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7화 (17/206)

17화

다들 저를 보면 기함을 하는 통에, 베스는 종일 병사들을 대할 일 없는 서류 업무와 간단한 잡무만을 빙빙 도는 중이었다. 제아무리 괜찮다 고집을 피워도 소용없었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쳐서라도 일할 요량으로 병실에 갔을 땐, 딕시가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통에 들어온 발걸음 그대로 물러나야 했다.

홀로 약제실에 앉아 있는 베스의 머리 위로 전등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치직거리는 소리에 위를 올려보던 베스는 뻐근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미세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목의 상처가 욱신댔다.

고작 총알에 스친 것뿐인데도 이토록 아픈데, 누워있는 병사들은 얼마나 더 아플까.

쓰려오는 마음에 고개를 도리질했다. 졸음을 깨우려 양 볼을 가볍게 치는 소리가, 찌지직거리는 전구 소리와 맞물렸다.

다시 작성하던 처방전에 집중하려는데, 지직거리며 전기 튀는 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이내 사위가 캄캄해졌다.

넥서스 외곽에 있는 전장 병원은 전기가 자주 끊겼다. 근방 국가 중 가장 선진화된 넥서스였지만, 커다란 제국 곳곳까지 전기가 모두 닿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다.

가장 유행하는 것이 취향이고, 신식인 것이 생활 방식이던 귀족 여식들이 전장 병원을 견디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갈 만했다.

하지만 베스에게 이쯤이야.

툭하면 배를 곯고, 한겨울이면 난방도 되지 않는 골방에서 덜덜 떨고, 열에 들떠 밤을 지새우기도 했는데.

익숙하게 테이블 한편의 석유램프에 불을 켜자, 곧 은은한 불빛이 동그랗게 베스를 감쌌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한 기운이었다. 후방에서 기습을 피해 달아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쉴 수 있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한 창밖으론 오늘따라 풀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흔치 않은 고요함에 녹진한 잠기운이 밀려왔다.

그림자 진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 깜빡 시야를 어지럽혔다. 잠시만 엎드릴까. 잠깐만 눈을 붙이면 이내 쌩쌩해질 것 같았다.

베스의 고개가 창문을 마주 보고 기울어질 때였다.

“!”

소스라치게 놀란 베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램프가 엎어져 사위가 또다시 지독한 어둠에 잠겼다.

심장이 쿵쿵대며 뛰기 시작했다.

얕은 잠에 빠지기 직전, 새카만 거울처럼 약제실을 비추던 창문에서 조금 전까지 보지 못한 남자의 인영을 발견했다.

탁.

열린 문가가 누군가에 의해 닫혔다.

미처 잊지 못한 새벽의 공포가 다시금 덮쳐왔다. 누구지, 또 적군이 있었나. 주체할 수 없이 할딱이는 베스의 숨소리가 낯선 이와 그녀 사이를 채웠다.

불빛이라도 있어야 어떻게든 도망칠 텐데. 문을 닫은 남자는 그저 침묵을 지킨 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베스의 손이 더듬더듬 제 등 뒤의 선반을 훑기 시작했다. 행여 남자가 덤비기라도 할세라, 뒤를 돌 수도 없었다. 그 사이, 손은 계속해서 선반 위 성냥 근처를 헛돌고 있었다.

들어본 적 있는 지포 라이터 긁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찾아.”

라이터 불빛에 일렁이는 잿빛 눈동자가 선명했다.

어둠 속 인영이 데베르란 걸 안 순간, 긴장이 풀린 베스의 다리가 휘청였다. 데베르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금세 코앞까지 온 남자는 한 팔로도 충분히 베스를 안아 일으켰다.

바깥에 있다 왔는지 남자에게선 찬 기운이 묻어났다.

베스는 안겨진 몸을 서둘러 빼냈다. 허둥대며 물러나는 베스와 달리, 데베르는 느긋하게 쓰러진 램프를 세우고 불을 붙였다.

“자려던 거 아니었어?”

베스는 얼른 의자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민망함에 자꾸만 속이 탔다.

“조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지.”

빈 의자에 장신의 몸을 여유롭게 기대는 남자의 모습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베스는 펜을 꽉 쥐었다. 또 무슨 소리가 하고 싶어서 온 걸까.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작과는 그 어떤 얘기도, 사건도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데베르는 그를 무시하겠다는 티를 팍팍 내며, 늘어놓은 약에만 고개를 처박은 여자를 유심히 지켜봤다.

뭐가 그리 화가 나서. 심지어 오늘은 공주의 덫에서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내가 구해준 게 고맙지는 않은가.”

바삐 움직이던 여자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것도 못 들은 양,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데베르의 손이 느리게 제 턱을 쓸었다.

“왜 화가 났는데.”

꽤 다정한 목소리였다.

일광이 사물의 모든 것을 비추는 때면, 데베르는 그 아래에서 한 치의 오점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공작이자 군대장이었다.

하지만 적당히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이 되면, 남자는 낮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적어도 베스에게 있어선.

유독 이 남자를 밤에 만나는 일이 잦아서 하게 되는 착각일까.

흔들리는 램프 불빛에 음영 진 남자의 눈매는 평소보다 깊어 보였다.

베스는 빈 종이의 한 귀퉁이를 찢어 뭔가를 쓰더니, 테이블 가운데로 내밀었다.

[말 X]

데베르는 탄식 같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가히 건방진 명령이었다. 아침처럼 꺼지라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려나. 가만히 종이를 한번, 여자를 한번 번갈아 봤다.

여자는 다시 빌어먹을 약을 배분하는 데 몰두한 모습이었다.

