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푸르스름한 여명이 베스의 침대맡을 기어들어 왔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 베스의 눈 밑은 새벽빛보다 짙은 피로감이 역력했다. 행여 나이트 근무를 하고 온 이들이 깰세라 살금살금 움직이는 베스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사실 준비라 해봤자 별거 없었다.
노상 입는 낡은 간호복 대신, 그만큼이나 낡은 원피스에 칙칙한 밤색 코트를 걸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깔끔한 주인의 성정 덕분에 옷은 해지긴 했어도 깨끗했고, 은은한 비누 향도 함께 풍겼다.
“으음, 베스……. 어디 가?”
옆 침대를 쓰는 딕시가 눈을 비비며 물어왔다. 베스는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손에 닿는 곳에 있는 노트를 펼쳤다.
[미안. 아침에 외출할 일이 있어서.]
“외출? 혼자서?”
데베르 공작과의 동행을 말해도 되는 걸까.
눈치 빠른 딕시는 찰나의 베스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지던 눈이 별안간 가늘어졌다.
“뭐야, 수상해.”
베스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괜한 거짓말로 엄한 추측을 살 바엔, 차라리 사실을 고하는 게 낫단 생각이 스쳤다. 딕시라면 자신과 데베르 공작 사이를 오해하지는 않을 테니까.
[데베르 공작님하고 가. 부인께서 부탁하셨어.]
“뭐? 데베르?!”
안타깝게도 베스는 아직 제 친구를 잘 몰랐다. 딕시는 언제 잠이 왔었냐는 양, 벌떡 일어나 앉았다.
데베르 공작과의 외출이라니. 아주 가끔 부인은 간호사들에게 콧바람이라도 쐬라고 외출을 허락해 줬지만, 그게 언제였던가. 전선의 상황이 나빠질수록, 그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주홍빛 눈동자에 떠오른 이상스러운 총기에, 베스가 얼른 펜을 휘갈겼다.
[일이야!]
딕시는 노트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당장 제 침대 밑 바구니를 꺼냈다. 이유 따위야 뭐든 중요치 않았다. 오랜만에 재밌는 일이 생긴 참인데, 놓칠 생각이 있을 리가.
“데이트네, 데이트야.”
콧노래를 흥얼대며 옷을 꺼내 살피는 딕시에게 아무리 노트를 들이밀어도, 그녀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알겠어. 일이야. 일이라고 칠게.”
허름한 침대와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옷들이 줄줄이 나왔다.
아이네스는 언젠가 딕시의 짐을 보고 ‘대체 이걸 왜 가져 왔냐’라며 핀잔을 준 적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딕시는 ‘위스키보다 심신을 평안하게 해준다’라며 야무지게 대꾸했더랬다.
“그 옷 당장 벗어.”
바로 이런 날을 위해서지. 딕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하얀 실크 원피스를 건넸다. 가슴팍에 레이스 자수가 놓친 하얀 실크 원피스는 척 보기에도 베스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쭈뼛거리던 베스는 딕시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었다.
지나치게 부드러운 옷감이 어색했다.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실루엣이 민망하기도 했고.
“음, 네가 너무 하얘서 창백해 보이는데? 이걸 입어 봐.”
이번엔 검은색 벨벳 원피스가 내밀어졌다. 소매와 칼라 끝에 자잘한 은빛 보석이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었다. 이건 진짜 보석일까 하는 싱거운 생각이 스쳤지만, 웨인의 떠오르는 부호인 딕시의 집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생전 입어 본 적 없는 옷들에, 베스는 자꾸만 온몸을 꼼지락거렸다.
“역시! 내가 정말 비싸게 주고 산 건데, 너한테 딱이다.”
얼핏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본 베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무릎 밑까지 오는 원피스는 음전한 색깔과는 달리, 몸의 굴곡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금방 입은 흰 원피스보다 몸에 붙는 것 같다 싶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 입은 옷에 비하면 실크 원피스는 수녀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베스는 재빨리 원피스의 단추를 풀었다. 어떻게 이런 걸 입고 그 남자를 만난단 말이야.
