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20화
에린은 페르딘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을 나서니 주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제국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둘이 함께 있으니 당연히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아카데미를 벗어난 페르딘이 에린과 눈을 마주쳤다.
“혹시 지금 황궁에 함께 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에린은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궁에요?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마물들이 요즘 늘어난 건가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에린의 머릿속에 온갖 나쁜 상상들이 떠올랐다.
혹시 국경의 마물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넘쳐나는 걸까.
비록 아실리 공작이 스물다섯이 넘기 전까지 소드 마스터의 의무에서 자유롭게 해 주겠다 장담하긴 했었지만, 그런 약속도 어길 만큼 급한 상황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런 거라면 페르딘이 바쁜 와중에도 아카데미까지 행차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에린의 표정에 페르딘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단지 에린 경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황궁에서 저와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요?”
“네, 그때 말씀드렸던 호수에 함께 가고 싶어서요.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말씀드릴 것도 많고요.”
페르딘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릴리아를 찾고 있었다. 릴리아는 아카데미의 정문 앞에서 마법학부 학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에린이 검술 학부에서 유명한 것과 비슷하게 릴리아는 마법 학부생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다.
이윽고 페르딘과 에린을 발견한 릴리아가 씩 웃어 보이며 에린에게 뛰어왔다.
“에린! 기다리고 있었어.”
릴리아의 얼굴은 매우 밝았다.
항상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소녀는 없었다.
에린은 릴리아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과거를 극복했다는 걸 깨달았다.
“페르딘, 공간 이동 마법은 이따가 사용할 테니까 잠시 둘만 얘기하게 해 줘.”
릴리아의 말에 페르딘은 에린을 돌아보았다.
그는 한순간도 에린이랑 떨어지기 싫었지만, 지금은 곁을 양보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곧 페르딘이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릴리아가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러곤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에린은 놀란 얼굴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다.
하지만 릴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행복해서 흘리는 눈물이야.”
“행복해서 흘린다고요?”
“얼마 전에 칼립스가 꿈에 나왔거든.”
릴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는 것 같았어. 자기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내 꿈에 나왔대.”
“…….”
“여신님이 도와주셔서 꿈에서도 나올 수 있다고 했어.”
릴리아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보고 이제 괴로워하지 말래. 행복하게 살라고 그랬어. 자기는 정말 좋은 곳에 있다고 그러면서 말이야.”
릴리아는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다. 에린의 얼굴 역시 울듯이 일그러졌다.
“잘됐어요, 릴리아 경. 정말…… 잘됐어요.”
에린의 말에 릴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단순히 꿈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 꿈을 믿기로 했어.”
칼립스의 복수는 에린이 대신 끝낸 상태였다.
릴리아는 어쩌면 복수를 끝냈다는 후련함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꿈꾼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그 꿈이 진실이라 믿기로 마음먹었다. 칼립스가 죽은 이후 그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칼립스가 나한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서…… 그러기 위해 온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
릴리아는 에린을 껴안은 뒤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에린은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기운을 뿜어내었다.
릴리아가 우는 모습을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주변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아카데미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한 뒤 도망쳤다.
“크응. 이제 괜찮아. 고마워 에린.”
릴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 보자. 그리고…… 칼립스의 복수를 해 줘서 정말, 정말 고마워.”
“…….”
“나쁜 사람들도 전부 사라졌으니까, 우리 전부 행복하게 잘 살자 이제.”
에린은 릴리아의 따뜻한 말을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에린과 릴리아의 대화가 끝난 뒤 도착한 페르딘은 그들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상태였다.
잠시 대화를 한다더니 왜 운 것 같은 얼굴이란 말인가. 페르딘은 릴리아를 향해 눈을 흘겼다.
릴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알렉시스와 비슷한 릴리아의 모습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걱정 어린 얼굴로 에린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에린 경?”
“아니요, 릴리아 경에게서 무척 기쁜 소식을 들었거든요.”
에린은 페르딘에게 자세한 건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별것 아니야. 손이나 얼른 줘. 두 사람 모두에게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야 하니까.”
에린이 릴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속이 울렁이며 시야가 반전되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맑은 호수가 있던 황궁의 뒤편이었다.
에린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궁의 호수는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찬란한 햇살이 거울 같은 호수의 표면을 비추고 있었다.
“에린 경은 혹시 꽃을 좋아하시나요?”
페르딘의 말에 에린은 생각에 잠겼다. 검을 제외하고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길을 가다 꽃을 볼 때 기분이 좋기는 했어.’
생각을 마친 에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요. 임무를 나가거나 수련을 할 때 들꽃들을 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렇군요. 좋아하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한 페르딘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어디에 갔다 와도 될까요, 에린 경?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에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페르딘이 어디론가 향하는 게 보였다.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에린은 생각했다. 사실 페르딘이 자신의 옆에서 계속 있기를 바랐는데.
‘바쁜 일이 있으신 거겠지.’
아마 그녀와 함께 호수에 오는 것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온 것이 분명했다.
에린은 호숫가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째 도착하자마자 바라본 모습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에린은 왜 페르딘이 이곳에 자신과 함께 오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다.
호수를 보기만 해도 심란하던 마음이 잔잔해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모든 복수를 끝내고 나서 그녀의 심란해진 마음을 페르딘도 눈치챈 것일지도.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곳에 데려와 준 것이 아닐까.
‘돌아오면 고맙다고 말하자. 이런 풍경을 보게 돼서 너무 기쁘다고.’
짙은 꽃향기가 그녀의 코끝에 맴돌았다. 잔잔한 호수를 보니 마음마저 편안해지는 듯했다.
에린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많은 아픔이 있었고, 도저히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사건들을 이겨 내고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것을 생각하니 그녀의 가슴속에 충족감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린 것은.
“에린 경!”
에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페르딘이 아름다운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에린은 그의 품에 있던 꽃이 무언인지 알 수 있었다.
눈송이를 닮은 하얀 꽃잎과 달콤한 향기는 그가 말했던 정령꽃이 분명했다.
꽃다발의 형태가 엉성한 것을 보아 아마 그가 직접 만들어 온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에린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페르딘은 꽃다발을 든 채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정령꽃은 이맘때쯤 꽃이 떨어지지요. 황궁에 있으면서 조금씩 만든 꽃다발입니다.”
“…….”
“항상 꿈꿔 왔어요. 만약 제가 살아남는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에 오고 싶다고.”
페르딘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그가 항상 꿈꿔 오던 일이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감상하는 일.
비로소 이곳에 에린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페르딘은 행복했다.
“받아 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건 에린도 마찬가지였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에린은 조심스레 그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았다.
페르딘이 에린이 꽃다발을 넘겨받자마자 그녀를 다정하게 껴안았다. 그의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에린의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에린 경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에린은 깨달을 수 있었다. 여신이 말하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그녀가 말하던 순간은 이때가 분명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에게 평생 함께하기를 속삭이고 있는 이 순간.
이제까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이 아니었다는 걸 에린은 깨달았다.
진정한 행복이 그녀의 가슴에 맴돌기 시작했다. 따뜻한 바람이 에린의 머리를 흩날렸다.
“이것 말고도…… 준비한 게 많지만 정령꽃이 완전히 지기 전에 이곳에 에린 경과 오고 싶었습니다.”
페르딘의 볼이 붉어졌다.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에린은 그를 힘주어 껴안았다. 페르딘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에린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린 경? 괜찮으신가요?”
페르딘의 질문에 에린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에린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기뻐서 그래요.”
그녀의 눈물은 슬퍼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에린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온다는 릴리아의 말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