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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10화 (10/206)

10화

“라프넬……. 베스는 말을 못 해.”

아이네스가 주춤거리며 말을 꺼냈다.

“아.”

탄식 같은 한마디와 동시에 라프넬의 큰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아침의 악몽을 상기시키는 익숙한 꽃향기가 다시 베스에게로 다가왔다.

라프넬은 마치 제 아랫사람을 대하듯 베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낡은 간호복 위로 반짝이는 자잘한 보석이 베스의 목덜미를 아프게 스쳤다.

“안쓰러워라.”

라프넬이 구슬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아이네스를 돌아봤다.

“난 아더에게 가 봐야겠어. 아이네스. ‘친구’를 좀 위로해 줄래?”

“으, 응. 그래.”

아이네스의 눈이 바쁘게 베스와 라프넬을 오갔다. 그 사이, 벌써 밖으로 나간 라프넬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성질머리 왜 저래? 공주는 원래 저래?”

딕시가 행여 공주가 돌아올세라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분을 못 참고 쏘아붙였다.

잠시간 멍하니 있던 베스도 곧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돌아와 나이트 근무를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네스가 다가와 공주의 행동에 대해 뭐라 변명했지만, 베스에겐 그 사람이 공주이건 무슨 말을 했건 중요하지 않았다.

말을 못 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갈래로 나뉘었다. 무시하거나, 불쌍해하거나.

저 사람은 그저 후자일 뿐이다. 베스는 여전히 마음을 쓰는 아이네스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은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 * *

“라프넬. 더 좋은 걸 대접하고 싶지만 여의치가 않구나. 이해해 주렴.”

저녁 식사는 몰리 부인의 병원장실에서 단출하게 차려졌다. 평소 먹는 식사에 특별한 거라곤 포도주 한 병이 곁들여진 게 전부였다.

식탁이 아닌 탁자에 둘러앉은 네 사람 중, 웃고 있는 이는 몰리 부인과 라프넬 뿐이었다. 아더가 데베르를 힐긋 쳐다봤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느리게 나이프 질만 하고 있었다.

라프넬이 이곳에 온 목적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지러운 마음만큼이나 헛도는 아더의 포크와 접시가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라프넬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갑게 대화의 운을 띄웠다.

“이곳에 있는 영애들은 넥서스의 보물 같아요.”

“그렇지. 안락한 생활을 마다하고, 함께 고생을 자처하는 중이니. 다들 똑똑해. 성실하고.”

몰리 부인의 입가에 제자들을 향한 만족스런 미소가 묻어났다.

“저도 간호학교에 갔다면 도움이 됐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라프넬 네가? 하긴, 너도 영민하니 훌륭한 간호사가 됐을 테지. 숙소는 봤니?”

“네. 아담하고 예쁘던걸요. 오늘 밤 제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괜히 민폐인 것 같아요.”

라프넬은 그 좁고 후미진 간호 숙소에 여분의 침대가 없길 간절하게 바라는 중이었다. 데베르 때문에 이 오지 같은 곳에서 하루 묵겠다는 수를 던진 만큼, 아까운 밤을 별 볼 일 없는 간호사들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몰리 부인이 데베르에게 막사 하나를 제게 빌려달라 하길 기대했다.

“음, 그건 걱정 말렴. 베스와 소피아가 나이트 근무니 그 침대를 쓰면 돼.”

작게 달그락거리던 데베르의 커트러리가 멈췄다. 기민한 라프넬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베스요? 아, 설마 그 말을 못 한다는 친구 맞나요?”

“라프넬.”

아더가 매섭게 동생을 노려봤다.

차마 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없어 잔뜩 억누른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무 기특한걸요. 말을 못 하는 장애가 있는데도 전초선으로 와 병사들과 부인을 돕다니. 원래부터 말을 못 한 걸까요?”

조곤조곤 읊어대는 목소리에 아더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라프넬은 그런 아더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천진한 표정으로 몰리 부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 시간 내내 입을 열지 않던 데베르도 부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 되어버린 몰리 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베스 얘기를 할 줄이야.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킨 후, 내키지 않는 입을 열었다.

“글쎄. 지금으로선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겠지.”

애매한 답변이었다.

누가 더 물어올세라 부인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라프넬. 웨인은 요즘 어떠니? 통 시골에만 있다 보니, 웨인의 활기가 너무 그립구나.”

라프넬은 아쉬운 대답에도 눈치껏 부인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권세 있는 공작부인의 심기를 거스를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기에, 얼른 유행하는 부티크와 양장점, 귀부인들의 살롱, 음악 공연 등의 이야기를 읊어댔다.

얼마간 얘기를 듣던 데베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모 회의가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몰리 부인에게 먼저 인사한 데베르는 이어 라프넬에게도 고개를 까딱였다. 라프넬은 입가에 으레 올려놓은 미소로만 답할 뿐, 내리깐 눈을 들지 않았다.

