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베스는 골똘한 표정으로 약제실 선반 앞에 서 있었다.
막연히 ‘더 좋은’ 걸 주겠다며 호언장담했지만, 대체 그 남자에게 뭘 줄 수 있을까. 술과 시가를 대신할 만한 거.
대충 입에 뭘 물고 있으면 낫지 않을까.
감히 넥서스 군대장의 입에 뭘 ‘물린다’라는 표현이 우스웠지만, 딱히 뾰족한 수도 없었다.
베스의 발걸음이 구석의 찬장으로 향했다. 찬장 맨 위 칸엔, 색색의 작은 사탕들이 커다란 통 안 가득 들어 있었다. 진통제가 다 떨어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나름의 대안이었다.
이게 아닌 줄 알지만…. 알록달록한 사탕 몇 알을 주머니에 챙기는 베스의 표정이 석연찮았다. 이걸 받아들 공작이 또 무슨 말을 할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병원에서 술이랑 시가는 말도 안 돼.
베스가 마음을 굳히며 발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게일!”
아이네스의 비명 같은 외침이 복도를 울렸다. 그녀가 놓친 빨래 바구니가 바닥을 엉망으로 나뒹굴었지만, 아이네스는 그걸 챙길 정신도 없어 보였다.
망연하게 문을 바라보던 아이네스의 얼굴은, 곧 벅찬 기쁨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아이네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날개 모양의 금 훈장을 단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남자가 두 팔을 활짝 벌리자, 아이네스는 주저 없이 뛰어가 그의 품에 안겼다.
베스는 그제야 그 남자가 아이네스의 약혼자임을 알아챘다. 귀가 닳도록 들었던 아이네스의 정인이자 공군 대령, 게일 웰링턴.
약혼자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아이네스의 울먹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멀리서 베스와 눈이 마주친 딕시가 눈썹을 들썩였다. 딕시에게 이보다 좋은 구경거리가 있을까.
살며시 함께 웃은 베스도, 눈물겨운 연인들의 재회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다는 건 얼마나 힘든 걸까. 경험해 본 적도, 경험하지도 않을 것 같은 일을 베스는 잠깐 상상했다. 오랜만에 떠오른 그 나이 또래다운 생각이었다.
“데베르 대장님을 찾아왔어.”
게일은 사랑스러운 제 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헤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이네스는 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렸다. 게일의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가로젓는 게 그러했다.
“문 앞까지만 같이 가요.”
함께 계단으로 오르는 연인으로 인해 당황한 건 베스였다. 물론, 사 층을 출입할 수 있는 소수에 수간호사인 아이네스는 당연히 속했다.
“베스, 사 층까지만 함께 할게.”
베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뭐라고 같이 갈 수 있다 없다 하겠는가.
이 이상스러운 동행이 한결 수상쩍도록 숟가락은 얹은 건 아더였다. 계단을 내려오던 그는 게일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사 층 행에 합류했다.
남자들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네 명의 요란한 발걸음이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가장 먼저 가려던 건 베스인데, 어째 무리의 제일 뒤에 서 있었다.
“데베르, 내가 친구를 데려왔어!”
데베르의 눈이 격리실을 들이닥친 불청객들에게 꽂혔다. 문가에 서서 쭈뼛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던 베스는, 눈이 마주치자 얼른 제 발끝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더 좋은 걸 준다더니.”
뜻 모를 데베르의 중얼거림을 알아듣는 건, 베스가 유일했다.
“많이도 갖고 왔네.”
베스는 이 상황이 다소 억울했다. 내가 데려온 것도 아닌데.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내리깐 눈을 반짝 올려 떴다.
잔뜩 할 말이 차오른 눈을 깜빡이는 여자의 얼굴에 데베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아더는 그 찰나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짙은 금빛 눈썹이 아주 잠깐 찌푸려졌다 이내 평소와 다름없게 돌아왔다.
“아, 이걸 어쩌나. 저희의 재미없는 얘기에 영애들께서 다 도망가시겠습니다.”
