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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도망친 밤-6화 (6/206)

6화

“뭐 하는 짓-”

베스의 부드러운 손이 데베르의 셔츠 깃에 닿았다. 순간 데베르의 숨이 멈췄다. 낯설다 느껴졌던 향이 코앞까지 다가와서일까.

목덜미를 스치는 미약한 온기는 숲길에서 느꼈던 여자의 입안보다는 훨씬 미지근했다.

베스는 조심스레 셔츠 속에 감춰진 목걸이를 꺼냈다.

찾았다.

베스의 입가가 살짝 호선을 그렸다. 열쇠를 확인한 베스는 힘껏 목걸이를 잡아 뺐다. 남자의 목울대가 울렁였지만 베스는 알지 못했다.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은 베스는 재빨리 문을 잠그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혹시 잡으러 오나 싶어 한 번 뒤를 돌아봤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건방지긴.”

데베르는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냈다. 비워진 목이 허전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고요한 어둠 속, 반딧불이와 어울리지 않는 데베르의 라이터 불빛이 아른거렸다. 시가에 불을 붙이려다 문득 여자가 뛰어갔던 길로 눈을 돌렸지만, 텅 빈 길만이 데베르를 반겼다.

잽싸기도 하네. 숲에서는 벌벌 떨어대더니.

이젠 닿을 이 없는 매캐한 시가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뱉어내는 연기처럼 데베르의 사념 또한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뭐야, 총 맞은 건 난데 왜 네 얼굴이 더 후진 거지?”

배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던 아더가 데베르를 보자마자 한 첫말이었다.

“헤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언제 소식을 듣고 웨인에서 온 건지. 호사가 알렌 백작이 실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참 소식 하나는 빠른 자였다.

데베르는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빈 의자를 끌어 앉았다.

아더는 그런 제 친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안 그래도 무섭고 우울하게 생긴 놈이 잠이라도 설친 것인지, 평소보다 눈이 더 깊이 꺼져 보였다.

데베르가 튀어나온 눈썹 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못 잤어.”

“아니-”

무슨 말을 하려던 아더가 알렌의 눈치를 봤다.

“떨어졌어?”

주어가 생략된 문장을 알아듣는 이는 데베르가 유일했다. 약이 떨어졌나 묻고 싶은 거겠지.

“어쩌다가? 몰리 부인에게 열쇠도 받았잖아.”

“그럴 일이 있었어.”

새벽에 막사로 돌아온 데베르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그저 신경 거슬리는 일에 대한 예민함 때문인지. 애꿎은 시가만 연달아 피워대다 아침 일찍 병원으로 온 것이었다.

데베르의 눈이 병실 구석에서 드레싱을 하는 베스에게로 옮겨갔다.

오늘 새벽. 달빛에 비쳤던 놀라 동그래진 눈, 겁먹은 표정, 그리고 이내 긴장이 풀려 내려가던 어깨, 목걸이의 열쇠를 발견하고 살짝 올라가던 입꼬리까지.

꽤 다양한 모습을 본 것 같았는데. 오늘 아침의 베스는 어제저녁 병실에서처럼 여상한 얼굴이었다.

“공작님이 보셔도 예쁘죠.”

데베르의 시선을 눈치챈 알렌이 은근히 물었다.

틈이라곤 찾을 수 없는 데베르에게서 여자라는 공통분모라도 찾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공작에게 잘 보이라는 제 아버지에게 드디어 거드름 한 번 피워볼 기회일지도 모른다.

가십이라면 할 말 많지. 알렌이 입술에 침을 묻혔다.

“처음에 웨인 간호학교에 베스가 왔을 때, 죄 귀족 놈들이 얼굴 한 번 보겠다고 기웃거렸거든요.”

데베르가 제 말을 듣는 것 같아 보이자, 알렌은 더 신이 나서 나불대기 시작했다.

“근데, 좀 이상해요.”

“이상?”

아더의 물음이었다.

