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자가 도망친 밤-7화 (7/206)

7화

“베스.”

베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데베르를 본 동료 간호사는 ‘나중에 얘기해’라고 말하며 얼른 뒤꽁무니를 뺐다.

부신 햇살에 베스의 눈가가 살풋 찡그려졌다. 햇빛을 등져서인지 남자의 얼굴은 더욱 그늘져 보였다.

새벽 늦게까지 깨어 있더니, 얼마 못 잔 걸까.

베스의 생각을 모르는 데베르는 잔뜩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여자에 왠지 속이 뒤틀렸다.

“도와줬는데 전혀 고맙지 않은가 보군.”

데베르가 접힌 종이를 베스에게 내밀었다.

안정제 처방과 몰리 부인의 서명이 적힌 확인서를 본 베스는 약품 창고로 앞서 걸어갔다.

데베르의 목걸이는 창고 문을 열자마자 다시 베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뺏길세라 흘깃 쳐다보는 베스에게, 데베르는 고갯짓으로 캐비닛을 가리켰다.

저 자그마한 여자에게서 고작 열쇠 따위 뺏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새벽에 봤던 겁에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숲에서 멱살을 틀어 올렸을 때, 바람에 군모가 날아가 머리카락이 쏟아졌을 때 저를 쳐다보던 눈도 그와 비슷했다.

또 완력으로 저 여자가 겁을 낼 만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마음이었다.

악일지언정 목적을 위한 것이면 행해라. 그게 살아남는 길이자 승리의 길이다. 지독히도 부하들에게 떠들어댔는데.

주변에서 치를 떨 만큼 효율을 따지는 놈이 고작 겁주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이 비효율적인 짓을 감내하다니.

아니. 데베르는 생각을 정정했다.

결국에는 뺏을 것이다.

다만, 그 겁먹은 얼굴을 지금 당장은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일 뿐.

그 사이 베스가 약을 건넸다. 평소에 데베르가 가져가는 것보다 훨씬 작은 통이었다. 데베르의 날 선 목소리가 으름장을 놓았다.

“젠장. 나랑 맨날 보고 싶어? 똑바로 된 거 가져와.”

베스는 의약 확인서를 꺼내 ‘용량’ 부분을 남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약의 이름은 있었지만, 용량은 적혀 있지 않은 부분을.

“귀찮게 굴지 마.”

문을 잠그려는 베스의 손 위로 열쇠를 뺏으려는 데베르의 손이 겹쳤지만, 베스가 조금 더 빨랐다.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뛰어간 베스는 재빨리 제 목에 목걸이를 걸고, 열쇠를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지난 숲길에서처럼 옷을 벗으라는 명령이 있지 않은 이상, 이보다 안전한 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하.”

데베르가 한쪽 손을 바지춤에 집어넣고 삐딱하게 섰다.

그 모양새가 제국의 공작이 아니라, 웨인 뒷골목의 시정잡배처럼 불량해 보였다. 그의 손 위에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착지했다를 반복하는 약통이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베스는 여차하면 달아날 생각으로 옷 안의 목걸이를 꽉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데베르가 약통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래, 결국엔 뺏을 텐데.

약통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여전히 단정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큰 키에 벌어진 어깨와 깔끔하게 드러난 이마가 아까와 달리 흠 없는 군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데베르는 여전히 목걸이를 꽉 쥐고 있는 베스에게로 다가갔다. 여자는 딱 그의 가슴께만큼 왔다. 그래, 숲에서도 딱 이 정도까지 닿았던 것 같다.

데베르는 저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내려다봤다.

“그럼 우린 더 자주 보는 수밖에요. 베스 간호사님.”

가히 신사적인 말투와 그렇지 못한 표정이었다.

* * *

“봤어? 봤어? ‘예우를 지켜.’ 너무 멋있지.”

낙이라곤 없는 전장 병원에서 미혼 간호사들의 유일한 낙은 잠들기 전 속닥거리는 수다 시간이었다. 그들은 모두 웨인 간호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이었다.