하지만 아더는 언제나 제 감정을 숨기는 데는 도가 튼 남자였다.
적당한 감정은, 적당히 날아가게.
그게 아더의 방식이었다.
“가자, 베스.”
눈치 빠른 아이네스가 얼른 베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직 볼 일이 남았는데. 베스가 무의식적으로 발을 뻗대자, 아이네스는 ‘얼른’이라 나직이 속삭이며 베스를 재촉했다.
베스가 데베르를 돌아봤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할 뿐이었다.
정말 얄밉게도.
* * *
“사랑하는 이가 일 층으로 떠나 마음이 아프겠어.”
아더는 능글맞게 부하를 놀렸다.
게일은 쑥스러운지 목덜미가 시뻘게졌으면서도, 제 할 말은 했다.
“아이네스를 일 년 만에 다시 본 겁니다. 사실, 대장님이 부르셔서 기쁜 것도 있었어요. 이렇게라도 아이네스를 볼 테니깐.”
“전쟁 끝나면 곧 결혼할 거지?”
“예, 그래야죠. 황자, 아니 사령관님께서도 결혼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나야 뭐, 제국민의 사랑을 받으니까. 한 사람에게 귀속되기엔 아까운 감이 있지.”
아더의 능청에 게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봐도 유쾌한 아더를 좋아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대장님께서는요. 듣기로는 영애들께 인기가 아주 많으시다던데.”
“이놈은 그냥 무도회에 서 있기만 해도 영애들이 수군수군 아주 난리야. 그걸 보고 얼마나 배가 아프던지.”
“그래도 결혼은 하셔야죠. 제 생각엔 대장님께서도 이번 전쟁 끝나면 곧 하실 것 같습니다.”
꼭 뭐라도 아는 양 게일이 참견했다.
“결혼이라.”
데베르는 평생 제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던 단어를 곱씹었다.
클리프가. 클리프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가문의 영광과 후계의 자질에 대해 들었지만, 정작 그는 후계를 제가 잇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카시우스 공작이 ‘그렇게 된’ 날.
아니, ‘그렇게 한’ 날이라 해야 할까. 그때, 클리프 가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클리프의 이름을 단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결혼이라.
“생각해 놓으신 영애가 있으십니까.”
그 순간, 그들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게일은 영문을 몰라 군대장과 사령관을 번갈아 봤고, 아더의 눈썹은 다시 한번 살짝 찌푸려졌다.
“글쎄.”
애매한 대답을 뱉으며, 위스키병을 들던 데베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저도 모르게 덜 아문 오른쪽 어깨를 쓴 탓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게일의 얼굴에 근심이 묻어났다. 데베르 대장의 부상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그 시기가 문제였다.
데베르는 부하의 걱정에 대꾸는 하지 않고, 손에 들린 병을 가만히 응시했다. 베스가 죄 치운 게 무색하게, 곧이어 들어온 아더는 위스키와 시가, 데베르의 막사에서 챙긴 약을 잔뜩 싸 들고 등장했다.
아마 그 여자가 봤으면 또 멍청한 강아지 같은 표정을 했겠지.
조금만 더 일찍 베스가 돌아왔으면 그 표정을 봤을 텐데. 약간의 아쉬움이 스쳤다. 딴생각을 하는 머릿속과는 달리, 입은 정직하게 군대장다운 말만을 뱉어냈다.
“바텀 대령은 보고 온 건가.”
“대충 인사는 하고 왔는데, 정말 그놈하고 해야 합니까. 폐하의 명이라 거스를 수도 없고.”
데베르의 폭탄 같은 계획을 아직 모르는 게일이 투덜거렸다.
아더는 바짝 마른 입술을 위스키로 축였다. 이제 곧 제 속을 타게 할 얘기가 나올 테니, 차라리 술로 먼저 데워 놓을 요량이었다.
“거스를 생각이야.”
“예?”
데베르의 표정은 초연했다.
“진격전을 할 거야. 정중앙에서. 그러기 위해선 자네가 필요해.”