제국의 황자와 공작의 관심이라니. 흥감한 알렌은 손동작까지 섞어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데베르의 시선은 여전히 베스에게 가 있었다. 드레싱을 마친 베스는 차트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흰 소매만큼이나 하얀 손이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뭔가 행색이나 분위기로 봐선 평민 딸은 아닌데. 저 나이까지 데뷔탕트를 안 했으니, 귀족도 아니잖아요?”

“말을 안 하는 건?”

“말을 안 하는 건지, 뭔 사고로 못 하는 건지, 날 때부터 타고난 건지. 아무도 모릅니다.”

“수화하는 거 같진 않던데.”

그래도 하룻밤을 병원에서 보냈다고 아더가 아는 체를 했다.

“항간에선 뒷골목에서 난 거 아니냐는 말도 있어요. 뭐, 낭설이긴 합니다. 몰리 부인이 그런데서 데려온 애를 후원하시진 않을 테니까요.”

“어이, 거기. 검정 머리 아가씨.”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병실에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허버트 소위. 사업으로 성공한 제 아버지의 재산 하나 믿고, 천지 분간 못하며 아랫도리를 놀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한 자였다.

“저 새끼가.”

이를 아는 아더의 입에서도 험한 말이 나왔다.

‘검정 머리’란 소리에 고개를 든 베스가 허버트를 쳐다봤다.

허버트는 과장되게 제 오른팔을 감싸며 손을 팔락거렸다.

“나, 여기가 찢어진 거 같아. 아이고, 너무 아파. 아, 아!”

다리 부러진 놈이, 웬 팔 타령. 너무나 빤한 속셈에 아더는 혀를 내둘렀다.

오른팔엔 작은 찰과상에 붙여진 거즈뿐이었다. 그나마도 아침에 몰리 부인이 새로 갈아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데베르의 시선 끝에 있던 베스가 허버트의 베드 옆으로 다가갔다. 제 안쪽 볼을 혀로 쓸어내리는 데베르의 표정이 퍽 살벌했다.

베스가 소위의 상처를 살폈다. 더 손댈 것도 없는 깨끗한 상태를 본 베스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아니, 한 번 자세히 보라고!”

돌아서는 베스의 팔을 허버트가 확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악력에 베스의 몸이 순식간에 허버트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허버트 소위!”

아더의 고성과 동시에 데베르가 일어났다.

쾅!

내리찍는 파열음과 함께 일순간 병동에 정적이 찾아왔다. 소위의 베드 위로 거즈와 핀셋, 연고 따위들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가쁜 숨을 내쉬는 베스의 손엔 빈 트레이가 들려 있었고, 숙여졌던 고개를 천천히 든 허버트의 코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가 방금의 사건을 설명해줬다.

‘베스’를 부르려던 간호사들도, 주사를 맞던 다른 부상병들도, 수술 베드를 끌고 오던 의사들까지. 모두 입을 딱 벌린 채 눈앞의 상황을 믿기지 않는 눈길로 바라봤다.

허버트가 제 얼굴에 흐르는 뜨듯한 걸 손으로 훔치자 누군가 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피? 피?!”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허버트가 인상을 험악하게 굳히며, 오른팔을 확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프다며 징징댔던 그 팔을.

“이 계집애가!”

“허버트 램지.”

서늘한 표정의 데베르가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데, 데베르 대장님.”

갑작스러운 군대장의 등장에 허버트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금방이라도 여자를 치려 했던 파렴치한에서, 순식간에 독 안에 든 쥐 모양새를 하는 게 꼴사나웠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허버트는 감히 데베르를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같은 말을 되뇌는 데베르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제, 제가 간호사에게 상처를 봐달라 했는데…. 보지 않고 갔습니다.”

아더가 알렌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 새끼 이제 뒤지겠구먼이란 뜻을 잔뜩 담은 제스처였다.

“저번엔 부대에 쥐새끼가 있더니.”

얼마 전, 형체도 모르게 불에 타 죽은 통신병 소식은 부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허버트 또한 그 시체를 봤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발정 난 개새끼도 있었군.”

“푸흣.”

아더가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신사처럼 생겨서 참 저급한 소리를 잘해.”

아더가 알렌에게 속닥거렸다.

“발정 난 건 맞죠. 이번에 전장으로 온 것도 유부녀 부인과의 스캔들 때문에 그 남편 피해서 온 거라던데.”

