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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4화 (14/206)

14화

잠이 덜 깬 노곤한 시선 속에서 데베르의 손이 거둬졌다.

베스는 여전히 눈만 끔뻑거리며, 제 뺨에서 멀어지는 남자의 손, 그와 이어지는 어깨, 그리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눈을 올려다봤다. 싱그러운 아침 새소리가 닫힌 창 너머로 들려왔다.

꿈인 걸까.

지난 새벽의 지옥이 한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 보다 저 남자가 자신이 자는 새 뺨을 쓸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꿈 같았다.

뻐근한 팔을 들어 올려 손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일어나 앉을 기운은 없어, 누운 채로 발가락도 조금 꼼지락거려봤다. 모든 것이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베스는 멍하니 천장에 튄 핏자국을 바라봤다. 파편화된 기억 조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배회했다.

중위의 턱으로 총구가 향하고 방아쇠가 얼떨결에 당겨졌다. 입안으로 찝찔한 기운이 퍼졌을 때, 살았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곧 끔찍한 통증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분명 어딘가 맞았던 것 같은데.

베스의 손이 이번엔 제 얼굴로 향했다. 버석거리는 얼굴을 더듬어봐도 작은 반창고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데베르는 무언가 확인하는 듯한 베스의 행동을 잠잠히 지켜보고 있었다. 베드에 앉아있는 꼴도 우스운 것 같아, 몰리 부인과 문 앞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우두커니 여자의 발치에 서 있었다.

그를 돌아보려 고개를 돌리던 베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 나왔다. 더듬거려 목을 만지자 두껍게 붙여진 거즈와 반창고가 손에 닿았다.

역시. 얼핏 총소리가 두 번 들린 거 같더니. 한 발은 제가 맞은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궁금한 게 많았다.

첩자는 죽은 건지, 자신은 어떤 상태인지.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본 사람이 저 남자일 줄이야.

다른 이를 불러 달라, 부탁이라도 할 요량으로 조심히 고개를 돌리며 종이와 펜을 찾았지만, 격리실엔 그 흔한 협탁 하나 없이 휑하기만 했다.

“저격수가 있었어.”

담담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베스는 따끔거리는 목을 타고 한숨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나가라고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었지만, 지금은 앉을 기운도 없었다.

첩자가 목을 우악스럽게 잡아 누르던 그 순간, 기억 너머에 묻어뒀던 폭력에 대한 공포가 물밀 듯이 밀려왔었다.

어쩌면 익숙한, 분노에 찬 속삭임과 거친 숨, 피부로 와 닿는 위압적인 힘. 첩자의 협박에 사지를 벌벌 떨며 달려나가는 앳된 병사를 봤을 때의 무력감까지.

살고 싶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던 그 순간.

데베르를 다시 보았을 때 안도했었다. 끔찍한 과거 속에선 저를 구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희망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저 남자가 자신을 살릴 거라고.

‘저 여잘 죽이라고.’

‘쏴.’

부질없는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뱉어졌던 차가운 명령.

“저격수가 창문 너머까지 올라오는 데 시간이 걸렸어.”

지금 하는 말이 변명은 아닐 것이다. 이 남자에겐 목숨 또한 계획의 일부였을 테니까.

“널 구하-”

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말할 수 없다면, 적어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듣지 않게 해줘야지. 베스는 신을 원망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데베르 공작을 원망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원망을 들어줄 자비로운 신이 아니니까.

‘널 구하지 않으려던 게 아니야’라고 말을 하려던 데베르의 입이 다물렸다. 보란 듯이 힘주어 감은 여자의 불그스름한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보는 것도 싫어할 것이란 어렴풋한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에, 느껴본 적 없는 막막함이 덮쳐왔다.

애초에 어떤 계획도 없이 들이닥친 거였다. 그를 꼴도 보기 싫어하는 여자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따위는 고민해 본 적도 없었다. 통제와 계획에 집착적인 데베르를, 베스는 본인도 모르는 새 벌써 여러 번 물 먹인 셈이었다.