몰리 부인이 귀족과 평민이 함께 공부하는 학교를 짓겠다 했을 때, 항간에선 귀족의 위선 혹은 허풍이라 욕했지만, 전초선까지 나와 있는 그녀들을 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인의 가르침을 받아 함께 전장으로 온 간호사들 또한 그녀의 가르침을 존중했다. 해서, 간호사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땐 계급에 상관없이 막역하게 지냈다.

전장으로 온 이유도 가지각색이고, 웨인으로 돌아가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그들이지만, 이곳에선 모두가 동료이자 친구이고 가족이었다.

물론 얼마 전 후방병원 공습처럼 변절자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 굳이 떠난 사람들의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삶에 가까운 얘기만 나누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본 중 최고는 데베르 공작님이야.”

얘기의 주축이 되는 사람은 항상 딕시였다. 상업으로 떼돈을 번 장사치의 딸답게 그녀의 얘기는 어쭙잖은 라디오보다도 훨씬 즐거웠다.

“넌 정말 잘생기면 다구나.”

아이네스가 못 말린다는 듯 딕시의 말에 대꾸했다.

“영애께선 약혼자가 계시니 아무리 소문난 미남이라도 눈에 차실까요.”

딕시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아이네스의 볼이 빨개졌다.

베스는 아이네스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봤다. 하루 중 반지를 낄 수 있는 때는 잠시 잠드는 시간뿐인데도, 아이네스는 한 번도 반지를 잊지 않았다.

베스가 손에 들고 있던 메모지에 글을 썼다.

[백작님 소식은 들었어?]

아이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이번에 데베르 공작님 작전이 실패하면서 거기에도 영향이 간 모양이야.”

딕시의 재간으로 들떴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약혼식을 하자마자 헤어져야 했던 아이네스는 약혼자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기 위해 간호 부대에 지원했다. 가끔 도착하는 편지에 아이네스가 얼마나 들뜨는지, 또 걱정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베스가 아이네스의 어깨를 감쌌다.

“자, 자. 우는소리 그만하고. 다 살아서 갈 거야.”

딕시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돋웠다.

“다들 알지? 우리 아부지가 딱 촉 왔다 하면 대박 나는 거. 그 촉 물려받은 유일한 딸이 나야. 그러니깐 다들 걱정 붙들어 매.”

딕시가 베스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투덜거렸다.

“약혼자 따라온 거는 로맨틱하기라도 하지. 나는 뭐야 정말.”

“왜?”

베스처럼 늦게 몰리 부인의 병원에 합류한 소피아가 물었다. 그 물음에 다들 작게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딕시가 ‘불쌍한 나 좀 보소’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위로 언니만 여섯 명이야. 위에 언니 세 명? 부자랑 결혼했지만, 작위가 없어. 자고로 투자는 여러 곳에 해야 하는 법이지. 그래서 아버지가 수 쓴 거야. 나를 이 전쟁터로 보내서, 전쟁에 눈이 회까닥한 귀족 영식을 꼬시라고. 전쟁과 군인과 간호사. 각이 나오지?”

“아니, 그러다가 행여나-”

“지원하기 직전에 점을 봤는데 나는 살아서 온대. 그 점쟁이가 진짜 용하거든. 우리 집에서 애를 열 명 더 낳아도 아들은 안 나온다 했는데, 맞잖아?”

딕시가 길게 하품을 했다.

“그래도 본 중 최고는 역시 데베르 공작님이다.”

“베스, 넌 얘기도 해 봤잖아. 진짜 소문처럼 광증이 있고 그래?”

기대에 찬 시선들이 베스에게로 꽂혔다.

데베르가 베스에게 소리 지른 날, 베스는 나이트 근무를 하느라 몰랐지만 다들 데베르에 관해 떠드느라 바빴었다. 소문이야 무성했지만, 데베르를 직접 대하는 사람은 몰리 부인을 제외하곤 없었기에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게 그들의 한이었다.

