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어서 수술실로!”
몰리 부인의 외침에 아더가 튀어 나갔다.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피가 베드를 적시고, 이내 바닥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바닥에 늘어뜨려진 여체를 아더가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힘이라곤 없어 보이던 팔은 이젠 그나마 있던 생명의 기운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을 안 간호사들의 울음소리와 비명, 누군가의 호통과 군화 소리가 어지럽게 공간을 채웠다.
아더의 품 안에 들린 여자가 데베르에게로 다가왔다. 아니, 실려 왔다고 하는 게 맞겠지.
허공에 달랑이던 붉은 손이 데베르의 흰 셔츠 자락에 닿았다. 실패한 작전을 탓하듯 흠 하나 없는 그의 가슴팍에 붉은 빗금이 그어졌다.
무리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곧 지독한 적막이 소란의 빈자리를 채웠다.
데베르는 명령을 내릴 때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채였다. 달라진 건 셔츠 위로 여자가 남긴 상흔뿐이었다.
부지런히 영역을 넓히던 핏물은 어느새 데베르의 군화 앞까지 퍼져왔다. 물끄러미 그 작은 웅덩이를 지켜보던 데베르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오만한 데베르. 조롱하는 선혈이 느리게 그를 쫓아왔다.
또다시 한 걸음 더 뒤로. 한 걸음 더 뒤로.
홀로 하는 끔찍한 술래잡기였다.
“데베르!”
아더가 큰소리로 데베르를 불렀지만, 데베르의 발걸음은 사람들이 모여든 수술실 앞이 아닌,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향했다.
수술실을 본 체도 하지 않고, 걸어 나가는 그를 보는 건 아더 뿐만이 아니었다. 한밤중의 소동에 깬 라프넬 또한 그 무정한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숄을 두른 푸른 눈이 집요하게 데베르를 뒤따랐다.
의사와 몰리 부인만 수술실로 들어간 통에, 베스의 상태를 모르는 친구들은 애타게 발만 구를 뿐이었다.
옆에서 훌쩍거리며 안달복달을 하는 아이네스에게 라프넬은 성가시단 눈길을 흘렸지만, 혀를 굴려 나오는 건 걱정이 담뿍 담긴 애정 어린 목소리였다.
언제든 사랑스러운 라프넬 공주를 연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건, 온갖 것들이 제 비위를 거스르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니?”
“모르겠어. 흑, 총을 맞은 것 같은데. 어쩜 좋아.”
라프넬의 품에 아이네스가 고개를 묻었다. 곧 라프넬의 달콤한 위로가 그녀에게로 부어졌다.
아더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라프넬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 봤다.
뭘 걱정해. 라프넬이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하지만 자신을 차갑게 내려보는 눈빛에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입안의 혀처럼 굴지 않는 놈은 반쪽짜리 오빠와 늑대 새끼뿐이다.
라프넬의 시선이 다시 인파가 모여든 수술실로 향했다. 저 안에 제 남자가 지켜보던 여자가 있다. 데베르를 손에 넣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한 번도 그가 제 것이 아니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를 처음 보던 순간, 열일곱의 그가 카시우스 공작과 함께 승전고를 울리며 황궁에 입성하던 그 날. 라프넬에게 가장 탐나는 보석은 데베르 클리프가 되었다.
허위와 가식으로 점철된 궁 안에서 사랑스런 라프넬 공주란 가면을 쓰고, 쉴 새 없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발 받침을 찾았다. 평생을 황금빛 그늘에 가려진 채 살아간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겠다는 욕망에 매일 밤잠을 설쳤었다.
넥서스에서 가장 높은 여자. 모두가 우러러볼. 감히 함부로 닿을 수도 없는. 눈요기에 불가한 공주 따위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클리프가의 옆자리.