짜증이 치민 데베르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자신은 분명 베스를 구하려고 했다. 애초에 인질이 죽는다는 것은 그 어떤 전제에도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 여자가 저렇게 굴 때면, 정말로 뭔가를 잘못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애초에 날 믿기나 했었나.

“가만히 있었으면 또 상처 나는 일은 없잖아.”

꺼내지 못할 물음 대신 나온 말은 생각보다 보잘것없었다.

“왜 자꾸 일에 끼어들어.”

여자의 손에 새로 감긴 붕대가 보였다. 어째 이 여자는 처음 만난 이후로, 그와 있을 때마다 상처가 한둘씩 느는 모양새였다. 그게 또 데베르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반짝 눈을 떠 데베르를 노려보는 베스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만약 마지막 사력을 다해 중위의 손아귀를 비틀지 않았다면, 저격수의 총보다 첩자의 총이 먼저 제 관자놀이를 관통했을 수도 있다.

저 남자 앞에서 우는 꼴 따위 다시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

베스는 입안의 연한 살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눈물 대신 나오는 게 핏방울이라면 얼마든지 흘려줄 수 있었다.

베스는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꺼지라고?”

모든 것이 우습고, 귀찮고, 제 발아래로 보는 고고한 공작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꺼지란 말이지. 뇌까리는 목소리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까지 묻어났다.

베스는 그가 어이가 없든, 화가 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새벽의 기억이 생생한 이곳에서 그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변명이건, 설명이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도 더 듣고 싶지 않다. 저 남자가 말한 대로 다시는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것에도 끼어들지 않으면 된다.

서로를 몰랐던 그 첫날처럼.

모두가 데베르 클리프를 피해 가듯, 앞으론 자신도 피해 갈 것이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남자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베스.”

아이네스가 베스의 이름을 소곤거리며,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이미 창으로 공작이 있는 것을 본지라 어색한 인사가 뒤따랐다.

“베스 상태를 보러 온 거라. 공작님도 밤새 안녕하셨나요.”

말을 뱉자마자, 아이네스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새벽에 온 병원이 그 난리가 났는데, 그 중심에 있던 공작에게 밤새 안녕했냐니. 상냥한 인사가 몸에 밴 탓에 한 실수였다.

데베르의 시선이 다시 한번 베스에게로 갔다. 허공을 응시하는 여자의 고집스런 얼굴은, 이젠 그의 옷깃도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네스만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중이었다. 이 불쌍한 아가씨는 데베르가 제 말실수 때문에 화가 난 줄 알고 있었으니. 사실 데베르는 아이네스가 뭐라 했는지도 듣지 못했다.

“네. 영애께서도 밤새 수고가 많으시군요. 그럼.”

어차피 베스와 더 얘기를 나눌 수도 없었기에, 데베르는 정중히 인사를 마무리하고 병실을 나섰다.

“공작님을 여기서 뵙네요.”

예상치 못하게 그의 앞을 막아선 건 라프넬이었다.

“네, 그럼.”

제 옆으로 몸을 트는 데베르에 맞춰, 라프넬의 발걸음이 사뿐히 움직였다. 다시 한번 앞을 막아서고 나서야 시선이 온전히 제게 맞춰지는 게 마뜩잖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잃지 않았다.

“베스가 저렇게 된 건 유감이에요.”

창 안으로 훔쳐보았을 때의 데베르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그 감정의 모양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지금의 얼굴은 마치 일개 병사를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건방진 새끼.

꾀죄죄한 데베르의 꼴을 훑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들리지 않게 상대를 조롱할 때면, 라프넬은 더 해사한 미소를 짓곤 했다.

“당신이 베스를 구하려고 일부러 상황을 어렵게 하신 걸 알아요. 비록 다른 이는 모르더라도요.”

