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가까이 오렴. 정말 널 어쩌면 좋니.”
부인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베스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부모님께 혼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저럴까. 병실에서의 기백은 어디 가고, 쭈뼛거리는 베스의 모습에 데베르는 실소를 삼켰다.
“군복? 아니, 이건.”
가방을 열던 부인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군복 가슴팍에 달린 금 브로치가 그 원인이었다.
넥서스 제국 문양의 금 브로치를 달 수 있는 군인은 오직 둘 뿐이다.
데베르, 그리고.
“아, 이거 나라는 걸 바로 들켜버렸네.”
“아니, 아더 네가 왜.”
부인은 놀란 나머지, 호칭도 잊은 채 어릴 적처럼 아더의 이름을 불렀다. 아더는 그런 부인을 향해 빙긋 웃으며 자연스레 건네받은 제복을 제 몸에 끼워 넣었다. 능청스럽게 베스에게 눈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보는 건 라프넬만이 아니었다.
“데베르, 적군도 그렇게 살벌하게 보지는 않겠어.”
장난스런 농도, 그들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깨진 못했다. 고작 이따위 옷 하나 가지고 난리들은. 아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전장까지 나와 헛짓이나 할 인물로 보이시나 봅니다.”
“그럴 리가요.”
멍청한 새끼. 속마음과 다른 부드러운 대답이 라프넬의 혀를 간지럽혔다.
지금은 웨인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배웅하는 자리였다. 저 하찮은 불청객이 오기 전까진 말이다.
대체 저 계집애 하나가 뭐라고 다들 안달복달인 건지. 낡아빠진 가방에서 나왔다기엔 군복의 주인이 지나치게 황송한 상황이었다.
“제가 간호사님의 탈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아더는 예의 그 미소를 되찾고선 말을 이었다.
“어찌나 은밀히 가시는지 겉옷도 없이 숨어 가시더라고요. 신사로써 호의를 베푼 것뿐입니다. 딱, 그뿐이에요. 다들 오해 마시길.”
부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더의 말을 곱씹었다. 누구에게든 친절한 아더다. 그건 누구보다 부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저 선의일 것이다. 상대가 누구였어도 그렇게 했을 테지. 피어오르는 불안을 잠재우려 부인은 계속해서 선의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사랑이야, 중년의 부인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변하더라도 넥서스의 계급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계급이 사라진 곳엔, 또 다른 지배자들의 논리가 계급을 대신해 자리 잡겠지. 이는, 평민과 귀족을 함께 교육하는 웨인 간호학교를 설립한 부인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세상 속에서 베스가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는지, 부인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랬기에 이런 일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딸처럼 아끼는 아이기에,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은 짐마차 속에 숨어 떨던 어린 베스를 본 날부터 변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넥서스의 여인들은 모두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죠. 그건 계급과도 상관없는 일이란 걸 너도 알 테지?”
잠잠해지는 불씨를 다시 튀어 오르게 한 건, 라프넬의 작은 물음이었다.
“비록 지금은 아더가 너를 감싸주었지만, 둘만 있던 상황을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잖니.”
적당히 기름 부어진 곳은 티끌만 한 불씨에도 타오르기 마련이니.
“라프넬!”
아더의 고성에도, 라프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화한 미소는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정말 눈앞의 미천한 아이를 걱정이라도 하는 듯이.
“소문은 역병보다 빠르단다. 너도 너에게 ‘맞는’ 혼처를 알아봐야지.”
‘맞는’에 실린 나직한 방점엔 경고가 실려 있었다. 흐음, 허밍 같은 한숨을 뱉으며, 라프넬은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
낼까 말까 고민했던 패가 결국 입 밖으로 나갔다.
“부인께서 이토록 너를 아끼시는데, 네 목걸이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
“목걸이라니.”
“자, 부인께서도 궁금해하시잖니.”
라프넬의 불씨는 제 바람대로 딱 알맞게 불을 지펴가고 있었다.
