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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9화 (9/206)

9화

여자는 사뿐히 베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베스는 애초에 그 자리에 없다는 듯이. 여자의 눈은 오직 데베르만을 보고 있었다.

“위험한 곳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넥서스의 운명이 이곳에 있는데, 발걸음을 안 할 수는 없죠.”

남자의 가슴께에서 올려다보는 발그레한 얼굴이 퍽 사랑스러울 법도 한데, 데베르는 그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데베르의 눈이 아직 저만치 서 있는 베스에게로 옮겨갔다. 멍하니 둘의 모습을 보던 베스가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퍼뜩 등을 돌렸다. 눈치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생각에 베스의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바구니를 든 채 뛰듯이 돌아가는 베스를 보던 데베르가 다시 눈앞의 여자를 쳐다봤다.

금발의 파란 눈. 그가 아는 누구와 닮은 얼굴.

“어머, 여기 피가.”

여자의 손이 데베르의 얼굴로 향했다. 가까이 올 때부터 풍겨오던 인위적인 꽃향기가 더 짙게 풍겨왔다.

“아.”

반사적으로 고개를 피한 데베르로 인해 여자의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찰나의 순간, 햇살같이 해사하게 웃던 여자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이내 푸른 눈이 반달 모양으로 곱게 휘었다. 미처 데베르가 보기 전에.

“죄송해요. 데베르. 당신이 이런 걸 싫어한단 사실을 잊었네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깔며 데베르에게서 한 발 멀어졌다. 어떤 남자든 그 모습을 본다면 데베르를 향해 아리따운 영애의 마음 씀씀이를 못 알아준다며 타박을 놓을 만큼 청초한 모습이었다.

데베르는 물기가 덜 마른 손으로 대충 볼을 쓸며 여자를 지나쳐 갔다.

“아더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리죠.”

“감사해요.”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데베르의 말을 받았다. 데베르의 뒤를 따르는 얼굴엔 여유로움이 그득했다.

* * *

“어머, 라프넬!”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차트를 체크하던 몰리 부인이 반색하며 라프넬을 반겼다. 라프넬 또한 제 친척을 만난 듯 주저 없이 부인의 품에 안겼다.

곳곳에 부상병들이 꾀죄죄한 몰골로 누워있는 병동에서 새하얀 케이프 코트를 입은 라프넬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위험한데 이곳까지 어떻게 온 거야.”

“오는 길이 아군 점령지란 걸 다 알고 왔는데요. 그리고…….”

라프넬이 아더를 힐긋 돌아봤다. 아더의 표정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우스워. 라프넬은 아더를 향해 생긋 웃었다.

“오빠가 다쳤잖아요. 안 올 수가 없죠. 보고 싶은 분도 계시고.”

“어, 그, 그러니?”

라프넬의 노골적인 대답에 몰리 부인이 당황한 듯 데베르를 쳐다봤지만, 데베르는 마치 남의 얘기인 듯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식사라도 함께하고 싶은데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 아쉽네.”

“아니에요. 저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려고요. 넥서스 영애들이 이곳에서 수고하는데, 저만 웨인에서 전쟁은 없는 듯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라프넬!”

참지 못하고 아더가 소리쳤다.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가 있는 곳에서 소리치면 안 되지.”

라프넬이 진정하라는 듯 아더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우리 오랜만에 넷이서 함께 식사해요.”

“좋지. 그런데 지금은 좀 바빠서 나중에 보자꾸나, 라프넬.”

여기저기서 몰리 부인을 부르는 통에 둘의 대화가 짧게 끝나자, 아더가 잇새를 꽉 깨물며 나직이 읊조렸다.

“나 좀 봐.”

아더는 라프넬의 손목을 거칠게 쥐더니, 병원 밖으로 끌고 갔다.

복도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순순히 따라가던 라프넬은 아무도 없는 후문으로 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하얀 얼굴 가득 짜증이 묻어나는 게 데베르를 볼 때와 같은 인물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라프넬의 새된 목소리가 아더에게로 꽂혔다.

“너야말로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여기 온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깐 시끄럽게 굴지 마.”

“폐하는 아시는 거야?”

“폐하가 나 같은 거한테 관심이나 있는 줄 알아? 내가 누굴 만나든, 어딜 쏘다니든 황제께선 전혀 관심 없으셔. 같잖은 걱정하지 마.”

