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군대장의 고성에 북새통 같던 병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나 죽네’ 소리를 하며 끙끙거리던 병사들도 상관의 노성에 입을 합 다문 채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제 등이 보이지 않도록 벽에 붙어선 데베르의 눈이 혈기로 번뜩였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곳으로 몰리 부인이 급히 다가왔다.
“베스, 여긴 내가 볼 테니 7번 베드 지혈제 가져와.”
베스는 몰리 부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부인이 말한 베드로 향했다. 한 치의 미련도 없는 그 뒷모습에 데베르의 질긴 시선이 들러붙었다.
“뭐해, 다들! 환자 두고 넋이 나갔어!”
부인의 일침에 잠시 멈춰졌던 실내가 다시금 시끌해졌다.
“아아! 살살 만지라고!”
“5번 베드 수술 필요합니다!”
주위가 완전히 소음으로 뒤덮이고 나서야 부인은 숨을 몰아쉬었다. 저번 밤부터 맘을 놓을 수 없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노상 전장이 그렇긴 했지만.
아더의 환부에 소독약을 부어 넣으며 부인은 잠잠히 말했다.
“자네를 모르는 애야. 적당히 이해해줘요.”
데베르는 답지 않게 성마른 손길로 제복 재킷을 주워 입었다. 다들 힐긋대며 저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오직 한 명. 베스만이 제 할 일에만 골몰해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데베르의 굳게 잠긴 입술이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삼켜냈다.
몰리 부인은 그사이 아더의 왼쪽 복부에 박힌 총알을 핀셋으로 꺼내는 중이었다.
“깊지 않아 다행이야.”
“나 같은 미남은 죽기엔 너무 아까워서. 윽!”
아더는 그새 살만해졌는지 나불대다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처박았다.
“그러게. 넥서스 공작 중 미남이라곤 둘 뿐인데 살아서 가야지.”
“들었지? 나 보고 미남이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한 곳만을 지독하게 응시하던 데베르는 병실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뻗쳐오는 그의 기세에 누워있던 병사들도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갔고, 카트를 끌던 의사도 행여 데베르와 부딪힐세라 재빨리 구석으로 갔다.
“주목.”
나직한 한 마디에 끓어오르던 소음이 순식간에 멎었다.
“알다시피 ‘여명’은 실패했다.”
큰 키와 단련된 체격. 잿빛 눈동자에 범람하는 살기까지.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는 데베르는 그 어느 때보다 제 천박한 별명들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분명 이 중에 미처 찾아내지 못한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겠지.”
베스는 불과 몇 발자국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등을 가만히 바라봤다.
흔한 자상이나, 찰과상의 흉터가 아니었다. 채찍에 맞고, 살이 채 차오르기 전에 또다시 맞고. 오래된 채찍질만이 그런 자국을 낼 수 있었다. 베스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았다.
하지만 넥서스 군대장을 누가.
꼭 자신을 보는 시선을 알고 있다는 듯, 남자의 시선이 한번 베스를 스쳤지만 찰나였다.
“다행히 연합군이 왔다. 넥서스는 반드시 승리만을 가져간다. 회복에 힘쓰도록.”
뭐가 그리 심기가 불편한지 이를 꽉 깨문 채 병실을 나가는 데베르를 향해 아더가 ‘진짜 가?’ 하며 제 친구를 붙잡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데베르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그대로 침대로 뉘었다. 녹슨 철제 프레임이 그의 무게를 못 이겨 삐걱거렸다.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부대원들이 얼추 회복하면 연합군과 함께 다시 전투에 뛰어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원치 않는 휴식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전쟁의 끝자락에서 데베르 또한 역력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억지로 눈을 감아본들 지끈거리는 두통에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마른 시가를 물고 잠시 고민하던 그는, 서랍 속 손에 익은 안정제를 꺼냈다. 하지만 곧 나직한 욕설과 함께 텅 빈 약통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필이면 오늘.
