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20화 (20/206)

20화

“베스!”

아이네스의 새된 비명이 평화롭던 병실 분위기를 단번에 찢었다.

“세상에.”

데베르와 뭔가를 얘기하느라 여념이 없던 몰리 부인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부인의 발이 채 한걸음 떨어지기도 전, 데베르의 몸이 먼저 돌려졌다.

순식간에 쓰러진 베스를 품에 안아 든 데베르의 시선이 부인에게로 향했다.

“저, 저기 수술실로.”

부인의 떨리는 손끝이 허름한 복도 끝을 가리켰다.

늘어진 여체의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복도를 내달린 데베르가 수술실을 박차고 들어갔다. 냉기 가득한 베드 위로 베스가 반듯하게 눕혀졌다.

벌써 두 번째다. 이 여자의 눈 감은 얼굴을 보는 건.

이번엔 또 왜.

쓰러지면서 바닥에 부딪혔는지, 작은 입술에 피가 방울져 있었다. 핏기라곤 없는 얼굴에 지나치게 붉은 입술은 여자를 더욱 창백해 보이게 했다.

데베르의 엄지손가락이 조심스레 그 입술에 닿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곧 들이닥친 인파에 자연스레 손을 물렸다. 그러나 입술의 선혈은 그의 손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훔쳐진 뒤였다.

모두가 요란스레 베스의 상태를 살필 때, 아무 일도 없는 척 한걸음 뒤로 물러서 있던 데베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어진 손. 그리고 그 안의 무언가.

베드 옆에 선 데베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갑게 식은 여자의 작은 손을 달래듯이 잡았다. 베스는 그토록 지키고자 한 비밀이 어떤 남자의 손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고, 끔찍한 악몽을 헤매는 중이었다.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냥, 편지를 주던 중이었는데.”

편지라. 데베르는 이미 주머니에 넣은 거칠한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일단 깨어나면 다시 한번 체크를 해야겠습니다. 지금으로선 영 뭐 때문인지….”

이리저리 청진기를 대보던 의사가 제 소견을 말했다.

부인은 동의한단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며, 식은땀을 흘리는 베스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더 완강히 말렸어야 했는데. 때늦은 자책감이 부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난리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용케 일한다 싶었더랬다. 그래도 베스니깐. 여리지만 강한 아이니 견뎌내겠지 했던 무책임한 판단들이 지금에서야 이토록 후회될 줄이야.

“일단 좀 재워야겠어. 며칠째 잠도 못 잤으니.”

부인은 허물어진 표정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데베르 대장, 베스를 숙소까지 데려다줄 수 있겠어요?”

병원에 빈방이라곤 격리실이 유일하다. 베스를 그곳에 또다시 눕히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무리한 부탁을 하게 만들었다.

“폐란 건 알지만-”

“알겠습니다.”

데베르는 제복 재킷을 벗었다. 여전히 감은 눈을 뜰 생각이 없는 여자의 몸을 대충 덮은 뒤 안아 들자, 동그란 머리통이 가슴팍에 기대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아이네스, 숙소 가는 길을 안내해드리렴.”

“숙소는 압니다. 방이 어딘지만 말씀해 주시죠.”

“앗, 이층 왼쪽 끝 창가 바로 밑이 베스 자리에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베르의 발걸음은 주저 없이 밖으로 향했다. 제법 에일듯한 바람이 불어와, 여자를 끌어안은 팔을 더 제 품 속으로 끌어당겼다.

어젯밤, 함께 걷던 길이다.

같은 길을, 같은 이와 걷고 있지만. 글쎄, 그 기분은 어제와 달리 유쾌하지 않았다. 품 안에서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숨결은, 행여 바람이라도 한번 세게 불면 그대로 꺼질 것만 같았다.

낡은 숙소 문은 몇 번 어깨를 부딪치자 맥없이 열렸다. 이딴 것도 문이라고. 왈칵 치밀어오르는 역정과 달리, 데베르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신중했다.

좁은 방 안 허름한 침대 위에 눕힐 때까지도 베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잔뜩 찌푸려진 눈썹을 보니, 꽤 험한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병실을 들어섰을 때부터 베스를 진즉에 알아봤었다. 어딜 가든 빛바랜 하늘색은 그의 눈에 띄었다. 시선 끝은 갈고리라도 달린 것처럼 이 여자를 눈앞에 들이밀었으니까.

