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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23화 (23/206)

23화

베스는 멍하니 복도 간이의자에 앉아있었다.

검붉게 물든 원피스를 입은 간호사를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꽂혔지만, 베스는 그 시선조차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넋이 나가 있었다.

어떻게 다시 이곳까지 왔더라.

기억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었다.

데베르가 자신을 감싸 안고, 그가 쓰러짐에 따라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어깨에 기댄 남자의 신음과 팔 한쪽을 적셔 오던 척척함까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곳이었다.

“베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멍한 눈이 올라갔다. 딕시였다.

“옷 갈아입자.”

딕시는 뭐라 말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아, 그저 옷이라도 갈아입자며 손을 잡아끌었지만, 베스는 그 손길을 쳐냈다.

까만 눈동자는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딕시는 자신을 내친 손을 다시금 조심스럽게 잡았다.

“벌써 한 시간 째야. 수술 끝나면 바로 알려줄게. 방에 가자.”

안 돼. 뺨에 핏자국이 묻은 멀건 얼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딕시의 말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된 걸까.

왜 이렇게 수술이 오래 걸리는 거지.

위독한 걸까.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내 시체가 적한테 넘어가면 안 되거든.’

그 말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자는 예시라도 보여주려는 양, 총에 맞아 쓰러졌다.

베스는 작은 손바닥에 고개를 묻었다. 이미 굳어버린 피비린내가 섬뜩했다.

만약 데베르가 달려오지 않았다면, 지금 저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건 베스일 것이다. 어쩌면 수술실에 채 들어가지도 못하고 숨을 거뒀을 수도 있고.

몇 번 베스를 달래던 딕시는, 멀찍이서 바라보는 아이네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다시 홀로 남겨진 베스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숨통을 조일 만큼 아주 느리게.

* * *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수술실 문이 다시 열린 건, 정오가 한참 지나서였다.

그때까지도 망부석처럼 문 앞을 지키던 베스가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엎드린 채 들것에 실려 있었다. 미동도 없는 게 아직 마취에서 깨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엉망인 몰골로 굳어있는 베스를 보는 부인의 마음이 저릿했다.

“일반 병동 베드 하나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

누군가의 말에 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안돼. 사 층 격리실로 옮겨요.”

부인은 그 말을 하며, 베스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생각보다 부상은 심각했다. 생명에 지장을 주진 않았지만, 곧 전투를 앞둔 제국군에겐 치명적인 오점이 된 터다.

이 전장에서 데베르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데베르에게 목숨을 빚진 이는 넥서스 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넥서스 군대장이 기습공격을 받았다는 건 최대한 함구, 또 함구해야 할 사실이다.

“베스, 많이 놀랐니.”

의미 없는 물음인 줄 알면서도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으로 있으면 많은 사람이 놀랄 거야. 가서 옷도 갈아입고, 씻고 오렴.”

베스가 부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아귀엔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데베르는 괜찮을 거야. 여태 살아남았는데. 걱정하지 말렴.”

베스가 이해한 ‘여태’는 데베르가 전쟁에 참여한 시간이었지만, 부인이 말하는 ‘여태’는 다른 의미였다.

공작부인 다이애나 몰리는 데베르가 소년병이 되기 전부터 그를 봐 왔었다. 사교계에서 돌던 그 옛날의 소문들을, 그리고 그 소문이 진실임을 알리던 어린 데베르를 기억했다.

어쩌면 데베르에겐 지금보다 그 시간이 더 지옥이었을지도.

“어서 가지 않고. 네가 데베르의 전담 간호사잖니.”

‘전담 간호사’를 말하며 부인이 설핏 웃었다. 데베르와 부인, 베스 셋만 아는 농이었다.

능청스러운 거짓말로 베스의 누명을 벗겨준 그 날이 남긴 농담 같은 한 마디.

데베르의 전담 간호사.

베스의 입꼬리도 부인을 따라 어설프게 올라갔다. 영양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왜 그리도 그 말이 무게 있게 다가오는지.

그제에 베스의 발이 천천히 숙소를 향해 움직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끝에도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죠.’

언제부턴가 잠금쇠가 고장 난 숙소 문은 맥없이 열렸다.

데베르가 이 앞에 서 있을 땐, 문이 참 작아 보였는데. 베스에겐 고작 이 문 하나도 너무나 크고, 무거웠다.

* * *

베스가 다시 숙소를 나선 건 어둠이 질 무렵이었다.

부인은 일하는 걸 말리진 않겠지만, 반드시 반나절은 쉬고 나오라며 신신당부했었다.

발걸음은 평소와 달리 병원을 돌아가는 갓길로 향했다. 대충 다듬어진 숲길을 끼고 돌면 데베르와 조우했던 약품 창고가 나온다.

창고 문 앞에서 옷 속에 감춰진 목걸이를 꺼냈다. 그리고 선반에서 안정제를 꺼내 몇 알을 작은 종이에 쌌다.

다른 간호사에겐 약을 달라고 하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까.

베스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정을 세우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손에서 약통이 미끄러졌다. 붕대가 감긴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잡아 줄게.’

제 기억 속에 이토록 그 남자가 많았었나 싶을 정도로, 마을에서 돌아온 이후에 그가 했던 말들이 귓가를 자꾸만 울렸다.

신경질적인 손길로 붕대를 풀어헤쳤다. 상처는 얼추 아물어 마지막 딱지가 앉은 곳이 간질거리는 시점이었다.

