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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24화 (24/206)

24화

데베르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바람 빠지는 듯한 헛웃음 끝엔, 그의 눈앞에 선 상대를 향한 허탈함마저 묻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베스 제인스.

쌕쌕거리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두 손을 모아 쥔 바로 이 여자 때문에 말이다.

베스 또한 지금의 제 모습이 기가 막히긴 매한가지였다. 분명, 어젯밤 데베르의 병실을 나오며 동이 트기 전에 오겠다고 굳게 다짐했는데.

항상 얕은 잠만 자다, 어제는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리 깊이 잠들었던 걸까.

더군다나 사정을 아는 딕시와 아이네스가 일부러 살금살금 아침 준비를 한 통에, 베스 혼자만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사이로 이른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제 일 이후로, 사 층은 소수의 의료진을 제외하곤 전면 출입 금지가 됐다. 데베르의 부상을 숨기기 위한 극단의 조치였다. 실제로 그의 부상을 아는 이들은 극히 일부였고, 그 비밀이 만들어 낸 평화에 다들 기꺼이 몸을 맡겼다.

“나는 ‘아내’를 지키려다 어깨가 작살났는데.”

짐짓 심각한 그의 목소리에, 베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젠 심부름꾼과의 협상에 정신이 팔려, 그가 ‘아내’니 뭐니 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아침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아내’란 소리는 어찌나 생생하게 들리는지.

베스는 자꾸만 부끄러워졌다. ‘아내’란 민망한 단어도. 자신 때문에 다친 사람은 앓아누운 마당에, 혼자 태평하게 잔 모양새까지.

순간, 베스는 무언가 떠오른 듯 급하게 제 옷 위로 손을 올렸다. 하지만 주머니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느껴지는 건, 밋밋한 뱃가죽뿐이었다. 그제야 급하게 오느라 앞치마도 잊은 게 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움이 지나간 베스의 얼굴 위로, 이번엔 낭패감이 떠올랐다.

느긋하게 창가에 기댄 데베르는 베스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한 말은 사실이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겠다’라는 그 말.

사실 그건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베스가 말하지 않는 게 불편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 빌어먹을 종이만 찾는 꼴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뭘 주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잊은 게 분명했다. 급하게 온 건 사실인지, 잔뜩 실망한 얼굴엔 아직 물기가 묻어났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은 잔뜩 꾸민 어제와는 달랐지만, 그의 마음에 무언가를 충동질한다는 점은 똑같았다.

그 사이, 베스는 결심한 듯 눈에 힘을 줬다. 늦은 건 엎질러진 일이니, 지금이라도 약과 쪽지를 챙겨와야겠단 생각에 몸을 돌렸다.

“이걸 흔들면 오는 건가.”

데베르는 무심하게 베드 옆에 걸린 설렁줄을 약하게 흔들었다. 노란 아침 햇살과 어울리는 청량한 종소리가 작게 울렸다.

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봐.”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꼭 뱀 같은 미소였다.

* * *

잊을만하면 울려대는 종소리가 병원 밑층까지 부지런히 전해졌다.

아침 이후, 사 층의 이름 모를 환자는 줄기차게 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이유도 갖가지였다. ‘물을 가져달라.’, ‘병사 지도를 가져와라.’, ‘어깨 붕대를 더 세게 감아달라.’ 등. 환자와 군대장을 오고 가는 부탁들에, 이를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데베르 클리프는 비밀이란 무기를 사용하는데 이골이 난 군인이었으니까.

“어디서 이렇게 종이 울려댄담. 온종일 울리네.”

비밀을 모르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베스가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처음 설렁줄이 울렸을 때, 꼼꼼히 약과 연고, 쪽지까지 챙겨 갔었다. 하지만 데베르는 제게 내민 것 중 쪽지 하나만 받아들고는 모두 물렸다.

‘약을 줄이게 도와준다 했으면서, 아침부터 먹이려는 건가. 밤에 가져와.’

연고 또한.

‘내가 무슨 수로 등 뒤에 약을 바르지?’

그나마 쪽지는 잠깐 보고선.

‘성의가 없네, 베스. 성의를 좀 보여 봐.’

그래서 지금 그 ‘성의’를 보이기 위해, 베스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사 층 행을 자처하는 중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잔뜩 성이 난 채 문을 연 베스는 그대로 멈춰 섰다.

지금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유난히 너른 격리실 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데베르의 주위로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대체 누가 갖다준 건지 마개가 열린 위스키까지 보란 듯이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저 남자가 정신이 나간 걸까.

차마 뱉지도, 적지도 못 할 말이었지만, 데베르는 충분히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 없는 말을 전하는 얼빠진 얼굴이 꽤 마음에 들었다.

어젯밤 그렇게 해놓고선 혼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잠들다니. 뒤틀어진 심사가 이제야 풀렸다. 이 정도면 늦잠의 대가로 나쁘지 않다.

베스는 그대로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시가를 창밖으로 던졌다. 작은 불씨는 맥없이 허공으로 추락했다.

활짝 열린 창으로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남자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비워진 손으로 흩날리는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항상 이마가 보이도록 깔끔하게 올려져 있던 머리칼이 남자의 눈 위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 살랑이는 부드러움은 냉담한 제 주인과는 결이 달랐다.

베스는 몸을 돌려 협탁 밑에 놓인 작은 서랍을 뒤졌다.

역시나.

서랍에서 시가와 라이터를 챙겨 든 베스는 놓인 위스키병까지 들었다. 등 뒤에서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약도 끊느라 힘든데, 뭘 더 어쩌자고.”