반면, 딕시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번졌다.
“정말 예쁜데. 그래, 네겐 무리일 수 있지. 그럼….”
남루한 간호 숙소는 어느새 웨인의 부티크가 돼가는 중이었다.
딕시가 이리저리 옷더미를 뒤져댔다.
“이거! 너한테 딱 맞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내민 옷은 베스의 간호복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진한 하늘빛을 띠고 있었다. 단정하게 목 아래까지 채워진 진주 단추가 베스의 투명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세상에. 다른 것들은 이걸 위한 잔챙이들이었어.”
딕시가 장난스레 소리 없이 손뼉을 쳤다.
“주인을 이제야 찾았네. 너 가져.”
그 말에 놀란 베스가 황급하게 단추를 풀었다. 그 모습에 딕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타이르듯이 제 손으로 단추를 다시 채워나갔다.
“난 이런 얌전한 옷 싫어해. 우리 친구 아니야? 말만 친구였던 거야? 친구끼리 이런 것도 못 준다고?”
딕시는 일부러 잔뜩 울상을 지었다. 제 친구가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약해지는지를 너무 잘 알아서 하는 귀여운 영악이었다.
고민하는 베스의 표정을 본 딕시는,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설마, 이 옷 위에 저 죽은 떡갈나무 같은 코트를 입지는 않겠지.”
순식간에 죽은 떡갈나무가 돼버린 코트를 뺏어가더니, 대신 감색 케이프 코트를 내밀었다. 얼마 전, 라프넬이 입고 온 코트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싸가지 공주도 이걸 입고 왔더라고. 일 년 전에 산 건데 아직도 유행 중인가 봐. 역시 내 안목이란.”
베스의 시커먼 머리핀을 빼내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어깨 위로 물결쳤다. 베스도 이젠 고집을 포기하고 친구에게 몸을 내맡겼다.
머리를 단장하느라 바쁜 딕시와 달리, 베스는 놀고 있는 제 손을 바라봤다.
가끔, 말하지 못하는 제 모습에 무력감을 느낄 때가 오곤 했는데, 그게 바로 어제저녁이었다.
낯선 막사 한가운데에서 어둠은 내려오고, 사방은 분간 가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그 순간. 차라리 소리라도 지를 수 있었다면.
잔뜩 손톱에 힘을 줘 반대편 손바닥을 긁었다. 그 작은 악력에 잠시 하얗게 질렸던 손바닥은 이내 평소처럼 돌아왔다.
공작의 거친 손 위에서 아무리 거듭해 글씨를 적어도, 여린 손가락은 그 어떤 자국도 내지 못했다. 마치 지금처럼.
위태로운 마음 따위는 알지 못하는 무심한 얼굴이, 이해 못 하겠다는 그 눈빛이 얼마나 미웠는지 그 남자는 알기나 할까.
그 순간 눈물이 비져나올 뻔한 게,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그의 독한 시가 연기 때문인지는 오늘에 와서도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딕시는 그새 머리를 다 만지고, 베스의 작은 입술에 연한 빛깔의 화장품을 발라 생기를 더했다.
전장 병원에서 뭘 이리 꾸미나 싶을 수도 있었지만, 딕시가 간호학교 시절부터 봐온 베스는 늘 수수함을 넘어 남루하게 다녔었다. 일부러 옷이나 구두, 장신구도 선물해 봤지만, 이 지독할 정도로 반듯한 아가씨는 늘 딕시의 기숙사 방 한쪽에 그것들을 두고 가곤 했다. 어딘지 항상 힘들어 보이는 베스를 도울 수 없다는 게 늘 못마땅했던 차였다.
딕시는 흐뭇한 마음을 가득 담아, 베스의 앞으로 거울을 내밀었다.
베스는 초겨울 피어난 백합처럼 화사했다.