황제가 클리프가를 의지하면서도, 견제한다는 걸 모르는 권력가는 넥서스에 없다. 끊임없는 외전의 이유가 혹시 모를 클리프가와의 내전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과의 결혼은 황실에도, 데베르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고 확신했다. 황제는 황실이란 이유로 더 용이하게 데베르를 감시할 수 있고, 데베르는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물러날 수 있을 테니까.
지독하게 지배자의 위치에만 있던 사내가 별 볼 일 없는 여자와 혼사를 치를 리 만무하다는 게 라프넬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당연히 내 것이 아닐까. 사람을 두지 않는 그의 곁에 가장 오래 있었던 건 나니까.
“저 애가 꼭 무사해야 할 텐데.”
습관 같은 거짓말이 입술로 새어 나왔다. 거짓말이 죄라면 벌써 지옥 불에 던져졌어야 할 테지. 자조 섞인 뒷말은 삼킨 채였다.
“예상치 못한 일은 불행이야.”
아더에게 안겨나가는 여자를 향해 굳어있는 데베르를 본 순간, 처음으로 변수가 생겼음을 알았다.
부디, 저 애가 불행까지 안고 가지는 않기를.
라프넬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를 빌었다.
* * *
데베르는 막사로 도착하자마자 거칠게 서랍을 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약을 모두 털어 넣고. 병에 남은 보드카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여태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제 도발에 맞게 시간을 벌어주는 중위,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저격수, 반항하지 않는 인질까지.
하지만 마지막 변수 하나가 제 교만을 우습게 만들었다.
그 여자는 겁이 많으니까, 총 반동도 제어 못 할 만큼 힘이 약하니까. 구해줄 때까지 가만히 있을 줄로만 알았다.
베스에 대한 섣부른 정의가 만들어낸 오판이었다.
마지막 순간, 저격수의 방아쇠가 당겨지고, 분을 이기지 못한 중위가 총을 쏘려는 그때. 중위가 이성을 놓는 허점을 놓치지 않고, 베스는 사력을 다해 총구를 반대쪽으로 비틀었다.
베스를 쏘려던 총구는 중위의 머리통으로 향했고, 목표물의 위치가 갑작스럽게 변경된 탓에 이미 날아간 저격수의 한 발은 베스를 향했다.
마디가 굵은 손이 약통을 힘껏 그러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흰 약통만큼이나 그의 손 또한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여자의 손에 감긴 붕대가 시뻘게지던 게 떠올랐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새벽 여명이 터 오는 바깥을 응시했다.
베스는 데베르를 믿지 않았다.
그랬으니 그런 행동을 했겠지. 죽었을까.
몽롱한 기운이 퍼지며, 시야가 울렁였다. 그 사이로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여자의 원망하는 듯한 까만 눈동자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몇 시간 뒤, 데베르를 거칠게 깨운 건 아더였다. 얼추 상처가 아문 아더는 제복을 차려입은 채였다. 나뒹구는 약통과 바닥에 쏟아져 흥건한 술이 그의 새벽이 어땠는지를 대신 전해주었다.
데베르는 간이침대에 널브러지듯 누워 아더의 얼굴을 올려봤다. 오랜만에 보는 무표정한 황자의 얼굴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죽었구나.
데베르의 손이 협탁 위의 술병으로 향했다.
“작작 처마셔.”
비틀거리며 일어선 데베르는 구부정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아더보다 컸다. 꽤나 위압적인 시선이 아더에게 꽂혔다. 아더는 피하지 않고, 제 친구를 똑바로 바라봤다.
“정신 차리라고, 데베르 클리프 대장. 술에 전 채로 병문안 갈 작정인가.”
“병문안?”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살았어.”
술병을 뺏어 든 아더는 친구를 대신해 한 모금 삼키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독한 알코올 향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너 한 번에 이만큼씩 먹으면 중독이야. 알아?”
“살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네가 죽이라고 명령했던 그 여자 살았다고. 변태 새끼 머리통 칠 때부터 보통 성질은 아니다 싶더라니.”
