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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5화 (15/206)

15화

제국의 장미.

라프넬 공주를 부르는 사람들의 별칭이자 애칭.

베스는 제 앞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그 별명이 정말 맞노라고 인정했다.

아름다움에도 감출 수 없는 단단한 가시가 꽃잎 같은 목소리를 뚫고 나왔다. 적의로 반짝이는 눈동자의 공주는, 건수라도 잡은 양 목걸이의 열쇠를 꽉 쥐고 있었다.

베스의 손이 가감 없이 공주의 손을 쳐냈다.

“하.”

라프넬은 기가 막힌단 표정으로 내쳐진 제 손을 노려봤다. 아이네스가 아닌 다른 이가 이 광경을 봤다면, 베스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라프넬의 시선으로부터 열쇠를 지키듯 베스의 손이 열쇠를 온전히 감쌌다. 검고 올곧은 눈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어떤 후회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저를 나무라는 듯한 눈빛에 라프넬의 붉은 입술이 다시 한번 비틀렸다.

“난 네게 목걸이가 어울려서 물어본 것뿐이란다.”

라프넬이 한 발 베스에게서 멀어졌다.

얌전한 모양새를 하더니. 천박한 계집애.

고작 저 정도 여자에게 질투심을 느낀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쥐뿔도 없는 평민 여자애가 고가의 목걸이를 받는 경우는 빤하지. 늙은 귀족의 정부 노릇 대가이거나, 전장까지 기어 나와서도 눈이 맞은 장교 따위와의 밀애의 증표.

“라프넬….”

라프넬은 걱정스런 표정의 아이네스에게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제아무리 친구라 해도 저보다 낮은 것한테 추한 꼴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베스의 피부가 하얘서 목걸이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으, 응. 맞아. 잘 어울려. 예쁘다, 베스.”

아이네스가 얼른 맞장구를 치며 미묘한 분위기를 바꾸려 애썼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분위기는 풀릴 기미가 없었다.

라프넬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경사진 어깨 사면을 따라 흘러내린 금발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고개를 틀어봐도 시야 속 계집애는 올곧은 눈길을 내리깔지 않았다.

데베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중요치 않다. 그딴 건 없어도 그만이니까.

저를 길가의 돌 보듯 하는 데베르를 참은 이유는 하나였다. 전쟁귀인 그 남자는 공주뿐 아니라, 세상 모든 걸 똑같이 볼 테니.

하지만 그런 남자가 다른 눈빛으로 무언갈 본다면.

라프넬은 고개를 똑바로 했다.

길가의 비천한 개가 그의 눈길을 잡는다면, 드레스가 더러워지더라도 기꺼이 품 안에 그 개를 가둘 것이다.

“참 예뻐.”

시선의 두 번째는 참을 수 없다.

“칭찬이란다.”

적당히 추해지는 것쯤은 충분히 감수할 정도로.

시선의 두 번째는 치가 떨리게 싫다.

* * *

베스는 부득부득 우겨 아이네스와 함께 격리실을 나섰다. 일손이 모자란 지금 같은 상황에, 수간호사인 저마저 누워있을 수 없다는 게 베스의 의견이었다.

아무리 아이네스가 만류하고, 억지로 눕히려 해도 고집 하나만큼은 웨인에서 최고라 할 만한 베스였기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스는 아이네스를 먼저 밑층으로 내려보내 놓고, 행여 몰리 부인을 마주칠세라 살금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인적이 드문 길을 찾느라 병원 후문으로 나온 베스의 얇은 옷깃 사이로 초겨울 바람이 살을 엘 듯이 불어왔다.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감싸 안자, 욱신거리는 몸이 느껴졌다. 그 난리를 겪었는데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한 노릇이긴 했다.

베스는 느리지만,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아, 간호사님.”

사람이 없는 곳에서 홀로 시가를 태우던 아더는 베스를 발견하자 급하게 군화 코로 덜 태운 시가를 짓뭉갰다. 허공의 연기를 손으로 휘저으면서 웃는 게, 병원에서 시가를 태운 것이 꽤나 민망한 모양이었다.

베스는 가볍게 예를 표하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더의 생각은 달랐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본격적으로 얘기라도 할 모양이었다. 늘 싱글거리며 다니는 낙천적인 황자와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이는 병원에 없었다.

물론, 베스를 제외하면.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사령관으로서 새벽의 일은 죄송하단 말밖에 드릴 수 없네요.”

시답잖은 농담을 던질 줄 알았던 베스의 예상과 달리, 아더의 입에선 제법 진중한 사과의 말이 건네졌다.

순간, 고집스런 얼굴로 미운 말을 던지던 데베르가 떠올랐다. 서운함을 감추기 위해 깨문 입안이 아직도 아릿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서운하다고. 여태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이젠 혼란스러운 게 마음인지, 생각인지조차 구별되지 않았다. 떨구어진 고개와 함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건 기대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나를 구하러 오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무언가 생각에 잠겼는지 가만히 오르내리는 여린 어깨를 아더는 가만히 바라봤다. 겨울바람 속, 여자는 불면 날아갈 듯 가냘파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더는 제복 재킷을 벗어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여자의 어깨 위로 둘렀다.

예상치 못한 온기에 베스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얼른 재킷을 다시 벗어 건네는 손이 떨렸다.

혹시 모를 염문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별거 아닌 일에도 입 떼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아더가 씩 웃었다. 흩날리는 금발의 사내는 제 누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설마, 전장의 가십이 될까 봐 우려하시는 겁니까?”

아더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베스의 귓바퀴가 빨개졌다. 황자는 생각도 없는데 혼자서 염문을 상상한 모양새에 당혹스러움이 밀려왔다.