데베르의 손가락에 낡은 쪽지가 걸쳐졌다.

「베스, 삼촌이다.」

삼촌이라. 베스와 가족. 꽤 잘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코펠 432-19」

고향이 코펠이란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데베르는 실소를 내뱉었다. 저 여자에 대해 애초에 아는 게 뭐 있다고.

종이를 앞뒤로 봤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이게 뭐라고 기절까지 하다니.

그를 피해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의 말처럼 편지 때문이 아니라, 격리실에서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쓰러진 것일지도 모른다.

“헉, 헉. 공작님.”

짐을 챙겨 든 아이네스가 숨을 고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가보셔도 돼요.”

아이네스는 침대 곁으로 허름한 나무 의자 하나를 끌고 왔다.

“저……. 공작님. 여긴 제가 지킬게요.”

자신이 왔는데도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데베르에, 아이네스가 조심히 말을 덧붙였다.

“예. 그럼.”

데베르는 뭐라도 붙은 마냥 늘어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뗐다.

베스를 안고 올라올 때부터 거슬렸던 삐걱대는 계단 소리가 그렇게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없었다.

* * *

“베스, 정신이 들어?”

아이네스는 읽던 책을 급하게 덮고, 얼른 베스를 부축했다.

“네가 편지를 보자마자 기절하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울렁이는 베스의 시야 사이로 울상이 된 제 친구의 얼굴이 들어왔다. ‘편지’란 소리가 웅웅대며 귓가에 한 박자 느리게 들려왔다.

머리를 짚고 있던 베스의 손이 급하게 제 몸을 훑었다.

“왜, 뭐 찾아?”

성마른 손길이 침대, 베개 밑, 협탁을 거칠게 쓸었다. 단정히 올려져 있던 노트와 펜이 바닥을 뒹굴었지만, 그런 걸 챙길 여유도 없는지 베스는 제 손바닥 위에 손톱을 아프게 긁어내렸다.

[편지]

손바닥 위 글자를 바로 알아본 아이네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편지? 어? 그게 어디 갔더라.”

갑자기 친구가 쓰러지는 것에 놀라, 편지는 챙길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게 바닥에 떨어졌었던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봐도 정확히 기억나는 건 없었다.

베스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가 봤으면 어쩌지.

쿵쿵대는 박동 소리는 목구멍까지 올라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데베르 공작님이 챙기셨나? 널 여기로 데려오셨거든.”

아이네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스가 튕기듯이 침대를 뛰쳐나갔다. 저 마른 몸속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건지 아이네스가 잡을 새도 없었다.

급히 베스를 쫓아 나왔지만, 그녀는 이미 저만치 병원 반대편 막사 쪽으로 뛰어가는 중이었다.

“베스! 난 병원에 가서 찾아볼게! 얼른 돌아와야 해!”

베스는 스치는 칼 같은 바람이 차가운지도 몰랐다. 뭐에 홀린 듯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잘도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적당히 다듬어진 숲길을 지나자 익숙한 군복이 보였다. 갑자기 진영을 향해 달려오는 여자에 병사들의 시선이 꽂혔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는 하늘은 베스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다들 멀찍이서 베스를 힐끔거리며 보기만 할 뿐, 군대장의 위치를 물을 사람이 없었다.

그 남자가 여기 있긴 한 걸까.

내쉬는 숨이 불안하게 떨렸다.

“베스……. 간호사님?”

귀에 익은 음성에 퍼뜩 뒤를 돌았다.

아더가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각진 군모 밑의 푸른 눈동자는 엄한 곳에 나타난 간호사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여긴 어떻게.”

베스는 얼른 제 손바닥을 들었다. 행여 어둠에 보이지 않을세라 악력을 가득 실은 손가락이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순간이었다.

아더의 어깨너머 멀리, 자신을 지켜보는 날 선 잿빛 눈동자.

그 사람이다.

항상 어둠이 졌을 때 그를 봐왔기 때문일까.

짙은 어둠이 내려올수록, 그는 더욱 잘 보였다.