데베르는 잠자코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공주의 말을 끊을 수는 없었으니까.

“할 말은 끝나셨나요.”

“너무 괘념치 마세요. 당신의 마음은 베스에게 잘 전할게요. 베스와 저는 여기에서 좋은 친구가 됐답니다.”

라프넬의 눈이 얼룩진 데베르의 셔츠로 향했다. 틈이라곤 보이지 않던 사내가 여태 엉망인 차림이었다. 저 하찮은 계집애가 다쳤을까 봐 헐레벌떡 뛰어온 공작의 모양새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라프넬은 픽 웃음이 나오려는 입꼬리를 붙잡았다.

“이제 가보셔도 돼요. 저도 베스를 만나봐야겠네요.”

라프넬이 고개를 까딱이며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 적막이 찾아오고 나서야 데베르도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 * *

“베스, 괜찮은 거 맞아?”

이미 몰리 부인에게도 듣고, 차트까지 확인한 이후에도 아이네스의 걱정은 멈출 줄 몰랐다. 라프넬은 그 눈물겨운 상봉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네가 쓰러지는 걸 봤을 때,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어. 딕시는 지금 눈이 너무 부어서 뜨지도 못하고 일하는 중이라니까?”

붕대가 감긴 손이 아이네스의 어깨를 조심히 토닥였다.

“정말 이런 순간이 올 때면 웨인으로 도망치고 싶어.”

아이네스가 물기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베스는 친구를 다독이며, 저를 끈질기게 응시하는 공주의 시선을 일부러 모르는 체했다. 숙소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향한 알 수 없는 적대감을 느낀 건.

베스는 타인의 애정과 호의에는 무뎠지만, 분노, 경멸감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에는 유달리 기민했다. 그리고 그 촉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건 베스의 삶이 만들어 낸 원치 않는 특기 같은 거였으니까.

“이렇게 울 때가 아니야.”

아이네스가 눈물을 닦으며, 표정을 엄하게 굳혔다.

“듣기는 했지만, 내가 한 번 더 확인해야 마음이 편하겠어.”

아이네스가 조심스레 베스의 상처 부위에 붙여진 거즈를 떼어냈다. 그리고 이내 큰 외상이 아니란 걸 확인한 후에야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다시 꼼꼼히 거즈를 붙이던 아이네스의 눈에, 전에 못 보던 반짝이는 게 들어왔다.

“목걸이야?”

목걸이라니. 베스는 어설프게 목덜미를 더듬었다. 흔한 장신구 하나 없는 제게 갑자기 목걸이가 생길 리 없었다.

아이네스는 조심스럽게 베스의 손가락을 피해 간 목걸이를 꺼냈다. 반짝이는 줄 가운데 검붉게 얼룩진 투박한 열쇠가 달랑거렸다.

“열쇠?”

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한 베스의 표정이 난감한 듯 일그러졌다.

아까 공작에게 줬어야 했는데. 하도 몸에 지니고 다니니 목에 있는 줄도 잊고 있었다.

그제야 둘의 신파극을 멀찍이서 바라보고만 있던 라프넬이 가까이 다가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지독한 장미 향이 뻗쳐왔다.

베스가 흠칫, 몸을 뺐지만 라프넬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제 손에 목걸이를 넣었다. 그 손길엔 짐승의 목줄을 당기듯 배려라곤 없었다.

백금 줄 사이로 미세한 크기로 가공된 다이아몬드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혀 있었다.

보통 호세가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고가의 사치품. 근데 그걸 귀족도, 뭣도 아닌 이 계집애가 가지고 있다고.

라프넬의 싸늘한 시선이 베스에게 꽂혔다.

“이거 누가 준 거니?”

꽃이라도 된 것처럼 화사하게 웃기만 하던 라프넬의 입가가 삐뚜름해졌다. 꼭 찢어진 장미를 닮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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