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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22화 (22/206)

22화

베스는 그저 손만 꼼지락거렸다.

온몸으로 어색함을 얘기하는 베스와 달리, 데베르는 그저 몸에 밴 웨인의 예법대로 구는 중이었다.

카시우스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에 병적인 결벽까지 더해져, 제 아들에게 한 치의 오점도 허용치 않았다. 클리프는 강해야 하고, 누구에게도 져선 안 되며, 누구보다 월등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으니.

다들 데베르를 ‘전쟁 광증’, ‘망나니’라 수군대면서도, 막상 눈앞에선 입도 못 떼는 이유도 이 흠 잡을 데 없는 예법 때문이었다. 영애들은 오히려 이런 데베르의 양가적인 평판에 환호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이를 알지 못했다.

“잡아.”

다소 강압적인 목소리가 나갔다.

베스는 급히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갔다.

남자는 당연히 형식적인 예를 갖춘 것이겠지만, 인사치레 같은 사교 예법도 베스에겐 낯설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데베르라니.

데베르와 팔짱 끼는 걸 이 아침부터 볼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걱정은 어쩔 수 없었다.

간부용 차량에 먼저 올라탄 베스는 가만히 데베르를 기다렸다.

얼른 이 불편한 외출을 끝내면 좋으련만. 남자는 베스의 생각과 다른지 그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에 여유가 흘러넘쳤다. 일부러 그녀를 놀리나 싶을 정도로.

운전석에 탄 데베르는 시동을 걸려다 말고, 다시 베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거북스러운 침묵에 베스는 목이 탔다. 좁은 차 안에선 아까처럼 도망칠 곳도 없어 애꿎은 물빛 치맛자락만 꽉 쥐었다.

남자가 마침내 시동을 걸고, 덜덜대는 엔진 소음이 둘 사이를 채울 때에서야 베스의 긴장한 어깨가 내려갔다.

병원과 막사를 지나 숲길이 나올 때까지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적당한 소음과 풀린 긴장감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왜 가는 거야.”

베스는 기우뚱하던 고개를 얼른 곧추세웠다. 얼핏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착각이겠지.

“왜 가는 거냐고.”

금방 전까지 졸음이 어룽거리던 베스의 머릿속이 한순간에 쨍해졌다.

뭐라고 해야 하지. 편지를 안 봤다고 했으니 삼촌 얘기는 보지 못한 거겠지. 거짓말을 해야 하나. 두서없는 질문들이 마구잡이로 겹쳤다. 갑자기 차멀미도 하는지, 속도 메슥거렸다.

막사에서 마을 장터까지 가는 숲길은 넥서스군 말고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기에, 데베르는 차를 몰며 틈틈이 베스의 얼굴을 읽었다.

그 종이쪽지가 뭐라고, 와본 적도 없는 숲길을 내달려 그의 앞까지 온 여자의 흐트러진 얼굴이 눈에 선했다.

삼촌과 코펠이라. 무슨 수로 그 둘의 연관성을 밝히겠냐마는, 흔치 않게 제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기도 했다.

기어코 대답을 들을 작정으로, 데베르는 다시 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눈치챈 베스가 길게 이어진 길을 가늠했다. 아직 마을까지 갈 길이 먼데. 결국 내키지 않는 손길로 손가방을 열고 종이와 펜을 꺼냈다.

“됐어.”

갑자기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는 데베르에, 당황한 건 베스였다. 어차피 진실이 아닌 거짓말을 적어야 했기에 물음을 물리는 것은 좋았지만.

내가 그렇게 답답한가.

마음이 추라도 매달린 것처럼 한없이 밑으로 꺼졌다. 어제저녁, ‘편지’하나 적는데도 그 애를 썼으니 남자는 제 대답을 듣는 것도 귀찮을 성싶었다.

또다시 속상해지는 마음에 창밖만 보는데 갑자기 찬 기운이 확 끼쳐 들어왔다.

창문을 연 남자가 뭐라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손짓이 향한 곳은 그들의 뒤를 따르는 한 대의 군용차량이었다.

