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대, 대장님. 갑자기, 그 주, 중위가.”
데베르의 막사로 뛰어 들어온 병사는 얼이 빠져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무언가 빠르게 설명하려 애썼지만, 애석하게도 입이 따라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관을 거치지 않고 내게 뛰어올 만한 일이었나.”
한시가 급한 상대와 달리 데베르는 용건이 뭔지도 궁금치 않아 보였다.
앳된 얼굴의 병사는 좀 전까지 격리실 앞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이었다. 아직 이렇다 할 전투 경험도 없고, 병원 경비를 서는 게 전부인 말단 병사가 진두지휘 군의 대장을 찾을 일은 없었다.
청년보단 소년이 더 어울리는 병사의 눈엔 급기야 눈물이 어룽거렸다.
“크, 큰일. 대장님이 안 오시면 간, 간호사를 죽, 죽인.”
“뭐?”
웬만해선 되묻는 일이 없는 데베르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반문이 튀어 나갔다.
나이트. 베스.
데베르의 손이 곧장 병사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사냥꾼에 들린 토끼처럼, 병사는 데베르의 손아귀에 붙잡혀 끌려가듯이 막사를 나섰다.
“설명해.”
“무슨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니, 중위가 갑자기 간호사를 협, 협박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대장님만 오시라고 했습니다.”
하. 한숨과 함께 데베르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더럽게도 안 깨어난다 싶더니.
이따위 헛짓을 꾸미고 있었단 생각에 이가 갈렸다.
넥서스 친위대로 잔뼈가 굵은 자다. 데베르가 어떤 이인지 수년을 옆에서 지켜본 이상, 제 최후를 모를 리 없다.
하필 심야에, 지키고 있는 이도 만만한 말단 한 명이니 하늘이 저를 돕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베스.
어느새 데베르는 뛰고 있었다. 따라오던 보초병은 이미 뒤처진 지 오래였다.
조용한 병원 복도에서 들려오는 건 데베르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병사가 눈물까지 보이며 설명한 상황에 비해 병원은 데베르가 조금 전 다녀갔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군홧발에 밟힌 낡은 마룻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비명처럼 울렸다. 핏줄이 불거진 데베르의 손이 허리춤의 권총을 소리 없이 빼 들었다.
철컥.
느릿하게 돌아간 문고리가 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곳엔 데베르가 상상한 딱 그대로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깨어난 중위와 겁먹은 베스.
딱 제가 생각한 최악의 모습.
데베르가 조용히 문을 다시 닫자, 중위의 불어 터진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곳곳에 피딱지가 얼룩진 얼굴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여유롭나 보군. 데베르 공작.”
사내는 이젠 대장이란 명칭도 내다 버렸다.
“뭘 하고 싶은 거지.”
상황에 맞지 않는 데베르의 덤덤한 목소리가 건조하게 흩어졌다. 지나치게 무심한 목소리는 귀찮은 기색마저 담긴 듯이 들렸다.
베스는 중위에게 감긴 목을 어떻게든 빼내 보려 바둥거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일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거즈를 붙이려고 다가갔을 때, 중위는 갑작스럽게 베스를 공격했다. 멀쩡한 한 손으로 가녀린 목을 조르고, 순식간에 앞치마 속 주머니에 들어 있던 권총을 꺼내 베스의 머리에 갖다 댔다.
‘말도 못 하는 네가 나이트란 소릴 듣고, 천운이 따라준다 생각했지.’
정신이 깼을 때부터 남자의 온 정신은 생존에만 가 있었다. 데베르가 들이닥쳐 단도를 뽑아 들었을 때, 마지막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는데 그때 보인 한 줄기 희망이 이 간호사였다.
고통에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분명히 봤다. 저 하찮은 여자의 행동 하나에 공작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아더 만큼은 아닐지언정 데베르를 꿰듯이 보며 살아온 삶이다. 지금껏 본, 아니. 집착하듯이 분석한 데베르 공작은 고작 여자 하나에 제 방식을 바꿀 이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의 유일한 예외 덕에 남은 눈 하나는 지킨 터였다. 잘하면 살아서 본국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친 건 본능이었다.
죽음의 공포에 잠식당한 남자의 표정엔 광기마저 느껴졌다.
“날 코바흐군에게 넘겨. 그럼 이 여자는 살려 주지.”
해 볼만한 거래다. 하나 남은 눈에 얼핏 확신의 자신감이 스쳤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발갛게 충혈된 베스의 눈이 데베르에게로 향했다. 군대장은 재미없는 잡담을 듣는 양 고개까지 삐딱하게 틀은 채였다.
그제야 데베르에 대한 숱한 소문들이 베스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가 얼마나 무정하고, 잔인하고, 전쟁에 집착적인지를. 사람을 인질로 붙잡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득실을 따지는 모습은 그 소문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저 남자에겐 내 목숨이 값어치 없는 것일지도.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 하나가 안 그래도 틈 없는 베스의 숨구멍을 완전히 틀어막았다. 있는 힘껏 온몸을 버둥거렸다. 너무나 살고 싶어서.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이 여자 대가리 날아가는 거 눈으로 봐야 정신 차리지!”
광분한 남자가 더욱더 팔을 옥죄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공포에 더해진 인후의 압박에 베스의 눈에선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데베르는 바르작거리는 여자를 응시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찌푸려진 그의 눈엔, 일말의 동정심이나 고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수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중위가 허공으로 총을 쐈다. 천장을 강타하는 탄창에서 나온 폭발적인 소음이 고요한 병원을 소란스럽게 흔들었다.
“다음은 여자야. 선택해. 날 보낼지, 여자를 죽일지.”