“제발 좀! 얌전히 살아!”

아더의 목에 선 핏대가 터질 듯 부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라프넬의 목소리는 제 오빠와 달리 지독히도 잠잠했다.

“너도 내가 어머니처럼 황궁 뒷방에서 조용히 살다 죽었으면 하니?”

“그런 말 하지 마.”

아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너도 나보고 얌전이니 뭐니 훈수 놓을 생각 하지 마. 내 밥그릇 내가 찾는 거니깐.”

“왜 하필 데베르야. 다른 좋은 귀족들도 많잖아. 원한다면 외국 왕족하고도 혼인할 수 있어. 내가 폐하께 말씀드릴게.”

라프넬은 길게 한숨을 쉬며 아더를 쳐다봤다. 그 눈빛엔 한심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래서 네가 온실 속 도련님이란 거야.

라프넬의 뾰족한 검지가 아더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난, 넥서스 최고의 여자가 될 거야. 두 번째나 세 번째가 아닌 첫 번째.”

아더는 자신과 닮은 눈동자를 내려다봤다. 푸른 눈동자 가득 독기가 흘러내렸다.

대체 널 이렇게 만든 게 뭘까.

“네가 황제가 돼서 날 황후로 앉힐 게 아니라면, 내가 데베르를 원하든, 뒷산의 개새끼를 원하든 신경 꺼.”

라프넬은 제 말만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아더는 멀어져가는 그녀를 지켜봤다. 누군가 라프넬을 알아봤는지 멀리서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제 동생은 천사처럼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고 있었다.

"하.“

하릴없는 답답함이 아더의 숨통을 꽉 쥐었다.

* * *

다시 돌아온 라프넬은 저를 봐달라는 듯 바쁜 병동 한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몰리 부인이 막사로 돌아가려는 데베르에게 병원 안내를 시켜주라 부탁했다.

아더를 찾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간호사들은 자릴 비울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공주를 에스코트 없이 돌아다니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데베르는 볼 것도 없는 병원을 라프넬과 이리저리 다녔다. 애초에 군 병원에서 뭘 소개하란 건지 우스웠지만, 부인의 부탁이기에 그도 군말 없이 따르는 중이었다.

별말 없이 따라다니던 라프넬의 발길이 멈춰졌다.

굳이 까치발을 들어 철문에 난 작은 창을 들여다보는 눈이 반짝였다.

“여긴 뭐예요?”

작은 유리창 너머. 어깨며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자가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라프넬이 오기 직전, 데베르가 사달을 낸 친위대의 격리 병실이었다.

“어머, 너무 아프겠다.”

라프넬은 순진한 얼굴로 데베르를 올려다봤다. 이쯤 하면 설명하란 뜻이 담긴 영악한 얼굴이었다.

사실 이미 눈치는 챘다.

한 사람 더 눕히는 게 아쉬운 전장에서 굳이 격리까지 시키고, 문 앞에 병사까지 배치해 놓다니. 적군 아니면 첩자겠지.

“첩자입니다.”

데베르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한심한 자네요. 감히 넥서스를 배신하다니. 처단할 생각이세요?”

라프넬의 목소리엔 공포감이라던가, 망설임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앞만 보던 데베르가 공주를 쳐다봤다. 그가 하는 짓을 보며 파리하게 질려 있던 베스와 달리, 라프넬은 어쩐지 들떠있기도 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그래야죠. 그래야 군대의 기강이 잡히죠. 전 당신의 이런 단호함이 좋답니다.”

라프넬은 살짝 웃으며 데베르를 보다가 몇 걸음 앞서 걸어갔다. 그와 달리 데베르의 발걸음은 확연히 느려졌다. 아무것도 아닌 그 여자, 베스가 자꾸만 심기를 거슬러서.

후문에서 저를 보았을 때 멈춰지던 발걸음. 지친듯한 얼굴. 그럼에도 선명하던 원망 가득한 까만 눈동자.

그때 왜 그 이름을 불렀을까. 같잖은 변명이라도 하려 그랬던 걸까. 하지만 무슨 이유로.