아더는 어딘가에 시선이 고정된 채,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베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시선의 끝이 제 친구라는 걸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뿌연 시가 연기 사이로, 데베르는 여자가 걸어오는 걸 응시했다. 죽은 듯이 쓰러진 게 얼마나 됐다고, 여자는 엉망인 몰골로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여전히 해쓱한 얼굴이긴 했지만, 시체 같던 아까 전 꼴보다는 훨씬 나았다.

시가를 문 채 비스듬한 시선을 던지는 남자에게, 베스는 손을 내밀었다.

“뭘?”

여자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더 절박하고, 더 화가 난 듯한 얼굴.

[편지]

여린 손바닥 위로 적혀지는 손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두워서 안 보여.”

이렇게 하는 건.

씩씩거리던 베스가 시가를 쥐지 않은 그의 나머지 손을 잡았다.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넥서스 여인으로서의 몸가짐 따위는 내다 버린 양 대범한 행동이었다.

굳은살 박인 그의 손바닥 위로 하얀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편지]

베스가 남자를 올려다 봤다. 이젠 알아보겠지.

그러나 남자는 영, 감이 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평소엔 그토록 예민하고, 눈치가 빠르더니. 답답한 마음에 반복해서 같은 글자를 써나갔다.

아더는 멀리서 데베르의 손바닥 위로 계속해서 뭔가를 그려대는 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보고 있어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 이건가.”

‘편지’만 얼추 다섯 번 정도 적었을 때에서야, 데베르는 여자가 그토록 원하는 걸 내밀었다. 곧장 편지를 낚아챈 베스는 잠깐 남자의 얼굴을 올려봤다.

“안 봤어.”

그리고 남자는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편지를 찾았으니, 이젠 더 늦기 전에 몰리 부인에게 외출을 허가받아야 한다. 베스의 지친 발걸음이 걸어온 길을 되밟았다.

그 사이, 벌써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은 전초선의 이른 겨울을 알렸다.

올 때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잔뜩 가라앉은 어깨를 하고 걸어가는 베스의 위로 외투가 걸쳐졌다.

“병원까지만 입어. 가는 길엔 아무도 없어.”

모든 게 힘들다. 편지 속 내용도. 와본 적도 없는 막사를 뛰어오게 한 저 남자도.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도,

제 옆을 따라 걷는 데베르에게 왜 따라오는 거냐고, 제발 가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또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고작 ‘편지’하나 적는 데도 그리 오래 걸렸는데.

베스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부지런히 움직여 볼 뿐이었다.

몰리 부인은 제 앞에 나타난 의외의 인물 둘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둘이, 무슨 일로….”

베스는 의미 없는 동행을 설명할 기운도 없어, 그저 누런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든 부인의 얼굴이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도 견뎌낸 이 아이를 쓰러지게 한 게 뭐였는지.

“그래, 외출 얘기겠구나. 알다시피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혼자 장터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해.”

전쟁통 속, 베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군인이 누가 있을까.

부인의 머릿속에 두 얼굴이 스쳤다. 그리고 불과 어제 아침, 아더와 라프넬이 만들어낸 작은 소동을 떠올렸다. 추문이니 뭐니 해서 부인의 속을 뒤집어 놨던 그 작은 소란을.

아더가 탐탁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행여나, 혹시라도 베스와….

그렇다면, 결국 남은 인물을 한 명이다.

“데베르, 내일 아침 베스와 동행해 주겠니.”

* * *

막사에서 병원까지, 그리고 병원에서 숙소 앞까지 가는 동안 데베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상념에 빠진 여자는 옆에 누가 있는지도 잊은 듯 보였다.

“베스.”

문을 닫으려던 여자의 텅 빈 눈이 그제야 데베르를 향했다.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내일 아침. 베스는 시간을 곱씹으며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데베르는 닫힌 문 앞에서 곧장 떠나지 않고, 어젯밤 보았던 시커멓고 작은 창문 하나를 올려다 봤다. 이내 노란 불이 밝혀질 그 창문을.

이젠 확실히 어른거리는 저 그림자의 주인이 베스라는 것을 안다.

그 불빛 아래, 손을 펼쳤다. 생채기와 흉터가 가득한 그곳엔, 여자가 적은 글씨는 흔적도 없었다.

데베르는 불이 꺼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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