약품 창고로 갈까 고민했지만, 병원은 아직 소란스러울 터였다. 굳이 약을 찾는 제 꼴을 누구에게든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고.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 끝으로, 그 연기 속을 부유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기가 닿을세라 물리던 손. 그럼에도 결국은 피하지 못하고 잿빛 연기를 온전히 맞던 말간 목덜미와 찌푸린 눈.
그리고 오늘. 흉터를 보고 작게 벌어진 입술까지.
흉터의 의미를 알고 놀란 걸까. 아니면 그저…….
위스키를 병째 들이켜던 데베르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알코올 속에 제 머리통을 집어넣고 싶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마른 손이 거칠했다. 그 안의 표정은 데베르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목구멍에 들이부어지는 술이 그의 바람을 들어준 걸까.
곧 눅진한 잠기운이 데베르를 덮쳐왔다.
* * *
꿈은 흐릿했다. 열넷, 열다섯쯤.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소년은 떨고 있었다. 그 앞엔 아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버지 카시우스 공작이 서 있었다. 여느 때처럼 감정이라곤 없는 모습으로.
그는 주저 없이 아들의 목을 잡아 눌렀다. 우악스런 손아귀 힘에 망설임은 없었다.
‘큽…. 아버….’
발버둥 쳐봐도 아버지의 악력은 더욱 세지기만 할 뿐. 목을 쥐지 않은 손에 들려 있던 채찍이 높이 들려 올라갔다. 어린 눈동자가 겁에 질렸다.
‘잘, 잘못….’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었다.
열여덟의 데베르 앞에 제복을 입은 카시우스가 서 있었다. 어느새 아버지보다 자란 아들은 매끈한 장총의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데베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자 최악의 장면.
탕!
“헉… 헉…….”
데베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세차게 뜀박질하는 심장이 귓가를 둥둥 울렸고, 식은땀으로 축축한 몸이 한기로 썰렁했다.
“제길! 빌어먹을!”
데베르의 악다구니와 함께 그의 손에 잡힌 온갖 물건이 제 위치를 잃고 바닥에 내리꽂혔다. 둔탁한 소음이 새벽 막사의 정적을 깨뜨렸다.
얼추 잊힌 기억인 줄 알았는데.
병원에서 그 여자에게 흉터를 들킨 게 기억 너머의 악몽을 불러 왔을 수도 있다. 아니면, 흔치 않게 약 없이 자는 밤이어서거나.
위스키병을 흔들어도 바닥난 술병은 위안이 되지 못했다.
새벽 3시.
데베르는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막사 밖은 풀 벌레 우는 소리만이 가득했고, 곳곳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금 이곳을 과연 누가 피 튀기는 전장이라 할 수 있을까.
데베르는 고요함에 익숙지 않았다. 기억이 닿는 가장 오래전부터 손에 총과 칼이 들려 있었다.
어린 데베르의 하루를 채우던 소리는 또래들의 목소리가 아닌, 총포 소리와 칼날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였다. 조금 더 커서는 전장의 포탄 소리와 사람들이 죽어가며 내지르는 공포에 찬 비명이었고.
그랬기에 지금처럼 고요함 속에 있을 때면, 데베르는 꼭 제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평화로워 거짓인 동화처럼.
데베르의 생각대로 대부분의 병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병원이 아닌 약품 창고로 가는 샛길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사람은 없었다.
데베르는 셔츠 아래 숨긴 목걸이를 꺼냈다.
목걸이에 달린 열쇠로 창고 문을 열고, 맨 안쪽 캐비닛 속의 약을 꺼내는 건 이젠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과나 다름없는 일을 하고 나가려는데,
“흡.”
낯선 총구가 데베르를 향해 반짝였다.
숨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곳에 보이는 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누군가와 달빛을 받은 반질한 총구 하나뿐이었다.
데베르가 한 걸음 내딛자 은은한 빛은 그의 얼굴 또한 반쯤 비춰 줬다.
본래 아군 진영이더라도 어둠 속에선 상대를 보자마자 관등성명을 하는 게 규칙이다. 대답하지 않을 시, 적군으로 인식하고 신속히 공격하기 위해서.