부인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베스를 바라봤다. 몸가짐이니, 소문이니. 머리가 깨질 지경인데, 목걸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베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증명하고 싶길래 저토록 당당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일까. 답이 떠오르지 않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제국의 장미는, 적어도 베스에게만큼은 가시를 감출 생각이 없다는 것.
베스의 손이 간호복의 제일 윗단추로 향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이는 공주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곤란할 부인을 위해서였다.
옷 속에 꽁꽁 감춰졌던 목걸이가 막힌 숨을 토해내듯 빛을 발했다.
생각보다 고분고분한 모습에 라프넬의 기세도 한결 누그러졌다. 병실에서처럼 버릇없게 굴면 지금이라도 윗사람으로써의 본보기를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적어도 사리 분별은 한다 이건가.
“나도 구하기 어려운 ‘사막의 눈물’이 저리도 많이 박힌 목걸이를 네 월급으로 샀다고 거짓말하진 않겠지.”
데베르의 목걸이를 뺏을 때만 해도, 베스는 공작의 목걸이를 뺏은 게 아니라, 외부인으로부터 창고 열쇠를 뺏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발목을 잡을 줄이야. 그것도 그토록 피하고 싶던 더러운 추문으로.
“사내의 이목을 끄는 게 재주일지언정 도리는 지켜야지.”
라프넬은 쐐기를 박았다.
베스는 입술을 뻥긋거렸지만, 목구멍은 무거운 돌덩이로 꽉 막힌 듯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말로 설명해야, 이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창고에서 저 남자를 만났다고 하면 밀회라 생각하지는 않을까.
행여 만났다 한들, 아군조차 벌벌 떨게 만드는 사내가 한참은 작은 여자에게 목걸이를 뺏겼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게 들릴 텐데.
이 모든 상황을 무심히 지켜보는 데베르를 힐긋 쳐다봤다.
그가 찾던 안정제.
정확한 경위를 알 순 없으나, 그가 향정신성의약품을 오랫동안 먹었다는 건 분명했다. 그게 복용인지, 남용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도 없는 새벽에 창고를 찾았다는 건 들키고 싶지 않단 뜻일 텐데, 이 자리에서 말해도 되는 걸까.
찬 바람을 뚫고 병원을 올 때만 해도 데베르란 이름에도 치를 떨었으면서, 궁지에 몰린 순간에 저 남자 걱정을 하다니. 제 미련에 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 주제에 대체 누굴 걱정하는 거야.
베스는 주머니 속 펜을 꺼내 들었다. 적어도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 없다는 건 알려야 했다.
서 있는 장정들과 구두를 신은 여자 사이에서 쭈그려 앉은 베스는 더욱 작아 보였다. 데베르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우스운 상황도. 말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작 한다는 게 주저앉아 글이나 쓰는 게 전부인 저 여자도.
‘왜 자꾸 일에 끼어들어.’
왠지 그 말에, 저 작은 여자라면 서운해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스친 건 순간이었다.
“제가 준 건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래서 이번엔 제가 끼어들어 보기로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한 번쯤은 저 고집스러운 얼굴이 다른 표정으로 변하는 걸 보고 싶었달까.
“그게 무슨 말이죠, 데베르?”
예상치 못한 데베르의 등장에, 라프넬은 갈무리하지 못한 뾰족한 물음을 던졌다.
“베스 간호사가 제 치료를 전담하셔서 부인께 받은 열쇠를 넘겨준 것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적당히 진실과 거짓이 섞인 말.
“어, 그렇지.”
태연한 데베르의 얼굴에, 부인이 얼떨결에 그 말을 두둔했다. 열쇠는 준 건 맞지만, 병원장도 모르는 전담 간호사라니.
하지만 부인은 눈치 빠르게 데베르가 지금 베스를 도와주고 있음을 알아챘다. 열쇠가 어쩌다 베스의 손에 들어갔는지 아는 마당에, 말이 길어져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라프넬 앞에서 데베르의 약을 설명하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하니까.
