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베스는 내민 손을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저번엔 고작 편지, 한 단어도 제대로 못 알아챘으면서.
이번에도 데베르가 못 알아본다면, 그 비참함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또 얼마나 나를 속상하게 하려고.
원망 어린 눈이 남자를 향했다.
데베르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정말로 알아볼게, 베스.”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미련 없이 죽이라고 했다가, 또 온몸을 던져서 구해내고. 한없이 답답해하고 한심스러워하면서도, 또 이렇듯 목적 없는 다정함으로 달래고.
베스의 손끝이 가볍게 데베르에게 닿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머릿속을 부유하는 온갖 생각들보다도,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어쩌면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가 정말 알아줄 거라고.
여자의 고개가 숙어졌다. 뭔가를 고민하는지 내리깔린 속눈썹은, 창밖의 하늘처럼 새카맸다. 데베르는 그 모든 걸 놓치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는 복도의 찬 기운,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 펜을 많이 잡아서인지 흰 손에 남겨진 잉크 자국, 낡은 간호복에서 풍겨오는 이 여자의 향까지.
[좋은 기억]
“좋은 기억?”
베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으세요]
황당해할 그를 볼 자신이 없어, 열린 창밖을 바라봤다. 황무지 같은 이 전초선의 유일한 좋은 점이었다. 밤만 되면 쏟아질 듯한 별을 볼 수 있으니깐. 잠깐이라도 넘쳐흐르는 상념을 내던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뭐라도 되는 양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으라 말했지만, 그 말이 얼마나 기만인지 잘 안다. 나쁜 기억은 기분 나쁜 흉터처럼 새겨지는 것이니깐.
상처는 아물 수 있고, 고통은 사라질 수 있지만, 흉터는 평생 그 순간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상처가 생겨난 그 순간을 말이다. 그래서 끔찍한 것이고.
이 남자도 마찬가지겠지.
약을 먹고, 시가를 태우며, 술을 마시던 순간 중 즐거웠던 때가 있을까.
사탕을 챙길 때, 당신이 찰나의 즐거움이라도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적으면 믿을까. 나조차도 이 마음을 믿을 수가 없는데.
가만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베스는 퍼뜩 주머니를 다시 뒤졌다. 잊고 있었다. 정작 제일 중요한 건 이건데.
결국 당신이 날 기다린 이유는 이것일 테니.
여전히 펼쳐져 있는 데베르의 손 위로, 종이봉투가 올려졌다. 데베르는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이는 베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완전히 약에 미친 놈으로 보네.”
자조 섞인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다. 이 약 몇 알이 없으면, 제 꼴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아니깐.
베스는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데베르를 한 번 봤다. 해 줄 수 있는 건 모두 했으니, 이젠 헤어짐만이 남았다. 설마 낯간지럽게 인사까지 손에 쓰라 하진 않겠지.
데베르의 손이 약 봉투를 꽉 쥐었다. 연약한 종이는 너무도 쉽게 그의 손아귀 힘에 찌그러졌다.
“너는….”
끓는듯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왜 항상 홀가분한 표정을 지을까. 내게서 멀어지는 게 속이라도 시원한 마냥.
데베르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오늘은 왜 그냥 가.”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베스가 한 걸음을 뒤로 뺐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는 몰라도, 둘 사이를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가 이 상황이 위험함을 직감케 했다.
데베르는 거친 손길로 걸친 셔츠를 벗어 던졌다. 전등을 등진 그의 그림자가 작은 여자를 덮었다.
지레 겁을 먹어 움츠린 베스를 보던 데베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등에 상처. 혼자서 어떻게 바르겠어.”
어딘가 지친 기색의 남자가 베드에 걸터앉았다. 감긴 붕대 사이로, 어린아이가 마구잡이로 그려놓은 듯한 흉터가 보였다.
‘오늘은 왜 그냥 가.’
오늘은?
연고를 바른 건 어젯밤이 유일하다.