이 규칙의 유일한 예외가 데베르와 아더였다. 제국의 전쟁귀와, 황자를 못 알아볼 위인은 부대에 없으니까.
전장도 아니고, 아군 병원 창고에서 제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 데베르는 실소가 나왔다. 심지어 얼굴까지 얼추 비춰 줬는데도, 상대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있었다.
어둠에 유난히 밝은 그의 눈에 곧 인영의 형체가 뚜렷해졌다.
오늘 밤, 저를 악몽으로 이끌고, 이 새벽에 이곳으로 와 약이나 찾게 한 그 여자. 베스.
데베르가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총은 제 손에 있으면서도, 거침없이 다가오는 남자에 베스가 더듬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좁은 곳에서 뒤로 물러나는 게 최악의 수라는 것쯤은 알아야 할 텐데.
데베르는 여자에게 전해주지도 않을 같잖은 충고를 떠올렸다.
곧 데베르의 가슴팍과 서늘한 총구가 맞닿았다.
베스는 총구 너머로 느껴지는 남자의 탄탄한 근육과, 그가 내쉬는 숨을 따라 가만히 움직이는 총부리의 낯선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데베르는 베스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침잠하는 중이었다. 베스는 그 눈빛이 무거웠다. 막사에서 저를 짓누르던 시가 연기처럼, 그의 시선 또한 미묘한 압박감을 주었다.
남자의 손이 총구로 올라왔다. 총을 뺏으려나 싶어 움찔하는데, 예상과 다르게 남자의 손은 덜덜 떨리는 베스의 손으로 향했다.
데베르는 제 손에 여자의 손을 겹치고는 총구 위를 잡아당겼다. 철컥하는 장전 소리가 적막 속에서 울려 퍼졌다.
“슬라이드도 안 한 상태에서 어떻게 총을 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힘 세?”
뜬금없는 물음에 베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의중을 모를 남자의 눈은 베스만을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안 센 거 같은데, 팔꿈치를 조금 굽혀. 반동 못 이겨.”
데베르의 손이 이젠 여자의 가는 팔로 향했다. 그의 뜻대로 뻣뻣한 팔꿈치가 조금 굽혀졌다.
“이제 쏴.”
베스는 멀거니 데베르를 올려다봤다.
둘의 시선이 맞춰지고 몇 초나 지났을까. 데베르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쏠 생각은 없나 보군.”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겨눠진 총이 툭 떨어졌다.
여상한 얼굴로 창고를 떠나려는 데베르의 앞을 베스가 재빨리 막았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베스는 자신을 우습게 지나치는 데베르의 손에서 잽싸게 약통을 뺏었다. 병실에서처럼 대거리라도 할세라 얼른 몇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다행히 남자의 표정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감정의 깊이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약을 더 챙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남자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왜, 아까 전처럼 벗겨보지.”
캐비닛으로 가는 베스의 등 뒤로 남자의 건조한 말투가 따라붙었다.
베스는 잠시 고민했다. 저 남자의 권력은 어디까지일까, 그 권력은 병원장의 고유 권한까지 넘나들 수 있는 걸까, 하는 고민 말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원칙은 원칙이다. 저 남자가 군대장이건 황제이건 간에 허락받지 않은 자가 전장 약품 창고를 오갈 수는 없다.
당장 어제 후방병원 공습만 봐도.
베스는 묻으려 애썼던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고개를 저었다.
벽에 기대선 데베르는 여자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약을 집어넣고 캐비닛 문을 단단히 닫더니, 이내 무슨 다짐이라도 했는지 제법 단호한 얼굴로 다가왔다. 겁을 집어먹고 물러섰을 때는 언제고.
“없어.”
찬찬히 저를 훑어내리는 여자를 보며 데베르가 말했다.
부지런히도 깜빡이는 속눈썹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동그란 눈이 위로 향했다. ‘아’하고 여자의 작은 입술이 벌어졌다.
데베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 베스의 손이 먼저 뻗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