데베르는 이제 어렴풋이 알아가는 중이었다. 이 여자가 어떤 부분에서 마음이 약해지는지, 그리고 그럴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호기롭게 압류품을 품에 든 베스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떠올랐다가, 이내 협탁 위에 그 모든 걸 내려놓았다.

데베르의 긴 손가락이 제 입가를 매만졌다. 웃는 걸 들키면 또 그를 노려볼 테니까.

이내 나갈 줄 알았던 여자는 펜을 꺼내 뭐라 끄적였다.

[다른 거로 드릴게요.]

“뭘 줄 수 있는데.”

퉁명스러운 반문에 잠시 움츠러드나 싶던 여자는, 다시 결연한 표정으로 뭔가를 써냈다.

[더 좋은 거요.]

더는 참지 못한 데베르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더 좋은 거라니.

항상 베스 제인스는 그의 예상 밖에 있는 여자라는 걸 잠깐 잊었다.

정말 나를 갱생이라도 시켜 보려는 건지.

이제는 정말로 베스가 뭘 가져올지 궁금해졌다. 약보다, 시가보다, 위스키보다 좋은 것.

“그래, 기대할게.”

베스는 처음 보는 그의 웃음에 어떻게 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텐데. 남자가 비웃기 전에 얼른 몸을 돌려 격리실을 나왔다.

항상 그를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상한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 저 남자의 웃는 얼굴이 비쳐드는 햇살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다니.

낯 뜨거운 생각에 귓바퀴가 홧홧해졌다. 몰려든 열기를 식히려 복도 벽에 기대서자, 찬 기운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타고 올랐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데베르와 베스의 시간이 흘러갔다.

베스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 안의 남자가 멈춰진 발걸음을 세고 있는지도 모르고.

* * *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베스를 잡은 건 아더였다.

“간호사님,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세요.”

시원하게 올라간 입매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우리는 오다가다 자주 만나는 사이인가 봐요. 맨날 돌아다녀야겠다.”

그리고 그 얼굴만큼이나 유려한 언사 또한 그의 매력이었다. 장난스러운 말을 너무 가볍지 않게, 진지한 말을 너무 무겁지 않게 하는 게 그의 재주였으니까.

처음엔 이런 아더를 불편해하던 베스도, 이젠 어느 정도 그 장단에 맞춰줄 정도는 됐다. 그래봤자 애매한 미소를 짓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데베르는 괜찮던가요.”

베스는 조금 전까지 마주 보았던 데베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심하게 ‘작살난 거 같아’라고 하긴 했어도, 아픈 티는 없었다. 혹시 자신이 미안해할까 봐 그런 건지, 정말 그 정도는 참을만해서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왼손에 어설프게 쥐어진 시가가, 그가 오른팔을 드는 게 힘들다는 걸 말해줬다.

“그 정도로 끔찍하던가요.”

점점 어두워지는 베스의 안색에, 아더는 곧 제 물음을 후회했다. 차라리 싱거운 소리나 할걸. 하필 그딴 걸 물어봐서는.

“그보다 더한 것도 견뎠는데요. 저 정도는 우스워요.”

나름 위로한답시고 한 말에, 여자의 얼굴이 더 파리하게 변했다.

아더는 지금 딱, 제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이 방정인 놈이 맞네.”

제국의 사랑스러운 황자를 늘 못마땅해하던, 어느 후작 아들내미의 뒷말이 이제야 절절히 가슴에 꽂혔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아더 공작.”

길게 늘어지려는 변명을 자른 건, 어느 새 그들에게 다가온 몰리 부인이었다. 아더는 선뜻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 * *

‘폐하께서 찾으신단다’

아무도 없는 사 층 복도를 걸어가는 아더의 표정은 전에 없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폐하의 전화.

근 일 년을 이 폐허 같은 곳에 처박아 놓고서 이제야 전화라. 브리틴 놈을 보낸 것에 대한 당부라도 하려고 그러는 걸까.

병원장실 문을 단단히 잠근 후, 수화기를 들었다.

“폐하.”

[바텀 대령은 만난 건가.]

“…예.”

[전장에서 수고가 많군.]

아더의 입술에서 마른 웃음이 새 나왔다. 이토록 마음에 없는 말이라니. 넥서스의 황제는 수고 따위 치하하려고 연락할 사람이 아니다.

“고작 저의 수고를 말씀하시려고 연락하셨습니까.”

잠깐의 침묵이 전화선을 오갔다.

아더는 막사 전화선을 폭파한 코바흐군을 저주하는 중이었다. 폭파를 할 거면 여기까지 전부 불사를 것이지, 왜 여기만 살려놔선.

[…데베르가 기습당했다고.]

역시.

“…폐하의 눈은 저 하나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감정을 잔뜩 억누른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여기서 웨인이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던가요.”

황제의 눈이 아더 자신만이 아닌 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데베르에게 그를 붙였듯, 아더를 감시하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의심과 불신으로 점철된 인간이, 황제란 작자니까.

하지만, 어제의 기습 소식이 오늘 해가 지기도 전에 황궁까지 도착하다니.

가슴 깊은 곳에서 쓴 기운이 올라왔다.

[아더, 내 동생.]

내 동생.

고작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 발악했던 지루한 시간들.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어 사랑스럽게 굴던 어린 황자를 기억하는 호이든은, 너무도 쉽게 아더의 상처를 건드렸다.

“…형. 호이든 제발…….”

바로 지금처럼.

[내 동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신이 주신 기회란다.]

아더는 눈을 감았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길.

[데베르의 숨통을 끊을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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