둘만 가는 건 줄 알았는데 저 사람들도 가는 거였다니.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단 생각에 베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설마 이 남자와 에스코트니, 뭐니 했던 모습도 본 것 아닐까.

“말을 못 해도 불편하진 않겠어.”

뜬금없는 말에 베스가 눈을 깜빡였다.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유난히 손글씨 하나만 못 알아봐서 그렇지, 눈치 빠른 남자는 묻지 않아도 답을 줬다.

“나를 호위할 병사가 필요해. 내 시체가 적한테 넘어가면 안 되거든.”

베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도 목소리가 건조해서 금방 들은 게 맞나 싶어질 정도였다.

“군대장의 시체가 전선에 걸려있으면 넥서스 사기가 떨어지잖아.”

그답지 않은 친절한 부연 설명에 베스의 입술이 가만히 벌어졌다.

남자의 표정은 의연했다. 늘 그렇듯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얼굴.

어떻게 사람 목숨을, 아니 제 목숨을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마치 죽는 것쯤은 상관없다는 마냥.

지독한 삶을 사는 남자란 건 알고 있었다.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랬기에 항상 소문 이면의 데베르란 남자를 베스는 자신도 모르는 새 살폈었다. 타고난 성정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비밀을 알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죽는 순간이 와도 죽는구나 하고 죽을 것 같은 남자였다. 평생을 살고 싶어 발버둥 치던 저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베스는 눈을 감았다. 괜한 소리를 들어 안 그래도 무거운 몸이 더욱 쳐졌다.

가만히 창문에 기댄 여자를 얼마간 보던 데베르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 * *

나란히 걷는 데베르와 베스 뒤로, 사복을 입은 병사 몇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어오고 있었다. 총을 숨긴 건지, 외투 속 가슴팍이 두툼했다.

도착한 곳은 넥서스 외곽의 후미진 시골 장터였다.

어떻게든 삶을 영위해 보려는 가난한 사람들은 전쟁통에도 마을을 떠나지 못했다. 전장의 포격이 아직 그들의 마을까지 오지 않았다는 안일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 오자 오히려 먹고 살 만 해졌기 때문이었다.

전장에 있는 귀족 장교들과 간간이 그들을 찾는 또 다른 귀족들은 그들에게 요긴한 밥줄이었다. 웨인까지 잔심부름하거나, 연락통이 돼주는 대가로 떨어지는 콩고물이 꽤 괜찮았다.

일전에 이곳을 한 번 와봤던 베스는 기억 속 골목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제 앞을 갑자기 막아선 검은 등판에 어안이 벙벙해 걸음을 멈췄다.

데베르의 앞에는 허리가 잔뜩 굽은 노파가 서 있었다.

“뭐지.”

그의 차가운 물음에도 노파는 주눅 들지 않고 샐쭉이 웃어 보였다. 앞니가 빠진 성성한 입속이 훤히 보였다.

“웨인에서 아리따운 부부가 오셨길래, 이걸 보여드리고자.”

노파가 도색을 한 싸구려 금줄을 내밀었다. 가운데 달린 동그란 쇠붙이를 열자, 작게 그려진 초상화가 나왔다.

“천사 같은 부인께 선물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딱 봐도 값나가는 옷을 차려입고 이곳을 돌아다니는 데베르와 베스는 마을 사람 누가 봐도 젊은 귀족 부부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의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베스를 데베르가 흘깃 쳐다봤다.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리지?”

“10분이면 됩니다요.”

거래가 성사될 듯 보이자, 더욱 굽신거리는 노파의 머리는 곧 땅에 닿을 것 같았다. 정말 사기라도 할 건지,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그를 베스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데베르는 노파에게 돈을 건넸다. 얼핏 본 노파의 그림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제법 똑같이 그려줄 것이다.

“예쁘잖아. 남겨놔.”

뭐라 할 새도 없이 노파가 코앞에서 얼굴을 뜯듯이 보는 통에, 베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데베르 혼자만 여유로운 모양새에,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져 왔다.