아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진짜 죽으라는 뜻은 아니었겠지만, 베스 입장에선 네가 무슨 꿍꿍인지 알게 뭐겠어. 제 딴엔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친 거지. 그게 결과적으로 득인지, 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몰리 부인이 그러는데-”
아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베르는 막사를 뛰쳐나갔다. 들이닥치듯이 병원으로 들어온 데베르에 병사들이 경례할 새도 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내딛는 발걸음에 맞춰 심장 고동도 함께 쿵쿵댔다.
미친 듯이 날뛰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난리가 있었던 격리실 앞이었다.
데베르는 마른 얼굴을 한 번 쓸었다.
“멍청한 새끼.”
아더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나온 터라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여기를 올 이유가 없었다. 계획에 차질이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인질은 살았고, 첩자는 자멸했으니까. 오히려 오지 않는 걸 그 여자는 바랄지도 모른다.
미처 달아나지 않은 술기운 탓인지 입안이 썼다.
“데베르?”
때마침 격리실에서 나오던 몰리 부인이 문가에 멍하니 서 있는 데베르를 깨웠다. 그를 보는 부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겉옷도 입지 않고, 어젯밤 피 묻은 셔츠차림 그대로 뛰어온 모습이라니.
“베스를 보러 온 거니.”
부인의 목소리엔 짙은 피로감이 역력했다. 늘 잔머리 하나 없이 깔끔하게 올려진 머리채 또한 답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다. 전쟁의 잔뼈가 굵은 그녀에게도 이번 새벽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천운이야. 정말 천운. 한 치만 엇나갔어도 다신 볼 수 없었을 테지. 목을 스쳤어. 피범벅이었던 건 중위의 피를 뒤집어써서 그런거고.”
부인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께를 꾹 눌렀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쇼크가 와서 쓰러진 거란다. 그럴 만도 하지.”
부인은 눈을 들어, 그 어떤 대꾸도 없는 데베르의 잠잠한 눈동자를 마주 봤다.
기억 속, 허리께밖에 오지 않던 어린아이는 그 옛날에도 지금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무섭다며 부인의 집 문을 두들기던 꼬마는 이젠 제국의 두려움의 상징이 됐다.
한없이 제국군의 대장 같다가도, 지금처럼 가만히 서 있는 모습만 보면 명치가 쿡쿡 쑤셔왔다. 구해주지 못한 어린 데베르를 마주하는 듯해서.
“들어가 보렴.”
떠오르는 감상에 행여나 실없는 소리를 할세라 부인이 먼저 자리를 떴다.
데베르의 손이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병실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비명과 울음으로 가득 찼던 새벽과 같은 곳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얀 베드 위에 깔린 검은 머리칼이 그 자리에 베스가 있음을 알렸다. 잠들었으니 누가 온 지도 모를 텐데, 데베르는 어느새 숨까지 참은 채였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저 여자는 그의 소리도, 향도, 그 어떤 것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 행여나 그게 꿈속이더라도.
흰 베드만큼이나 희멀건 얼굴은 새벽에 보았을 때 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뺨 위로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핏자국이 거슬렸다.
다가가지 못하는 거리만큼 손이 뻗어졌다. 처음 약품 창고에서 여자의 손을 겹쳐 잡았을 때처럼, 익숙지 않은 온기가 데베르의 손에 닿았다.
힘주어 닦으면 행여 깨기라도 할세라, 유리 공예품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뺨을 쓸었다. 하지만, 건조한 손길에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은 요동도 없었다.
데베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어느새 베드에 걸터앉은 데베르의 엄지손가락에 힘이 살짝 더 실렸다. 부드러운 감촉이 더욱 선명하게 전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집중한 데베르의 손 위로, 그의 몸이 기억하는 미약한 손길이 느껴졌다.
“…….”
망설이던 데베르의 눈이 느리게 올라갔다.
까만 눈동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