경악에 찬 게일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무정한 말이 이어졌다.
“코바흐 수도로 이어지는 교량을 폭파해 줘야겠어.”
* * *
“베스….”
잔뜩 울상을 지은 아이네스가 다가왔다. 베스는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봐도 무슨 얘기일지가 훤히 보였으니까.
“내가 무슨 얘기할 줄 알고?”
베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문 쪽으로 까딱였다. 그곳엔 눈을 반짝이며 제 약혼자를 기다리는 게일이 서 있었다.
“내가 오늘 사 층 나이트인데……. 정말 미안해. 나중에 꼭 갚을게.”
두 볼이 발그레한 아이네스가 거듭 다짐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베스는 얼른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어차피 잘된 일이었다. 데베르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나이트 근무를 하면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누구에게든, 그와 단둘이 만나는 걸 보여봤자 좋을 게 없었다.
아직 격리실에 있는 아더를 기다리며 베스는 보던 서류에 집중했다. 아더가 내려온 건, 병동의 불이 한둘씩 꺼질 무렵이었다.
“나이트 근무 하시나 봐요.”
얼추 병원 일을 아는 척하던 아더는 곧장 떠나지 않고, 데스크 주위를 맴돌았다.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벙긋대던 입은 결국 굳게 다물렸다.
“아닙니다. 수고하세요.”
아더가 완전히 병원을 떠나고 나서야, 베스는 사 층으로 향했다. 할 말이 있는 듯했던 그의 표정이 잠깐 떠올랐지만, 이내 흐려졌다. 황자가 일개 간호사인 제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베스는 가볍게 결론 짓고는, 한층 한층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컴컴한 사 층 복도 끝, 격리실에서 작은 빛이 흘러나왔다.
괜한 긴장감에 느려지던 걸음은 결국 문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숨을 고르는데,
“대체 그 앞에서 뭘 하는 거야.”
갑자기 벌컥 열리는 문에, 손잡이를 잡고 있던 베스의 몸이 쏟아지듯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데베르의 헐벗은 어깨였다. 얼른 뒷걸음질 치자, 남자는 이번엔 손잡이 대신 손목을 잡아당겼다.
“답답하게 굴지 마.”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데베르는 베스가 사 층을 걸어올 때부터, 그 규칙적인 울림을 세고 있었다. 점점 느려지던 걸음은 기어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대체 문 앞에서 뭘 하는 건지.
어떨 때는 기가 막히게 잽싸면서,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미치도록 답답한 여자였다.
열린 창문으로 한기가 들어오는데도, 데베르는 셔츠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베스는 시선 둘 곳을 몰라 괜히 병실 이곳저곳을 훑었다.
남녀 가리지 않고 벗은 몸은 이골이 날 정도로 봤고, 심지어 눈앞의 남자 또한 부상병 중 하나일 뿐인데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일에 대한 자부심 하나는 특출한 베스였기에, 스스로 실망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오기 섞인 눈으로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부끄러울 것도 많네.”
데베르는 미적거리며 곁에 걸린 셔츠를 대충 걸쳤다.
“더 좋다는 게 설마 그 쓸데없는 인간들인가.”
베스는 약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확신 없는 모양새에 데베르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그럼 뭔데.”
입술을 잘근거리던 베스는 결국 내키지 않는 손길로 온종일 들고 다닌 사탕을 꺼냈다.
물끄러미 사탕을 보는 남자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는 게 보였다. 차라리 거짓말을 할걸.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게 왜 더 좋은 건지 설명해 봐.”
베스는 머뭇거리며 펜을 꺼냈다. 데베르는 주저 없이 펜을 뺏어 들어 창밖으로 던졌다.
꼭 아침에 베스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왜, 너도 시가 집어 던졌잖아.”
베스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설마, 지금 그 복수를 하겠다고.
데베르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여긴 펜 같은 거 없어.”
상처 난 손이 베스에게로 내밀어졌다.
그리고.
“이번엔 잘 알아들을게.”
밤과 어울리는 퍽 다정한 다짐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