목걸이야 데베르의 것이겠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심지어 데베르와 베스라니. 물과 기름 같은 둘 사이는 어떤 의심도 들지 않았다.
부인의 목소리에 한결 힘이 실렸다.
“라프넬, 이번엔 네가 오해했구나. 내가 베스에게 데베르의 치료를 전담하도록 부탁했단다.”
“부인께서……. 열쇠까지 맡기셨다고요?”
“데베르가 원체 다쳐도 병원을 오질 않잖니. 답답한 마음에 내가 열쇠라도 준 거지. 하지만 데베르가 약품을 알 턱이 없으니, 베스에게 특별히 부탁했단다.”
생전 않던 거짓말에 부인의 입가가 어색하게 떨렸다.
“베스가 온 이후로는 수간호사에게 군대장의 치료를 전담하게 했어.”
입이라도 맞춘 듯 상황을 깔끔하게 매듭짓는 대화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경꾼처럼 굴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거짓말은, 당사자인 베스에게조차 진실처럼 들렸다.
“그렇군요.”
라프넬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눌러 내리며, 베스를 안아 일으켰다. 이 정도 쇼쯤은 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래야 부인이 자신에 대한 신의를 잃지 않을 테니까.
“미안해, 베스. 내가 오해했구나. 죄송해요, 부인께도. 요즘 웨인에 듣기 부끄러운 추문들이 많아 과민하게 반응했나 봐요.”
“그래, 라프넬. 이해한다.”
부인은 이젠 정말 피로가 몰려와 말을 이을 기운도 없었다.
“베스, 말려도 듣지 않을 거면 아이네스에게 가서 오전 회의 내용이나 들으렴.”
말 안 듣는 강아지부터 눈앞에서 치워야 방망이질 치는 가슴이 조금이라도 진정될 것 같았다. 이때다 싶어 쪼르르 계단을 올라가는 베스의 뒤로, 데베르의 시선이 붙었다. 숨 막히게 답답하게 굴다가도, 필요할 땐 꽤 재빠르게 구는 여자였다.
“늦겠어, 라프넬.”
라프넬의 손목을 낚아채는 아더의 손아귀에 힘줄이 불거졌다.
“정말 시간이 돼서, 이만 가볼게요.”
라프넬 또한 이 너절한 병원에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웬일로 눈치껏 행동하는 아더가 기특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끌고 가듯 자신을 데려가는 아더의 등을 라프넬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파.”
아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차에 라프넬을 올려놓고 나서야, 힘주어 잡은 손목을 놨다.
“마을까지 마차로 가면, 군용차가 있을 거야.”
하고 싶은 말 대신 다른 말을 뱉는 아더를 라프넬은 가만히 응시했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거 아니잖아.”
유일하게 가식을 벗을 수 있는 서로다.
적어도 나는 네 속마음을 들어줘야지.
“참지 마.”
그 말에 아더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울렁였다.
“너…. 베스에게 왜 그러는 거야.”
베스. 베스. 그놈의 베스.
라프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병원에 온 하룻밤 사이, 베스란 더러운 흙탕물을 잔뜩 맞은 기분이었다. 어딜 가나 따라오는 진절머리 나는 그 이름.
아더가 잠잠히 속삭였다.
“잠깐 부는 바람에 요동하지 마.”
바람.
평생을 황제의 사랑만을 갈구하다 메말라갔던 제 어미를 라프넬은 똑똑히 기억했다.
황제의 몇 번째인지도 모를 여자로, 그의 마음에 부는 미풍에도 흔들렸던 유약한 여자.
아무도 찾지 않는 황궁 냉방에서 외로움에 점철된 채 죽어간 불쌍한 여자.
그 피를 물려받은 라프넬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데베르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난 미풍도 용납할 수 없어.”
푸른 눈은 폭풍 전 바다처럼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