.

“사령관님의 지도야 이해 가는 바지만, 바텀이라뇨. 그놈을 모르십니까? 전술의 전 자도 모르는-”

“게일 웰링턴.”

차가운 시선이 부하를 내려봤다. 사령관의 서슬에 게일의 어깨가 빳빳하게 펴졌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상관을 신뢰하는 건 좋지만, 주군을 잊지는 말아야지.”

병사들은 넥서스 군의 두 축인 데베르와 아더를 불과 물처럼 여겼다. 두 사람의 성향이 판이하였기 때문이다.

데베르가 전투적인 기세와 강력한 통제로 군대를 통솔한다면, 아더는 인간적이고 포용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지금처럼 고압적인 기운을 풍기는 아더는 평소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평소다운’ 모습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군기가 바짝 든 게일의 모습이 거북스러워 아더는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구역질을 할 듯 토기가 밀려왔다.

“가 봐.”

멀어지는 군화 소리가 마침내 들리지 않을 때까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약한 새끼.”

애매한 죄책감은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회개할 생각도 없는 주제에.

외벽에 기대선 아더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와 흙바닥 사이로, 촉이 부서진 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주워들어 이리저리 살펴도 이름의 첫 글자 하나 새겨져 있지 않았다.

“나 같은 신세네.”

아더는 바지춤에 펜을 집어넣었다. 누군가는 쓰레기라 여겨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쓰고 버려지는 신세가 낯설지 않아,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누군가 자신도 그렇게 구해주길 바라면서.

* * *

“어? 안녕하세요!”

딕시의 밝은 인사에도 불구하고, 전장 병원의 만담꾼을 자처했던 딕시와 아더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이쯤 되면 또 어디선가 들은 소문을 얘기하며, 이야기를 함께 펼쳤을 황자는 한껏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딕시의 눈이 도르륵 제 친구들에게로 굴러갔다. 하지만 아이네스는 격리실에서의 망신이 부끄러워 일부러 등을 돌리고 있었고, 베스는 데베르에게 가져다줄 약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끄러미 그런 베스의 뒷모습을 보던 아더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사 층 가시는 거라면, 함께 가시죠.”

부드러운 명령 같은 어조였다.

베스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의 뒤를 따랐다. 아더의 침묵으로 인해, 안 그래도 부자연스러운 둘의 동행에 더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

“읏.”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그저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던 아더가 짧은 탄식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펜촉에 찔린 손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봉긋 솟아올랐다.

“제기랄.”

낮게 읊조리는 음성에 노기가 가득했다.

베스는 어찌할 줄 모르고, 가만히 걸음을 멈췄다. 늘 생글대던 곱상한 얼굴이 시정잡배처럼 욕을 중얼거리자, 그 모습이 더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그녀를 업신여기고 하찮게 보던 라프넬의 얼굴이 겹쳤다. 남매이니 당연히 닮은 것이겠지만, 생김새 말고도 풍기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아더는 몇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 복도 쓰레기통에 펜을 처박았다. 찔린 손가락이 아려왔다. 꼴사나운 자기 연민이 만들어낸 유치한 촌극이 이런 걸까.

입안에서 온갖 상스러운 욕지거리들이 맴돌았지만, 차마 베스가 보고 있어 마음껏 뱉을 수도 없었다.

균열은 순간이다. 한 번 금이 간 곳은 결국엔 깨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더는 두려웠다. 평생을 지켜왔던 가면이 부서지는 순간이, 꼭 지금인 것 같아서.

격리실 앞에 와서야, 아더는 입을 열었다.

“……수고하십시오.”

격리실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힐 때까지도 아더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할 두 사람이 작은 창 너머로 보였다. 데베르는 여느 때와 같았다. 그 얼굴 속에서 감정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꼭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인간은 때론 비이성적인 기이한 판단을 이성보다 더 굳게 믿을 때가 있다.

“라프넬, 네 말이 맞을지도.”

바람이 분다.

데베르에게도, 저에게도.

병원장실로 향하는 발뒤축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 * *

김이 오르는 찻잔을 입에 대면서도, 몰리 부인의 눈은 아더를 떠날 줄 몰랐다.

칙칙한 전장을 밝히던 황자는 그저 찻잔을 들고만 있을 뿐, 마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에 걱정이 앞선 부인은, 결국 먼저 입을 뗐다.

“무슨 일 있나요?”

“아, 예. 드릴 말씀이….”

그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온 아더의 입술이 달싹였다.

깔아뭉개듯이 게일에게 얘기를 퍼부었을 때와 달리, 부인 앞에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더를 어릴 적부터 보아온 사람이자, 때론 낳은 어미보다도 더 보듬어준 사람이다. 흔치 않게 그에게 대가 없는 애정을 보인 사람이 바로 다이애나 몰리였다.

그런 사람 앞에서 치부를 드러내기란 어려웠다. 아니,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경멸스럽게 보진 않을까 무서웠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부인의 눈가가 인자하게 휘어졌다. 세월의 흐름이 남긴 주름은, 오히려 중년의 품격을 더해줬다.

“저번에 데베르가 말씀드린 작전은 취소됐습니다.”

탁, 부인의 찻잔이 접시와 부딪혔다. 보통 얘기가 아니리란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 작전에서 데베르는 제외됩니다. 본인은… 모릅니다.”

“모른다니.”

군대장이 모르는 작전이라니. 부인의 얼굴에도 게일과 같은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그 표정을 보는 아더의 마음은 한없이 밑으로 처박혔다.

“폐하의 명입니다.”

“아니, 어떻게. 데베르 없는 작전이라니.”

“부인!”

탄식 같은 부인의 작은 중얼거림이 도화선처럼 아더의 속에 불을 지폈다.

“넥서스 군은 데베르의 것이 아니라 폐하의 것입니다! 병원은 그저. 지휘관의 작전에 협조하는 것만이 임무입니다.”

부인은 가만히 눈앞의 사령관을 마주했다.

내가 감히, 몰리 부인에게 언성을 높이다니.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제 밑바닥은 늘 이 모양이라는 걸. 이렇게 공작 부인에게 언성을 높일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자신이 황족이라는 알량한 자존심에 힘을 입어서라는 걸.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인.”

제 눈을 가리는 아더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펜촉에 찔린 핏자국은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괜찮아요. 피 말리는 전투를 하는 부담감을 내가 어찌 다 알겠어요.”

정말 괜찮다는 그 다정한 위로가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보여줄 바닥은 더 남았다.

“야전병원이 필요합니다.”

“그래. 그건 진즉부터 나왔던 얘기지.”

“극비리인 작전인 만큼 입이 무거운 자들로 모아주십시오.”

부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려보죠.”

“예를 들면.”

눈을 가린 손을 내리자, 가라앉은 푸른 눈이 일렁였다.

“베스 제인스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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