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11화 (11/206)

11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다시 한번 베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친 데베르의 얼굴은 어딘가 지쳐 보이기도, 한 편으론 음산해 보이기도 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약통을 톡, 톡 치는 소리만이 둘 사이를 메웠다.

톡, 톡.

그 작은 소음이 멎은 순간,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얼마간 그 죽은 듯한 정적을 세던 남자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여자가 채 안도하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진 총을 집어 들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바닥과 총기의 둔탁한 마찰음에 베스의 어깨가 긴장으로 움칠했다.

저걸 왜 저기에 내팽개쳤을까. 베스는 때늦은 탄식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 손에 있을 땐 영 남의 물건 같던 게, 남자의 손에 들어가니 제 자리를 찾은 듯 자연스러웠다.

데베르는 예사로운 일인 듯 탄창을 돌려 탄알을 확인했다. 철컥, 하고 튀어나온 탄창을 제자리로 집어넣으며 흘깃 쳐다본 여자의 눈은 총에 고정돼 있었다. 데베르는 한 손에 넉넉히 들어오는 총의 그립을 한 번 꽉 쥐고는, 베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표정은 여상했다.

베스의 구둣발이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남자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베스가 뒤로 물러나는 걸음에 맞춰 딱 한 걸음씩만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더 뒤로, 한 걸음 더 앞으로.

술래잡기 아닌 술래잡기였다. 다만, 손에 총을 들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아, 고양이와 쥐의 싸움이라 해야 하려나.

베스는 어느새 등 뒤로 닿는 차가운 벽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싶었지만, 말을 할 유일한 방법인 종이와 펜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벽면으로 난 손바닥만 한 창문을 통해 쏟아지듯 빛 한줄기가 내려왔다.

가장 지독한 어둠 속에서도 늘 티끌만 한 빛은 있기 마련이고, 데베르는 그 덕에 사색이 된 여자의 흰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반면, 데베르가 선 곳은 커다란 캐비닛 그림자에 가려 베스에겐 그의 손에 들린 총구의 광택감만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데베르는 손안의 총을 느릿하게 돌리며 눈앞의 여자를 응시했다.

밤처럼 새카만 머리와 눈동자 탓일까. 여자는 달빛이 꽤 잘 어울렸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낡은 가죽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숲에서 생채기가 잔뜩 났던 발은 그 속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 함께 내려가던 베스의 눈은 또다시 손에 들린 총에서 멈췄다.

“살고 싶으면 몸에서 떨어뜨리지 마.”

베스는 자신을 향해 까딱이는 손잡이와 어둠 속 인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표정이라도 보이면 무슨 생각인지 유추라도 할 텐데. 야속한 어둠은 그마저도 용납지 않았다.

“나 같은 새끼 만나면 어쩌려고.”

날 선 말을 내뱉으며, 데베르는 자신에 대한 정의를 새로이 했다. 자신을 인내심이 강한 타입이라 생각했던가. 적어도 이 여자, 베스 제인스 앞에서는 예외일지도 몰랐다. 유난히 눈앞의 여자가 신경을 거스르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여차하면 쏘기라도 하라고 총까지 주워줬는데, 여전히 겁먹은 모양새라니.

“받아.”

베스는 그제야 주춤대며 총을 넘겨받았다.

고작 총 하나 드는데도 여린 손목 위로 튀어나오는 힘줄에, 데베르의 눈가가 설핏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기어들어 온 건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달싹이던 그의 입술이 다시금 닫혔다.

뭘 말하고 싶어서.

자신에게 반문했다. 지나온 시간 중 후회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카시우스보다 더한 놈.

가장 끔찍해 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말은 데베르의 지난날을 정의하는 가장 명확한 한 줄이었다.

데베르는 그런 남자였다. 제 판단에 단 한 번도 의심을 가져 본 적 없는 자. 혹자는 그걸 공작의 오만함이라 칭했지만, 그에 마땅한 결과가 따라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사냥개는 주인의 명령을 따를 뿐이고, 짐승은 사냥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시간을 되돌려도, 그까짓 첩자 따위 진창이 될 정도로 살육을 낼 수도 있었다.

겨우 그 꼴 하나 봤다고 벌벌 떠는 이 여자에게 변명이란 걸 하려 하다니.

“약은 필요 없어.”

어둠 속에서 약통이 휙 던져졌다.

“그것도 잘 챙기고.”

무슨 소리냐는 듯이 동그래진 여자의 눈은, 아까 전 겁먹은 눈보단 훨씬 봐줄 만했다.

“내 목걸이. 전리품이잖아.”

데베르는 대답과 함께,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힌 간호복 제일 윗단추를 살짝 건드렸다. 깜짝 놀란 베스가 잔뜩 목을 움츠린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데베르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봤다. 숨길 곳 없는 빛 속에서 붉어지는 얼굴이 선명했다. 희미한 빛인 줄 알았는데 제법 모든 걸 비추는 게 꽤 기꺼웠다.

베스 또한 이젠 제법 어둠에 익숙해져, 남자의 얼굴이 전보단 선명하게 보였다. 얼마쯤은 화가 나 보이고, 얼마쯤은 누그러지기도 한 모습. 기억 속, 아침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는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말끔한 등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베스의 바람과는 달리 연고와 거즈 따위가 모여 있는 선반이었다.

“간호사님.”

그간의 난리만 아니었다면, 퍽 달콤하다고 느껴질 만한 목소리가 나직이 베스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입에서 굴러나온 이름과 함께, 또다시 베스에게로 무언가가 휙 던져졌다.

[흉터용-1일 3회]

손에 들어온 건 작은 연고였다.

“숙녀 손에 흉터가 생기면 안 되잖아.”