병원을 걸어가는 걸음에 맞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약제실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 계단을 오를 때마다, 트레이 위의 비품들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곧 보게 될 데베르의 모습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이리라.

격리실 앞에서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서 있는데, 갑자기 닫힌 문이 열렸다.

“어? 베스?”

격리실에서 나온 아더가 반가운 얼굴로 베스를 마주 봤다.

여자의 얼굴 위로 데베르를 향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왜일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꼭 어제저녁, 데베르의 손 위로 무언가 열심히 쓰던 베스를 볼 때와 같은 불편함이었다.

“막상 보니까 별거 아니더라고요.”

그 마음을 숨기려, 부러 능청을 떨었다. 하지만 그 말이 맞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일렁였다.

괜한 거짓말을 했나.

“데베르는 좋겠네요.”

아더는 빙긋 웃었다. 늘 싱글대는 웃음이 아닌, 어딘지 조금 기가 죽은 것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전담 간호사도 있고.”

베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서럽다. 나도 넥서스 사령관인데 아무도 나는 보살펴 주지 않네.”

아더는 장난스런 포장 아래에 홀로 아는 진심을 숨겼다.

다들 자신을 팔자 좋은 황자로만 볼 뿐, 아더라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선황이 서거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를 ‘황자’라 부르는 이가 많은 것만 봐도 그랬다. 그저 황제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 역할이나 하면 그뿐이란 뜻이지.

행여 베스를 부담스럽게 할까, 아더는 얼른 제 말을 주워 담았다.

“저도 나중에 아프면 봐주세요. 당연히, 아프지 않은 게 좋겠지만.”

베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그 얼굴을 보던 아더는 과장되게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시죠. 간호사님. 제 친구가 다 죽어갑니다.”

‘죽어간다’라는 말에 베스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탁, 하고 닫히는 문이 꼭 저에 대한 거절 같아 마음이 쓰렸지만, 뭐 어쩔 수 있겠는가.

항상 이리 살아온 삶인데.

* * *

어둑한 방 안에 허옇게 감긴 붕대가 눈에 띄었다.

엎드린 남자는 아직 마취에서 깨지 않았는지, 처음 들것에 실렸을 때처럼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래도 군대장이 있다고 베드 옆에 작은 협탁도 놓였고, 그 옆엔 설렁줄도 달렸다.

오른쪽 어깨 위와 날개뼈 있는 곳이 유난히 두툼하게 동여 매어져 있었다. 불그스름한 자국들이 핏자국이 아니라 소독약 자국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선득했다.

베스는 반쯤 드러난 데베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잠들었기에 낼 수 있는 용기였다.

항상 형형하던 눈은 얌전히 감겨있었다. 알고자 한 적도 없지만, 속눈썹도 짙은 잿빛이었다.

어릴 적 상처 입은 새끼 레트리버를 품에 안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강아지도 제 털 색처럼 눈동자도, 속눈썹도 아마 빛이었다.

주머니 속, 약을 담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협탁 위에 놓을까 말까를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이젠 자신이 자주 올 테니깐. 약은 다시 주머니로 들어갔다.

목숨을 살려줬는데 그의 비밀 정도는 끝까지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아까 장터에서 바닥을 뒹굴며 한 접전 때문인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남자의 뒷머리가 엉망이었다. 망설이는 베스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항상 티끌만큼의 염문에도 파르르 떠는 저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무도 없을 어둠을 틈타, 베스의 손이 데베르의 뒷머리에 닿았다. 거칠고 직설적인 남자의 성질처럼 억셀 것 같던 잿빛은, 기억 속 작은 강아지의 털처럼 부드럽기만 했다.

그 부드러움에 마음이 놓인 걸까.

어설프게 움직이던 손길이 좀 더 깊어졌다. 평소처럼 깔끔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와서 보더라도 남자를 흉보지 못할 정도는 됐다.

주머니 속엔 전하지 못한 종이가 하나 더 있었다. 손을 잡고 뛰기 전, 고마움을 모르냐며 툴툴댔던 그 마지막 얼굴이 체한 듯이 가슴에 걸렸기에.

한참을 고민하다 쓴 말은 고작 ‘고마워요’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데베르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베스는 다시 트레이를 챙겨 일어났다.

내일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다시 한번 와야지. 목숨을 걸고 살려준 사람이 뻔뻔하게 늦게 나타나면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니깐. 다짐을 하며 문을 열자, 복도의 어슴푸레한 불빛이 남자가 누운 베드 발치까지 닿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주머니에서 울렸다. 아직 주지 못한 건 쪽지만이 아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작은 물음이 올라왔지만, 아무도 모를 테니깐.

다시 다가가 꺼내든 건, 그가 준 흉터 연고였다.

데베르가 베스의 상처를 만졌듯이, 이번엔 베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매만졌다. 붕대 사이사이 깊게 팬 자국은 긴 세월을 말해줬다.

나는 벌써 아물어 가는데.

이 남자의 상처는 아물지 못할 것이다. 이미 흉터가 돼 버렸으니깐.

그래도, 그래도.

작은 연고 통이 반이나 빌 때에서야 베스는 걸음을 물렸다. 이제야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작은 발걸음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데베르는 참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는 어쩌자고….”

읊조리는 목소리가 떨렸다.

너는 어쩌자고 내게 이리 구는 걸까.

대체, 나는 너를.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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