“내가 데베르 공작이면, 오늘 너한테 청혼했다.”
데베르와 청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에, 베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초선으로 온 이후, 웃을 일 없던 얼굴에 오랜만에 떠오른 웃음이었다.
그 시각, 데베르는 진즉에 간호 숙소 앞에 와 베스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도, 그제 밤도 서 있던 그 창문 밑. 그 자리에서.
벌써 일어났는지, 창문은 데베르가 도착할 때부터 반쯤 열려 있었다. 이르게 온 탓에 데베르는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을 못 잔 눈두덩이가 뻐근했다.
여자의 눈을 속이고 안정제를 훔쳤기에 평소대로 먹어도 양은 충분했다. 늘 그래왔듯이 술과 함께 넘겨버리면 그만이었다. 속였다는 죄책감 따위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런데도 왠지, 하루쯤은 그 말을 지키는 건 어떨까 싶었다.
‘약을 끊고 싶어.’
제가 해놓고도 조소를 감출 수 없었던 그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열린 창틈으로 뭐라 재잘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베스의 것일 리 없었다.
그 여자는 어떻게 웃을까. 말을 못 하니 웃는 소리도 없으려나.
무료한 데베르의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물음이 떠올랐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찾을 수나 있을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끽소리 하나 낼 수 없는 여자니깐.
작정하고 어디론가 숨는다면.
만약, 사라진다면.
한 번 피어오른 물음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라진다면. 마지막 물음을 곱씹었다.
전장 병원은 약혼자와 고행을 함께하겠다는 아이네스처럼 대단한 의지가 있지 않은 한, 자주 사람이 바뀌었다. 그나마 몰리 부인과 함께 온 이들은 꽤 오래 붙어 있는 편이었다.
사실 베스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치 않았다. 재수 없는 일까지 많이 겪었으니 어느 날 아침, 짐을 싸 웨인으로 줄행랑을 쳤다 해도 다들 이해해줄지도 모른다.
“헉! 공작님 오셨어!”
얇은 문 너머로 그토록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계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데베르의 머릿속을 헤집던 물음의 주인공이 얼굴을 내밀었다. 얼굴만 내놓은 채 나올 생각이 없는 주인공을 누군가 뒤에서 밀었는지, 베스는 내닫듯이 데베르의 앞으로 튕겨 나왔다.
데베르의 시선이 천천히 베스를 내리훑었다.
보통의 남자들이 여자의 세밀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속설은 그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관찰하고, 기억하고, 찾아내는 게 평생의 업 같은 제국군의 대장은 귀신같이 베스의 변화를 알아챘다.
평소와 달리, 가슴께까지 푼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적당히 구불구불한 모양이 군살 없는 여자를 더 돋보이게 했다. 수술실 베드에 누워있을 때처럼 시뻘건 피가 아닌, 적당한 온기를 머금은 입술 또한 눈에 들어왔다.
맹수가 사냥감을 핥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데베르에, 베스는 괜한 손끝만 괴롭혔다.
함께 차를 타고 반 시간쯤 가면 나오는 작은 시골 마을로 갈 예정이었다. 아직까진 공격받지 않은 곳이긴 해도,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그곳을 갈 땐 제복과 간호복을 벗는 것도 그 이유였다. 철저히 민간인인 척하는 게 목숨 부지에 더 용이하니까.
그래서인지 데베르도 칼 같은 제복이 아닌, 웨인 귀족 남자들이 자주 입는 각이 진 가죽 코트를 입고, 군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있었다.
지금만큼은 데베르 대장이 아닌 완벽한 데베르 공작이었다.
누구든 저 모습을 보면 클리프 가문인 줄 모르더라도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군인이 아닌 그는 또 다른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남자가 적당히 굽힌 팔을 내밀었다.
의문을 가득 담은 베스의 말간 눈이 그에게 닿았다.
“에스코트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죠.”
‘데이트 잘하고 와.’
딕시가 문 뒤에서 속삭인 소리가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