데베르가 따라오지 않는 게 느껴지자 라프넬이 뒤를 돌아봤다. 무슨 생각 중인지 그의 눈동자는 라프넬이 아니라 허공을 보고 있었다.

데베르와 있는 내내 예쁘게 올라가 있던 라프넬의 입술이 미묘하게 삐뚜름해졌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라프넬도 슬슬 관심 없는 데베르를 끌고 다니는 게 지겹던 참이었다.

“전 간호사들 숙소에 가봐야겠어요.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데베르.”

참다못한 라프넬이 먼저 인사를 할 때에서야 데베르는 라프넬을 쳐다봤다. 언제 딴생각을 했냐는 듯 반듯하게 묵례하는 모양새가 지극히 사무적인 모습이었다.

“건방져.”

아무도 없는 계단. 라프넬의 분에 찬 속삭임이 맴돌았다.

* * *

“아이네스.”

“라프넬?”

얼룩진 간호복을 갈아입으려던 아이네스의 눈이 둥그레졌다. 라프넬의 어릴 적 놀이 동무를 지냈던 귀족 여식 중 하나가 아이네스였다.

“여긴 어쩐 일이야?”

“여기서 다들 고생한다길래 왔지. 오빠도 다쳤다고 하고.”

라프넬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루만 자고 가려고. 그래도 되지?”

“그럼, 당연하지. 근데 다들 바빠서 혼자 있을 텐데 괜찮아?”

“그럼.”

라프넬은 단출한 방을 둘러봤다.

다닥다닥 붙은 낡은 침대와, 옷장이랄 것도 없이 침대 옆에 자리한 각자의 바구니들이 개인물품을 담고 있었다. 다들 제 할 일에만 바쁠 뿐, 방에 있는 이 누구도 라프넬에게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장 병원에서 여태 버틴 귀족 여식은 아이네스 한 명이었다. 먹고살기 바쁜 평민 간호사들이 공주의 얼굴을 알아볼 리 없는 게 당연했다.

“소개해줄래?”

라프넬이 상냥히 말을 건넸다.

“아이네스! 오늘 밤에 어제 못다 한-”

왁자지껄하게 들이닥치던 딕시가 예상치 못한 손님에 입을 다물었다. 뒤따라오던 베스도 갑자기 조용해진 딕시를 눈치채고는 아이네스를 쳐다봤다.

“여긴 라프넬 공주님. 오늘 하루 머물다 가실 거야.”

“앗, 고, 공주님을 뵙습니다.”

딕시가 얼른 제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까딱였다. 라프넬은 침대에 앉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여긴 딕시 콜먼. 부두에서 큰 사업 하시는 콜먼 씨의 막내딸.”

라프넬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소식지에서 그 이름을 본 것도 같았다.

빠르게 근대화되어 가는 넥서스에서 콜먼 같은 부호는 또 다른 계급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래봤자 천박한 피들이. 라프넬은 비웃음을 삼키며 입술을 열었다.

“아이네스와 막역하길래 백작가나 후작가인 줄 알았는데. 여긴 계급 없이 막역하게 지내나 봐?”

라프넬의 뼈 있는 말에 딕시의 얼굴이 벌게졌다. 어조가 부드러워서 그렇지, 실상 하고자 하는 말은 위아래도 없이 지내냐는 뜻이 분명했다.

자신 때문에 불편해진 분위기는 느껴지지도 않는지 라프넬의 눈은 태연하게 뒤따라온 베스에게로 향했다.

“여긴 베스 제인스. 함께 간호학교에 다닌 친구야.”

‘베스.’

데베르가 부르던 여자.

“내가 사교계에서 본 적이 있을까.”

“엇, 베스는 귀족가는 아니야. 하지만 간호학교 내내 수석이었어. 대단하지?”

아이네스가 다급히 칭찬을 덧붙였지만, 라프넬은 듣고 있지 않았다.

“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이네스가 네 말을 다 대신하네.”

입이 없다니.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아이네스도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고, 기가 눌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딕시 또한 잔뜩 마뜩잖은 얼굴로 아이네스를 쳐다봤다. ‘이 여자 왜 이래’ 하는 외침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방 안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설마.

붉은 벨벳 레이스 장갑이 라프넬의 입가로 올라왔다.

“어머, 정말 말을 못 하니?”

탐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가리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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