곧 깨어난 병사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중위의 셈에 이 상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사람이 모일수록 불리할 테니까.
하지만 이 여자가 있다. 잘못 봤을 리 없다. 이 여자를 살리려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문에 난 작은 창 너머로 점점 밝아오는 불빛이 보였다. 뛰어오는 군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격리실 문이 양쪽으로 활짝 벌어졌다.
“이게, 무슨.”
무리의 선두에 있던 아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이 총구를 들이밀자, 공포에 질린 중위의 발작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방아쇠에 손 올리기만 해봐! 그럼 이 여자도 바로 죽는 거야!!”
“뭐 하는 건가! 솔렌트 중위! 여자를 보내. 충분히 대화로 협상할 수 있어.”
“대화? 웃기는 소리. 날 본국으로 보내. 살려서. 그럼 이 여자를 놔 주지. 단, 내가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 여자는 나와 한 몸처럼 붙어 있어야 해. 넥서스 놈들은 믿을 수 없으니깐”
찰나의 순간, 아더의 얼굴 위로 고민이 스쳤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지만, 영 말이 안 되지도 않았으니까.
넥서스에선 첩자지만, 조국인 코바흐에선 고위 귀족의 자제였다. 코바흐 군대장의 조카란 정보가 오후 늦게 알려진 상황이었다. 저쪽에서도 살리고 싶을 것이 뻔했다. 귀족 놈들이란 게 제 핏줄은 금줄처럼 여기기 마련이니.
적군과 눈치싸움 중인 냉전 상황에서 위험을 넘어서 목숨 몇 개쯤 건다면, 저 자를 전초선 너머로 보낼 수 있었다.
데베르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표정은 혼자서만 다른 광경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의연했다. 지독한 새끼. 아더가 거칠게 제 머리를 털었다. 답답한 마음에 성급한 대안이 쏟아져 나왔다.
“데베르, 코바흐로 넘겨. 내 수하에 있던 자니, 내가 무탈하도록 책임지-”
“굳이?”
말이 끊긴 아더의 표정이 황망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내 짙은 금빛 눈썹이 일그러졌다.
설마. 데베르가 뱉을 최악의 수가 그려졌다.
“죽여.”
“뭐?”
“그 여잘 죽이라고.”
베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눈물로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귓가를 맴도는 말은 잔인하리만치 생생했다.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 목숨 하나쯤은 기회비용의 축에도 안 든다는 듯 가벼운 말투.
베스는 부정하고 싶던 판단이 맞았다는 생각에 또다시 울컥, 눈물이 비져나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도망쳤는데.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들리지 않는 베스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지독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탄알은 두 개뿐이야. 금방 하나 날렸으니. 남은 개수를 모르지는 않겠지. 선택해. 저 여자를 죽이고, 내 손에 죽을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중위의 눈이 아더와 데베르를 훑었다. 군대장의 완고한 명령에 황자조차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게 보였다. 판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내 협상이야.”
종지부를 찍는 말이었다. 어떻게 해도 죽을 테니, 더 이상의 고문이라도 없이 죽으라는 배려 아닌 배려.
베스의 목을 옥죈 남자의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욕설이 귓가로 꽂혔다. 남자는 어느 새부턴가 공포가 아니라,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게 그가 내뱉는 달뜬 숨으로 전해졌다.
정신 차려, 베스 제인스.
혼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베스는 자신을 일깨웠다. 병적인 분노와 폭력이라면 이골이 날 만큼 겪었다. 베스의 삶을 짓밟았던 이들 또한 그랬으니까.
베스는 어떻게든 숨통을 열어보려 애썼다. 숨쉬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지만, 아까보단 남자의 경계는 약해져 있었다. 이미 한 차례 반항하는 베스의 힘을 경험했고, 비록 한 손이긴 하지만 충분히 제압 가능하단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지금은 손안에 든 생쥐보다, 눈앞의 맹수와의 협상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더 궁지에 몰린다면 제 분을 못 이기고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관자놀이의 차가운 총구마저 체온과 오랫동안 닿아 미지근해진 상황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그건 직관적인 판단이었다.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하는 시야 사이로,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베스만을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는 고집스러울만큼 흔들림이 없었다.
여자를 보던 데베르의 눈이 그 뒤편 창문으로 향했다.
애초에 호텔을 개조해 만든 탓에 이 층 이상의 모든 방엔 창문이 있었다.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격리실은 사 층에 있었는데, 저격수가 소음을 내지 않으면서 창 높이에 맞게 올라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데베르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살고 싶은 발악으로 미친 중위는 데베르의 계획에 딱 들어맞게 시간을 벌고 있었다.
창밖, 가지가 앙상한 나무 사이로 저격수의 얼굴이 보였다. 데베르의 입가에 얼핏 미소 같은 게 스쳤다.
“쏴.”
중위에겐 도발이자, 바깥의 부하에겐 신호.
“이 미친 새끼가!”
저격수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데베르는 승리를 장담했다. 시간은 언제고 그의 편이었고, 승리 또한 그의 몫이었으니까.
고막을 찢는 발포 소리가 두 번 들렸다.
데베르의 시선이 붉게 물드는 하늘색 간호복으로 옮겨갔다. 늘 하얗다 못해 파리하다고 느꼈던 여자의 얼굴이 여백 하나 없이 핏물로 뒤덮이는 게 보였다.
“베스!”
몰리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무리를 헤치고 뛰쳐나갔다. 어디선가 또 베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검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데베르의 눈이 느릿하게 펼쳐지는 그 모든 모습을 눈에 담았다.
계획한 발포는 단 한 발이었다.
계획은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