알렌 또한 지지 않고 받아쳤다.

“이분들은 넥서스를 위해 전초선까지 오신 분들이다. 예우를 지켜.”

“옙!”

잔뜩 기합이 들어간 허버트가 손을 들어 경례 표시를 했다.

“자네에 대한 처분은 고민해 보도록 하지.”

여전히 부동자세로 굳은 허버트는 흉하게 줄줄 흘러내리는 피를 닦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의료진이 없어도 할 수 있겠지.”

“예, 옙!”

데베르는 여전히 트레이를 꽉 쥔 베스의 손을 흘긋 보곤 바로 등을 돌렸다. 여자의 눈길이 자신을 향해있다는 걸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저 여자의 얼굴을 또 보면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 아플 것만 같아서.

병원장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데베르는 픽 헛웃음을 쳤다.

하긴. 언제부터 서로 눈 맞추는 사이였다고.

* * *

똑똑.

“네, 들어와요.”

서류를 정리하던 몰리 부인이 데베르를 발견하곤 미소지었다.

“데베르 공작, 아니 대장께선 무슨 일로.”

“혹시, 열쇠 여분 있으십니까.”

‘열쇠’라는 말에 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잃어버린 건가요.”

“……뺏겼습니다.”

뺏기다니. 부인의 표정이 더욱 아리송해졌다. 그리고 이내 데베르의 입에서 나온 ‘베스’라는 이름을 듣고서야 모든 상황이 훤히 이해됐다.

어젯밤은 베스가 나이트였다. 아마 창고를 갔다 데베르를 만났을 것이고.

몰리 부인은 간호학교 시절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약품 창고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전장에서 약은 생명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거래의 수단이고, 더 나아가선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도 있다고.

심지어 얼마 전, 병원 공습까지 목격했던 베스 아닌가. 상대가 군대장이건 황제이건 그 아이라면 열쇠를 빼앗았을 것이다.

“알다시피 열쇠장이까지 뒷거래를 하는 통에 지금은 여분의 열쇠를 만들 수도 없어요. 하나 남은 내 열쇠는 병원 것이어야 하고.”

부인이 서랍에서 의약 확인서를 꺼냈다.

“어떻게, 베스를 잘 구슬려보는 수밖에.”

마지막 서명을 한 부인이 확인서를 내밀었다. 그러나 데베르가 받기 직전, 손을 거두었다.

부인은 이젠 청년이 되어버린 데베르를 바라봤다. 어릴 적, 부인의 집 문 앞에서 울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이는 소년이 됐고, 군인이 됐으며, 결국은 군대장이 됐다. 제 아버지처럼.

“황제 폐하께선 이걸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 하더군.”

부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그 말을 믿지 않아. 어떻게 데베르, 네가 작은 희생이 될 수 있는지. 복용과 남용은 한 끗 차이야. 호전을 넘어선 중독은 또 다른 병을 부른단다.”

마주 본 부인의 표정은 결연했다. 오랜 세월 담아둔 말이 넘칠 듯이 쏟아졌다.

“데베르, 네가 위험한 선에 걸쳐 있다는 건 알겠지. 폐하가 왜 너에게만, 엄격한 기준의 예외를 허용하는지 모르는 거니.”

데베르는 모르지 않았다. 그의 위태로움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황제는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어쩌면 더 큰 위협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길 빌고 있는지도 모르지.

데베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계단을 내려가던 데베르가 멈칫하며 손으로 벽을 짚었다. 슬슬 어지러움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약을 사흘 이상 먹지 않은 적은 없었다.

도대체 그 여자는 어디 처박혀 있는 건지.

소란이 있었던 병실로 돌아가도 쓸데없는 이들만 있을 뿐, 여자는 없었다. 병실을 나온 데베르의 군화 소리가 조금 더 빠르게 복도를 울렸다.

균열이 간 낡은 창문 사이로 사늘한 아침 바람이 불어왔다.

“베스, 괜찮아?”

그리고 이젠 익숙하다 못해 제게 들러붙은 듯한 그 이름이 함께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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