데베르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템포였다. 데베르는 꽤 참을성이 좋은 편이었다. 기어코 베스가 그를 다시 쏘아볼 때까지 그 손짓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간호사님을 찾아왔는데, 진료를 안 봐주셔서. 내 전담 간호사시잖아. 아닌가?”

고집스러운 남자다. 베스의 데베르를 향한 정의는 그랬다.

[무슨 일이신데요.]

데베르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이 정도면 아까 전의 ‘말 X’보다 나아졌다고 좋아해야 할지도 모른다.

“약을 너무 조금 주셔서요.”

베스의 머리 위로 잠시 잊고 있던 지긋지긋한 남자의 약 타령이 다시금 떠올랐다. 혼자만의 시간을 훼방 놓은 방해꾼이었지만,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베스는 얼른 목걸이를 빼 내밀었다. 원치 않는 방문을 한 그가 고맙기까지 한 심정이었다.

속 시원하단 듯이 열쇠를 채갈 줄 알았던 남자는 예상과 달리 가만히 목걸이를 보고만 있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지만, 원래도 표정이 많지 않은 남자에게서 단서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베스는 얼른 가져가라는 듯 손을 작게 흔들었다. 그러자 가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럽게 목걸이가 걸쳐졌다.

“원래 의료진 외 출입 금지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랬기에 감히 제국의 공작이자 군대장의 목걸이를 호기롭게 뺏은 것이었고.

베스는 황급히 목걸이의 열쇠를 빼냈다. 피로 얼룩진 낡은 열쇠가 사라지니, 그토록 값비싸다던 목걸이가 그제야 제 모습을 찾은 것처럼 반짝였다.

이번엔 열쇠 없는 목걸이를 내밀었다. 공작과 자신 사이를 잇는 저 얇은 줄이 곧 사라진단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하지만 남자는 이번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양손을 깍지 낀 채, 요지부동이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베스도 한껏 뻗은 팔이 무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베스가 펜을 다시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마침내 데베르는 입을 열었다.

“몰리 부인이 내가 약을 줄일 필요가 있다더군.”

거짓말.

“당신이라면 책임감 있게 도와줄 거라고 하던데.”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담담하게 이어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데베르의 기다란 그림자가 베스에게로 기울어졌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목걸이를 건네받고는 탁자 위에 놓인 열쇠까지 손에 넣었다.

그의 손에 잡힌 빛바랜 열쇠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목걸이의 정중앙으로 흘러갔다.

“내가 굉장히 아끼는 목걸이야.”

거짓말에 거짓말.

“내가 약을 끊는 날, 받아 갈게. 말하자면 일종의 담보물이랄까.”

데베르의 눈빛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약을 끊고 싶어.”

조금은 쓸쓸한 목소리가 정말 약을 끊고 싶은 불쌍한 놈 같았다.

정신 나간 놈.

스스로를 조소했다. 약을 끊을 생각 따위는 과거에도, 지금도 한 적이 없다.

데베르는 내리깐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저인데, 정작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 여자였다.

그래, 저 순진하게 흔들리는 얼굴을 다시 못 보는 건 좀 아쉬울지도 모르지.

그래서 한 짓이다.

“물론 당장은 못 끊어. 오늘도 받아 가야 해.”

베스는 데베르를 처음 약품 창고에서 마주친 날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남자가 처음 가져가려 했던 약통보다 훨씬 작은 통을 주긴 했지만, 벌써 그 약을 다 먹었다니. 그렇다면 부인이 남자에게 했단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깨지지 않을 것 같던 데베르의 약한 말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베스에게 파급력이 있었다. 정작 데베르는 자신이 베스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는지 몰랐지만.

고민하던 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램프를 챙겼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함께 약품 창고로 가잔 것이었다.

한 걸음 앞서가는 여자의 뒤통수를 보던 데베르가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기에.

똑똑한 체하더니 거짓말을 분별할 만큼 약은 구석은 없었나 보다. 아니면 제가 연기에 능하거나.

병원 정문을 열려던 베스가 갑자기 휙 데베르를 돌아봤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 남자가 제 곁에서 웃을 일이 뭐 있을까. 베스는 다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문을 염과 동시에 잔뜩 얼어붙은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베스의 어깨가 잔뜩 옹송그려졌다. 손에 들린 작은 램프의 미약한 불빛마저도 난로처럼 느껴질 정도로 밖은 찼다.

그런 베스의 위로 두툼한 남성용 재킷이 걸쳐졌다. 데베르의 체온이 묻어나 옷 안감이 따뜻했다.

데베르는 베스의 손에 들린 램프를 뺏어 들고 앞장섰다. 베스는 멍하니 서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데베르는 갔던 걸음을 다시 돌려 베스에게로 다가왔다. 여자는 옷을 걸친 게 아니라 옷에 파묻힌 모습이었다.

“왜. 아더 것도 입었잖아. 신사의 도리지. 숙녀를 춥게 둘 수 없는 건.”

장난 같은 말이었다.

“가자, 얼른.”

고개를 창고 쪽으로 까딱인 데베르가 다시 걸어갔다.

베스의 눈이 초겨울, 셔츠 차림으로 이 밤을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고정됐다. 뒷모습을 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이윽고 베스의 걸음 또한 데베르가 밟은 길을 따라 밟기 시작했다.

앞서 걷는 데베르의 뒤로, 그의 넓은 보폭에 맞춰 걷느라 종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

그의 입꼬리가 숨김없이 올라갔다.

숨길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늘, 꽤 괜찮은 거짓말을 했다.

데베르는 확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