잠시 노파에게 발이 잡혔던 베스는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몇 개의 골목을 스쳐 지나가던 베스의 구두코가 불현듯 어느 골목 어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기억 속의 알싸한 궐련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연기를 뻐끔대는 남자는 저를 찾는 이들의 목적을 이미 안다는 양, 다가오는 베스에게 손을 먼저 내밀었다.

“심부름 값 줘야 하는 거 아시죠?”

잔뜩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베스의 행색을 훑는 남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부잣집 아가씨인 거 같은데 굳이 이 깡시골에서 심부름꾼을 쓰다니. 은밀히 뭔가를 전해야 하는 게 분명하다.

남자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요즘 일도 줄은 마당에, 제 발로 돈줄이 들어올 줄이야.

“근데 요즘 영 가는 길이 험해서. 웃돈을 주셔야겠는데.”

베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안 되면 못 가는 거고.”

남자가 수를 뒀다.

망설이는 베스의 뒤로 검게 그림자가 졌다.

“내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베스를 시답잖게 여기던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남편’이란 작자의 기세에 잇새로 욕을 짓씹었다. 건들거리며 벽에 기대서있던 몸도 어느새 꼿꼿하게 세워졌다.

“웃돈을 줘야 한다고.”

“아, 아니. 그럴 때도 있었다, 이 말이죠.”

딱 봐도 보통 귀족 놈이 아닌 게 분명했다. 잘못 걸렸다간, 돈은커녕 단단히 코가 꿰일 게 뻔하다.

“그럼 약속대로 주면 되겠군.”

“예, 나리. 흐흐”

데베르가 베스의 손에 들린 돈뭉치와 누런 쪽지를 뺏어 건넸다. 쪽지는 인사말이 찢어진 채, 주소만 있었다.

“제대로 일해서 내가 당신을 다시 찾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내 아내와 난 여기서 할 일이 많아서.”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전 이만.”

남자는 잽싸게 골목 귀퉁이로 사라졌다.

“도와준 줄 알았는데.”

무뚝뚝한 음성에 베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엄한 덤터기를 썼을 테니까.

“고마움을 모르는 건지.”

혼잣말인 듯 중얼거린 데베르가 벽 모퉁이에 누운 거지를 스쳐 지나갔다. 기민한 눈은 낡아빠진 거적과 살짝 삐져나온 손을 놓치지 않았다.

거지라기엔 지나치게 마디가 굵고, 주름이 없는 손.

“제길.”

몇 걸음 떨어진 베스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골목을 나가야 한다.

영문도 모른 채, 데베르에게 어깨를 잡힌 베스는 그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갔다. 둘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그 순간, '탕'하고, 굉음 같은 총성이 골목을 울렸다.

베스를 감싸 안은 데베르가 급히 품 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뛰어오는 호위병들의 발소리도 요란하게 들려왔다.

“뛰어.”

베스는 제 손을 꽉 쥔 데베르를 따라 정신없이 골목을 돌고 돌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총소리와 남자들의 욕설, 마을 사람들의 비명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언제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 나왔는지, 눈앞에 보이는 건 처음 들어왔던 장터 입구였다.

“차에 타!”

데베르는 베스를 차 쪽으로 밀쳐내고, 자신은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호위병들이 군대장의 주위로 달려왔다. 등을 보인 채, 차로 달려가는 베스를 보호해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데베르는 무너진 궤짝 더미 뒤에서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데베르가 안되면 저 여자라도 잡아!!”

데베르의 생포가 어렵다고 판단한 적군의 충동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데베르의 눈이 베스에게로 갔다. 진즉 차에 탔어야 할 여자는 여전히 차 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제기랄.”

골목에서 심부름꾼을 만날 때, 차를 손댄 게 분명했다.

저 멀리서 베스를 향해 총을 겨누는 코바흐 병사가 보였다.

“대장님!!”

베스는 숨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무게감이 어깨를 눌렀다.

저를 감싸 안은 남자의 품 안에서, 악착스럽게 귓전을 때리던 총성이 먹먹하게 들려왔다.

안돼.

끈적한 액체가 남자의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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