베스가 채 뭐라 말하기도 전,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와 얇은 간호복 사이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이음새가 녹슨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힌 후였다.

손안의 미약한 무게감이 사라진 남자의 존재를 말했다.

‘이거 받으려고 온 거 아닌데.’

그럼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뭘까.

어둠 속에서 남자가 내민 총을 보며 망설였던 건, 모순적이게도 그가 너무 약해 보여서였다.

컴컴한 그림자에 몸은 가린 채 내민 흉터 가득한 손. 그 손에서 총마저 뺏어선 안 될 것만 같아서.

그리고 등 뒤에 새기듯이 남아 있던….

베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 조금 전까지 데베르가 서 있던 선반 앞에 섰다.

이게 필요한 건 나보다 당신인 것 같은데.

한 칸이 비워진 트레이에 연고를 집어넣자, 틈 없이 채워진 선반은 남자의 손이 닿기 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꼭 그가 왔다 간 흔적을 지우는 것처럼.

내겐 필요하지 않아.

데베르는 보지 못한, 그를 향한 베스의 작은 거절이었다.

* * *

“앗, 대장님!”

졸고 있던 보초병이 예상치 못한 대장의 등장에 잔뜩 기합이 들어갔다. 하필이면 늑대 새끼가 난리를 친 오늘 졸다니. 아찔한 느낌에 순식간에 등골에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깬 건가.”

데베르의 눈은, 낮에 라프넬이 제법 귀여운 체하며 올려다보던 좁은 창문으로 향했다. 숨은 붙어 있는 건지. 누워있는 꼴이 영 미덥지 않았다.

병사는 자신을 향한 물음인지, 누워있는 첩자를 향한 물음인지 눈치를 보다, 군대장의 눈길이 격리실 안으로 고정된 것을 보고 더듬대며 보고했다.

“아, 아직 깨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라….”

“아직! 깨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말꼬리를 낮게 되뇌는 데베르의 음성에, 병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말을 고쳤다.

데베르 공작이자, 데베르 대장은 확실하지 못한 답변을 싫어했다. 특히 ‘같습니다’ 따위의 말로 면피할 구석을 마련해 놓는 것에 진절머리를 냈다. 깔끔한 일 처리만큼이나, 자로 잰 듯 명확한 말 만을 하는 게 그의 특징이었으니까.

다행히 지금 그는 일개 병사에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데베르는 문을 열고 들어가 누워있는 ‘형체’를 내려다봤다.

사람 ‘같은’ 꼴이었지, 사람답지는 않은 형체.

주저 없이 손을 올려 그나마 남아 있는 남자의 한쪽 얼굴을 짝, 짝 소리 나게 때렸다. 굳은살 박인 손아귀 힘에 순식간에 볼이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누워있는 자는 미동도 없었다.

정말 깨지 못한 걸까. 탁한 눈동자가 남자를 훑었다.

어린 시절부터 넥서스에서 황제 친위대로 길러진 첩자. 그럼에도 제 본국의 사상을 전혀 잃지 않은 자. 아니. 오히려 자라나는 사상과 함께 넥서스에 대한 증오도 함께 키운 자.

데베르는 이런 인간을 수없이 마주하고 경험했다. 고문을 한다 해서 정보를 뱉지도 않을 거라면 모두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는 게 더 낫다.

누구든 감히 두려워서라도 배신하지 못하도록.

첩자는 데베르에게 있어, 말하자면 거슬리는 쓰레기 정도였다. 승리라는 목적을 방해하는 장애물. 길가의 쓰레기를 치우듯이 그들을 처단하는 데 어떤 주저함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돌아와 이 쓰레기를 돌아보는 것은 제 안에 어떤 불확실함이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데베르가 다시 밖으로 나오자, 더 펴질 것도 없는 병사의 등이 더욱 빳빳이 올라갔다.

“내일, 07시, 즉결처분. 모두 집합시켜.”

“옙!”

모두가 지쳐있는 때에 지나치게 사기를 저하할 필요는 없지.

제 마음에 들어온 불확실함을 메울 명분이 필요했다. 저 자를 더는 고문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 데베르는 그 명분을 군대의 사기로 했다. 전쟁의 막바지. 지금 필요한 건 공포보단 희망이란 결론과 함께.

더 이상의 사념은 끊어냈다. 이 불확실함의 기저를 굳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데베르가 컴컴한 복도로 사라지고, 보초병의 긴장이 좀 풀리려는 차에, 이번엔 반대편 복도에서 인영이 하나 등장했다. 이내 그 주인공이 베스임을 안 병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알은체했다.

“간호사님이시네요.”

베스가 고개를 까딱해 격리실 안을 가리켰다. 눈칫밥 하나는 기가 막힌 병사는 곧 그 뜻을 알아챘다.

“아직 깨진 않았습니다. 데베르 대장님께서도 금방 보고 가셨어요.”

데베르? 호선을 그리던 베스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설마 무슨 짓을 더 한 건 아니겠지.

불안한 예감에 급하게 격리실로 들어가, 시체처럼 누워있는 남자를 살폈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니 한쪽 얼굴만 유달리 부어 있었고, 눈을 가린 거즈도 반쯤 떼어져 있었다.

다들 손이 꼼꼼한 분들이라 이런 일을 성기게 하는 법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레 거즈를 마저 떼자, 안구가 적출된 자리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급소를 피해 간 덕에 수술은 무리 없이 끝났고, 생명에 지장은 없다 들었다. 해가 질 때쯤엔 족히 깨어났어야 할 남자가 여전히 무의식이라는 게 이상하긴 했다.

깨끗한 거즈를 붙이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순간이었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한쪽 눈이 번쩍 떠지며, 포악스러운 손길이 목을 조여온 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