순간, 베스의 손이 멈췄다.
잠들지 않았던 걸까. 설마, 머리 만진 걸 아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물음들이 휙휙 스쳤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그 성질에 머리 만지는 걸 놔둘 남자가 아니야.
그저 의미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번엔 베스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 남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곱씹는 건지.
어지러운 마음이 더 피어오를세라, 약을 바르는 손길이 바빠졌다.
“이거 바르면 나아?”
데베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한 질문을 던졌다.
답은 이미 안다. 죽는 순간이 올 때까지 새겨져 있을 거란 걸.
“낫냐고.”
베스를 돌아봤다.
여자는 입술만 움찔거리며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이 안 된다 생각하겠지. 달싹이는 붉은 입술을 응시했다.
어차피 말도 못 하면서.
지금껏 본 베스는, 할 말이 있을 때 손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계속 보고 있으면, 꼭 그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보게 되는 걸까.
“나을지도 모르잖아.”
데베르는 이제 확신했다. 자신은 거짓말에 꽤 특출난 인간이란 걸.
“매일 밤 치료해 줘.”
이 여자의 약한 부분을 어렴풋이 알겠다고 했던가. 그 말은 취소다.
“나는 아프잖아.”
불쌍한 늑대 새끼 같은 놈. 누군가 어릴 적 우는 그를 보고 내뱉었던 말이다.
사냥감의 목을 물듯, 이 여자의 약한 부분을 잡고 늘어질 생각이다. 연약한 짐승 새끼처럼 구는 건 일도 아니니까.
네가 나를 벗어날 때마다 홀가분해지는 얼굴이 보기 싫어.
“네가 날 도와줘.”
같잖은 가식을 떨어서라도 붙잡을 만큼.
* * *
희미한 푸른빛이 누워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비췄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지만, 병원은 하루를 맞을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잠든 이들의 사이를 부지런히 다니는 발소리와 약통과 비품들이 내는 적당한 소음이 이른 아침의 평온을 전했다.
그 조용한 분주함 속에서, 아이네스는 다른 의미로 바빴다.
“뭐해?”
“깜짝아!”
비품실 구석에서 립스틱을 바르던 아이네스가 손까지 바들바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항상 저희보다 어른스럽던 아이네스의 소녀 같은 모습에 베스와 딕시가 키득댔다. 아이네스는 그런 둘을 흘겨보며, 한참 빗나간 립스틱을 닦아냈다.
“약혼자가 오시니, 천하의 아이네스도 거울을 손에서 못 놓네.”
아이네스의 손에는 조막만 한 거울이 들려있었다. 평소의 그녀와 한참 다른 모습이긴 했다.
“그게 아니라, 안색이 어두워서 입술만 바른 거야. 입술만.”
“예, 예.”
딕시는 귀여운 변명을 들어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베스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들뜬 모습이 보기 좋았다.
“베스, 너도 바를래?”
평소라면 손사래를 쳤을 베스가 잠자코 립스틱을 받아들었다. 그런 베스를 보는 딕시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다들 애인 있으셔서 좋겠어요.”
“응? 애인?”
아이네스의 둥그레진 눈이 베스에게로 향했다. 자신이야 약혼자가 있으니 놀리는 게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다들 애인이 있다’니.
베스가 가볍게 딕시의 어깨를 타박했다. 며칠 전 데베르와의 ‘데이트’ 어쩌고를 놀리는 거였다. 데이트는 무슨. 그 말도 안 되는 데이트로, 그 남자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는데.
아이네스의 반짝이는 눈이 이번엔 딕시에게로 향했다. 재밌는 게 오고 간 게 분명하다.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전장의 라디오’ 딕시고.
딕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말한 ‘다들’은, 웨인에 있는 내 친구들. 다들 약혼자도 있고, 애인도 있더라고.”
그래도 아이네스의 의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 있지. 베스, 말해.”