제 나름대로 데베르에 대한 괘씸함을 표현한 거였다. 딱, 그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자른 고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비어버린 맞은편 자리를 바라봤다.

데베르 클리프.

곱씹는 이름이 썼다.

* * *

길어진 저녁 식사에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몇 개의 병실을 빼고는 벌써 소등한 터라, 병원 안은 전체적으로 어둑했다.

맨 위층의 병원장실에서 내려온 데베르는 빠르게 복도를 거닐었다. 총 사 층짜리 건물을 훑는 건 데베르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찾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 쪼아대는 성격상, 어디서 시간을 축내고 있지도 않을 텐데.

“공작님, 누구 찾으세요?”

답지 않게 조급해 보이는 데베르를 향해 소피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데베르의 소문이야 익히 들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소피아의 천성이 말을 걸게 만든 거였다.

안 그래도 층고가 낮은 병원에서 어둠 속의 데베르 공작은 거의 천장만 해 보였다. 먼저 말을 걸고도 겁을 먹은 소피아가 제 두 손을 꼭 쥐었다.

“공작님?”

“……베스 간호사는 어딨습니까.”

데베르는 제 입안을 한번 짓씹었다. 고작 이 질문 따위가 뭐라고.

“베스요? 베스는 지금 창고에 갔는데.”

“감사합니다.”

뱉어내듯 인사를 던진 데베르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병원 밖으로 나가자 색이 더 짙은 어둠이 이르게 다가오는 전초선의 겨울을 말해줬다.

데베르의 걸음을 멈추게 만든 건 희미한 석유 램프의 등불이었다. 불빛에 언뜻 비친 얼굴은 멀리 서 있는 데베르에게도 선명히 보였다.

베스 제인스.

손목시계를 확인한 데베르의 눈이 커브 길을 돌아 작아지는 불빛으로 향했다.

오 분.

딱 오 분의 여유가 있었다. 막사로 향해야 하는 걸음을 베스에게로 돌린 건 충동이었다.

무슨 말을 할 것도 아니었다. 대단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얼굴을 보겠다는 꼴같잖은 욕망도 아니었다. 그저 충동. 이유 모를 충동일 뿐이었다. 마침 시간도 남았으니까.

여자는 누가 제 뒤를 따라오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부지런히 약을 챙기고, 들고 온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또 확인하고를 반복했다.

창고 바깥에 서 있던 데베르의 발 한쪽이 캐비닛 그림자로 들어왔다. 인기척을 감춰주는 사나운 바람 소리조차 그의 편인 듯했다.

얇은 간호복 하나만 입은 베스가 서늘한 바람에 흠칫 몸을 떨었다.

미련스럽긴. 데베르의 성급한 손길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쾅!

“제길.”

하필 그 순간 세차게 분 바람에 안 그래도 낡은 철문이 요란스럽게도 닫혔다. 이에 화들짝 놀란 베스가 놓친 약병들이 정신 사납게 창고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데베르가 제 발치까지 굴러온 약통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그의 머리 위로 철커덕하는 익숙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이제 잘하네.”

몇 발자국 멀리 있던 여자가 눈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저번엔 겁난다고 뒤로 도망가더니.”

데베르는 느리게 허리를 폈다. 그에 맞춰 베스의 시선도 다시금 천천히 올라갔다.

“장전도 하고. 이제 진짜 쏘기만 하면 되겠어.”

여전히 놀란 채 진정하지 못한 베스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데베르가 손에 들린 약통을 흔들었다.

“난 순수한 호의를 베풀려고 한 건데.”

정신없이 짤랑거리는 알약 소리에 베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이 남자는 자꾸만 베스 앞에 나타났다.

베스는 캐비닛에서 약통 하나를 꺼냈다.

남자가 찾던 안정제. 수면제로 쓰이기도 해서 트라우마로 전투가 불가능한 병사들에게 임시방편으로 쓰기도 하는 약. 하지만 모든 약이 그렇듯, 의존은 중독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걱정이 돼 일부러 더 적게 줬었는데.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베스는 던지듯이 약을 건네주고는 얼른 가라는 듯 등을 돌렸다. 하지만 돌아갈 줄 알았던 남자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까워져 오기만 했다.

돌아선 베스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밖은 벌써 캄캄하고, 보초병은 멀리 있다. 창고 문은 닫혔고, 이 협소한 공간에 남자와 둘 뿐이란 생각이 스치자 베스의 어깨가 다시 긴장으로 굳어졌다. 아침에 첩자의 힘줄을 끊던 남자의 모습이 또다시 떠올랐다.

도망가야 하는 걸까.

그새 시커먼 그림자가 베스를 덮었다.

약을 던질 때만 해도 또랑또랑하던 눈망울이 지금은 비 맞은 강아지 마냥 축 처져 있었다.

저 때문에 겁을 잔뜩 먹은 여자를 보던 데베르가 한숨 쉬듯 말을 뱉었다.

“이거 받으려고 온 거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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