그런 데베르가 어젯밤 베스에게 그 난리를 쳤으니. 무료한 생활에 오랜만에 가십이 생긴 거였다.

베스는 곰곰이 생각을 이어나갔다.

새벽에 창고 안에서 그를 봤을 때, 베스는 그야말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나이트가 걸리면 다들 총을 소지하고 다녀야 했기에 들고는 있었지만,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벌벌 떠는 제 손 위에 겹쳐졌던 차가운 느낌이 선명했다.

‘이제 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며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잿빛 눈동자.

‘그럼 우린 더 자주 보는 수밖에요. 베스 간호사님.’

잔뜩 건방진 표정과 달리 단정한 말투.

‘벗어.’

지독히도 저를 절망케 하고.

‘네 그 건방진 구원을 나도 받았으면 좋겠군.’

더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던 남자.

그리고…….

종이 위를 스칠 듯 말듯 하는 베스의 펜촉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똑똑.

“헉, 몰리 장군이다.”

다들 잽싸게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몰리 부인이 문을 열었을 땐 다들 세상모르고 자는 척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는 척을 하려면 불이라도 끄렴.”

부인이 작게 한숨을 쉬며 불을 껐다. 언제까지 이 철부지 아가씨들의 사감 노릇을 해야 하려나.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고문이라면 고문이었다.

부인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다시금 소곤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불이 꺼져 더는 베스의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되자, 딕시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옮겼다. 베스는 가만히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미처 적지 못했던 대답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데베르를 떠올렸다.

아직도 나를 의심할까.

신원을 확인하면 주겠다던 사망금 증서는 아직이었다. 더 확인할 게 있는 건지, 아니면 확인을 해도 확신은 하지 못한 건지.

한 번 물꼬를 튼 생각은 점점 더 퍼져갔다.

일부러 약을 적게 준 게,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는 걸 알면…….

그 남자는 또다시 건방진 구원이라 비웃을까.

* * *

애초에 상처가 깊지 않았던 아더는 재활운동을 한다고 핑계를 대며 병원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어찌나 붙임성이 좋고 능글맞은지, 그와 대화 한번 해 보지 않은 간호사와 의사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더 공작! 전화 받아요!”

몰리 부인이 계단 아래에서 떠들고 있는 아더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 재밌는 얘기 중이었는데. 내 다시 돌아와서 마저 얘기해 주지.”

아더가 싱글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병원장실 문이 닫히고 나자, 호쾌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굳어졌다.

“무슨 일이야.”

[나인 줄 어떻게 알았지?]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아더의 푸른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웃지 않는 눈매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이에겐 좀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너 말곤 이 전쟁통에 전장으로 전화를 걸 사람은 없으니깐.”

[황제께서 연락하지 않나 봐?]

아더는 목구멍을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나오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헛짓거리하지 마. 왜 전화한 거야.”

[오랜만에 얼굴 볼 거 같아서 연락했어.]

얼굴을 본다고? 아더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마 지금 여기로-”

[그리고 헛짓거리는 네가 하는 그 광대놀음이지.]

아더의 말을 끊어먹은 여자는 앙칼진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제길.”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더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덜 떨어진 감정을 남에게 보일 순 없으니까. 습관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나서야 병원장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이는 모두가 사랑하는 싱그러운 황자였다. 저열한 표정의 아더 메이너는 황자의 가면 뒤로 숨은 채였다.

“얘기가 재밌는 데서 끊겼지?”

순간, 정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 데베-”

이런. 반갑게 인사하려던 아더의 표정에 낭패감이 스쳤다.

데베르는 목표물을 찾는 짐승처럼 중앙 병동으로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군사를 뒤에 이끌고 들이닥친 데베르에게로 향했다. 부상병의 붕대를 갈던 베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기등등한 걸음은 곧장 베스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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