아이네스가 베스의 손에 억지로 펜을 쥐여 주었다. 놓으려는 베스와 잡게 하려는 아이네스가 한창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 비품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서 다들 뭐하니.”
엄한 부인의 등장은 모든 소란을 일단락했다. 아이네스는 예의 그 점잖은 아이네스 영애로 돌아왔고, 베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딕시만 그들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딕시. 무슨 일 있니?”
“아닙니다. 그저 저는 동료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할 말을 잃었을 뿐이죠.”
“응?”
영문을 모르는 부인이 셋을 훑어봤다. 따로 놓으면 다들 일 잘하고, 품행 단정한 아가씨들인데. 어째 붙여놓기만 하면 북새통이 따로 없을 지경이니.
“베스, 난 지금 장터로 가야 하니깐 사 층 드레싱이랑 약 준비를 대신해 주렴. 아이네스는 내 방에 가서 보급부로 전화해 주고. 그리고 딕시!”
부인의 매서운 부름에 딕시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제발, 오늘은 병사들한테 온갖 웨인의 가십 얘기하지 말고!”
“옙.”
“사 층에 게일 대령이 왔더구나.”
선물 던지듯 툭 던진 부인의 마지막 말에 아이네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 친구의 달뜬 발걸음에 맞춰, 베스가 함께 계단을 올랐다. 항상 고요하던 사 층에서 흔치 않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격리실에서 들려오던 남자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는 아이네스가 문을 여는 순간, 딱 멎었다.
연분홍빛으로 상기됐던 얼굴이 꾹꾹 눌러내는 화로 붉어졌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뒤따라 들어오던 베스의 표정도 아이네스와 매한가지였다.
그러라고 갖다 놓은 게 아닐 협탁 위엔, 보드카 병 두어 개가 마개가 열린 채 있었고, 넓은 격리실 안은 남자 셋이 피워댄 시가 연기로 매캐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데베르.
“아, 죄송합니다.”
아더가 급히 창문을 열었다.
베스의 시선은 데베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뭐가 그리 당당한지, 심지어 피식 웃어 보이기까지 하며 보란 듯이 병째 보드카를 들이켰다.
셋 중 덜미를 잡힌 건 게일뿐인 모양이었다.
“아니, 아이네스. 그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대령님.”
“아니, 보급선이 폭파돼서 석 달 동안 술은 한 번도 입에 댄 적 없어.”
“그러시겠죠.”
“오랜만에 대장님과 사령관님을 뵈니까….”
게일은 뭘 기대하는지 데베르를 돌아봤다. 설마, 제 군대장이 가련한 부하를 구해줄 거로 생각하는 걸까.
트레이를 쥔 베스의 손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사람들만 없었다면 당장에 술병과 시가를 어제처럼 창밖으로 던져버릴 여자다. 그래도 사람들이 있다고, 성질을 참는 모습에 데베르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더 화를 부추겼다간, 밤에 또 부루퉁한 얼굴로 오겠지.
“가자, 베스.”
아이네스가 얼른 베스의 손을 잡았다. 황자와 공작이 있는 곳에서 약혼자와 다툼하는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잠시 데베르를 노려보던 베스도, 이내 제 친구의 손에 끌려 격리실을 나섰다.
단단히 화가 난 듯한 두 여인이 나가고 나자, 아더가 장난스레 말을 던졌다.
“자네는 결혼하면 아주 잡혀 살겠는걸.”
게일은 실없게 웃었다.
“저는 아이네스가 저러는 것도 좋습니다. 결혼하면 더 많은 모습을 보겠죠.”
데베르는 손에 들린 병을 내려놨다. 베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서 일부러 해 본 유치한 짓이었다. 꼴사납게 군 것 치고, 얻어낸 표정이 꽤 괜찮았다.
“그래. 같이 살면 많은 걸 보겠지.”
지금껏 결혼 얘기에 침묵을 지키던 데베르의 첫마디였다.
“재밌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