어쩔 줄 모르는 여자에게서 풍겨오는 은은한 비누 향이 바람을 타고 아더에게 닿았다. 그 향에 잠시간 얼굴이 굳어졌던 아더는 아까 전보다 한결 더 짓궂게 눈을 찌푸렸다.

“이건, 제국의 황자로서 전장의 의료진을 격려한 것 정도로 해두죠. 황족의 호의를 거절해, 저를 망신시키시지는 않으시겠죠.”

담백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아더가 다시 베스의 어깨 위로 재킷을 걸쳤다. 그제야 베스도 어느 정도 안심이 됐는지 무릎을 까딱여 처음보단 끝이 긴 예를 표했다.

그 정갈한 표현에 아더는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과연 소문의 베스 제인스다웠달까. 늘 단정하고, 철옹성 같은 여인이라 했으니. 이쯤에서 물러나 주는 게 신사의 도리였다.

생각보다 일찍 헤어지는 대신 숙소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칼 같은 게 데베르와 비슷한 것 같기도.”

저 여자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데베르는 막사를 뛰쳐나갔었다. 여자를 쏘라느니, 제 협상은 이거라느니 헛소리를 했을 때, 아더는 돌아버리는 줄 알았더랬다.

가끔 지독히 죽은 카시우스 공작처럼 굴 때면 저조차도 소름이 끼칠 때가 있었는데, 오늘 새벽이 그러했다.

함께 넥서스 제국군을 이끄는 두 축이었지만, 실상 군을 이끄는 통솔자가 데베르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누구를 더 믿는지, 누구의 능력을 더 인정하는지, 듣기 싫은 뒷말들은 발이라도 달렸는지 부지런히도 아더의 귀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뒷말은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선황의 서거 이후, 지반 세력을 다지지 못한 채 황제로 즉위한 제 형, 호이든. 황태자 자리를 뺏길세라 전전긍긍하던 그의 화살이 데베르를 향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의 가장 큰 지지 세력임과 동시에 마음만 먹는다면 가장 두려운 반군 세력이 될 수도 있는 넥서스의 공작이자 군 대장.

자신은 데베르의 친우이자 전우이고, 새 황제의 눈이다. 데베르 마음에 어떤 바람이 분다면, 그에 흔들리는 것은 데베르 한 명만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더는 어렴풋이 그 바람의 중심에 베스가 있음을 직감했다.

“지겹다. 정말로.”

아더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를 둘러싸는 서늘한 바람이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더 세게 불어와서 제 안의 피어나는 흔들림까지 송두리째 날려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베스는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병원에 얼굴을 비치면 다들 새벽 일을 물어올 것이 뻔했다. 졸음이 몰려와 느릿하게 깜빡이는 시야 사이로 아더의 제복이 들어왔다.

어떻게 전해줘야 할까. 나중에 따로 만나 전하기보단 부인께 맡겨놓는 게 낫겠지.

부인께는 실례가 될지언정 가장 나은 방법이라 생각됐다. 감히 황자와의 스캔들을 걱정하나 싶었지만, 제 성격상 한번 우스워지는 게 낫지, 추문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저 잠잠히, 고요하게 삶이 흘러가는 것.

그게 가장 베스가 원하는 것이었다.

밀려드는 수마를 쫓아내며, 베스는 작은 숨을 토해냈다.

새벽의 잔흔이 묻은 간호복을 벗자. 어깨 위로 쏟아진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목걸이가 유달리 반짝였다.

‘이거 누가 준 거니?’

공주는 잔뜩 날을 세운 채, 목걸이의 주인을 물었다. 베스의 목에 걸려있음에도 그것이 베스 것일 리 없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비싼 걸까.

저도 모르게 떠오른 실없는 물음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렴, 본래 주인은 데베르 공작이었으니 값나가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게 더 이상할 노릇이었다. 제 눈에는 가끔 병원에 오는 방물장수의 물건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말이다.

살짝 호선을 그리던 베스의 입가가 이내 굳어졌다.

새벽에 자신이 흘린 피 때문인지 열쇠가 검붉게 얼룩져, 안 그래도 낡은 열쇠가 더욱 초라해 보였다. 열쇠가 이 지경이 될 정도인데 목걸이 줄은 여전히 영롱한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멍하니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베스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새 간호복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공포의 시간 속에서 자신은 데베르를 간절히 기다렸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만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번엔…. 다시는 만나지 않기 위해서.

목걸이는 제 주인에게 돌아갈 때가 됐다. 감춰진 목걸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머, 베스!”

베스는 자신이 타이밍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는 것을 병원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깨달았다.

보통 이 시간이면 몰리 부인은 병원장실에서 행정업무를 보기에, 안심하고 로비로 들어온 건데. 어설픈 꾀를 놀리기라도 한 듯, 병원 로비엔 부인과 라프넬, 데베르, 아더가 모여 있었다.

“베스, 나 원 정말!”

부인이 탄식을 내질렀다. 누워서 안정을 취해도 모자랄 마당에 떡하니 병원 입구로 들어오다니!

데베르도 예상치 못한 베스의 등장이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놀라지 않는 사람은 베스의 격리실 탈출 현장을 목도한 라프넬과 아더 뿐이었다.

“황제께서 이 모습을 보셔야 하는데.”

아더가 정적을 깨고 능글맞은 한마디를 던졌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는 부인에 눈에 들어온 건, 베스의 손에 들린 낡고 커다란 가방이었다.

“웬 가방이니.”

반갑지 않은 주목을 받은 베스의 하얀 얼굴 위로 난처한 기색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정말 일이 안 풀려도 단단히 안 풀릴 작정인가 보다.

베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에 라프넬의 눈이 반짝였다.

가방 속엔 아더의 제복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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