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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19화 (119/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9화

아카데미 내에 있는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온 에린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걸 더 오래전부터 누렸어야 했다는 카론의 말이 잊히지 않아서였다.

이시스는 에린에게 코렐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대략적으로 알려 주었다.

“자세한 것은 여신님께서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요.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에린 경께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고통받으셨던 건 바로 에린 경이시니까요.”

그녀를 괴롭혔던 코렐리아는 지옥에서 영겁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동조한 다른 이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감히 여신을 기만한 죗값을 치르게 될 거라고.

차라리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켜 달라고 빌 정도의 고통을 받게 될 거라고…….

하지만 그들이 고통받는다고 해서 지나간 시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시스의 말을 들으니 에린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사실은 신경 쓰였던 걸까.’

그녀는 머리를 벽에 기대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마다 종종 떠올리곤 했던 생각이었다

만약, 모든 일이 끝난다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상상하는 일 말이다.

하지만 상상은 항상 상상으로만 끝이 났다. 한 번도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아 본 적이 없기에 에린은 평온한 삶이 정확히 무엇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선택을 내려야 그녀와 주변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에린은 굳은살이 박인 제 손과 항상 들고 다니는 검을 번갈아 응시했다.

아직도 그녀는 이시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녀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눈을 뜨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는 에린이 가장 행복할 때 공녀가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자면 지금은 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원래는 이맘때쯤이었나. 페르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그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더는 페르딘을 위협할 황제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코렐리아 역시 제 손에 의해 처단당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어떻게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인지 에린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제를 상대하고 나서 에린은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아실리 공작을 뛰어넘는 경지마저 엿본 상태였다.

이제는 그 누가 페르딘과 소중한 이들을 위협하더라도 그녀는 거뜬히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생각이 길어진 탓일까. 언제나 결론은 페르딘으로 끝이 났다. 문득 그녀는 참을 수 없이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바빠 보였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내 그녀와 함께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페르딘은 무척 바빴다.

전대 황제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느라 감당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즉위식도 앞두고 있으니 더욱 바쁠 수밖에.

알렉시스가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고 있다지만 그래도 충분히 정신없을 만한 시기였다.

에린도 그것을 이해했다.

페르딘은 곧 이 제국의 황제가 될 인물이니, 보고 싶어도 좀 참아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에린은 그에 대한 그리움을 겨우 참아 냈다.

* * *

이른 아침부터 에린은 연무장에 나왔다.

그녀가 자리를 잡은 곳은 아카데미의 상급반의 학생들이 사용하는 연무장이었다.

그곳에 있는 학생들이 에린을 보며 수군덕거렸다.

“에린 경이야.”

“세상에, 실물을 직접 보다니…….”

“소드 마스터가 되고 나서도 아카데미에 머문 분은 처음이잖아.”

“어떤 분일까 대화라도 나눠 보고 싶다. 대련을 부탁해도 될까?”

그들은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에린은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청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일반인들이 몰라서 생긴 일이었다.

평범하게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에린은 시선을 돌렸다.

아몬과 필립이 다른 상급반의 학생들에게 험악한 얼굴로 경고성 어린 말을 하고 있었다.

“잘 들어, 함부로 에린에게 대련을 부탁하지 마. 안 그래도 수련을 하느랴 바쁘니까.”

“맞아, 에린에게 대련을 부탁하려면 나부터 꺾고 부탁해라.”

에린은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필립과 아몬은 코렐리아의 납치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급반으로 가는 승급 시험을 치렀다.

그가 몸이 다 낫자마자 벌인 일이었다.

코렐리아에게 당한 상처가 완벽히 치유된 상태가 아니었을 텐데도 에린과 같은 반을 하겠다는 그들의 집념은 대단했다.

웃긴 사실은 상급반의 학생들이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안달 난 눈으로 에린을 바라보았으나 아몬 때문에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못했다.

그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오늘부터 내 목표는 아몬 경을 이기는 거다.”

“그게 가능한 거야? 에린 경이 없었다면 아몬 경이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됐을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

“아실리 공작님도 요즘 눈여겨보고 계시다고 들었어.”

“공작가에서 칩거하시지 않았다면, 그를 제자로 들였을 수도 있다고 나도 소문을 들었어.”

“에린 경 때문에 가려져서 그렇지 충분히 괴물 같은 분이지…….”

에린은 아몬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의 성장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과거의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마 세월이 흐른다면 그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원래는 도달하지 못했던 시간에서.

역시, 행복했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존재할 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에린은 불안해졌다.

‘내가 행복을 찾지 못해서…… 공녀님이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공녀의 수척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다면 에린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에린,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에린은 자신의 옆을 돌아보았다.

아몬이 그곳에서 에린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들은 걱정하지 마. 네 시간을 뺏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나를 못 이기는 녀석들은 너한테 대련을 청하지도 못하게 하겠어.”

아몬이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내 성격을 아는 놈들은 감히 널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아몬의 실력은 일취월장해서 이제 아카데미 안에서는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다른 기사들과 대련을 할 일은 없을 듯했다.

“그리고…… 늦었지만 고마워. 코렐리아에게서 나를 구해 줬다고 필립한테 들었어.”

에린은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할 때마다 에린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무언가가 가슴속을 간질거리다가 퍼져 나가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에린. 넌 굳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서까지 나를 구할 필요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에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시스에게 들었어. 그것 말고도 많은 일들을 했다고. 네가 없었다면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야.”

에린이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아몬이 그런 에린을 보며 씩 웃어 보였다.

* * *

에린은 아무도 없는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급반의 연무장에서는 도저히 수련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신 아실리 공작이 아카데미에 들렀을 때 사용하던 연무장으로 왔다.

그녀와 아실리 공작이 검을 맞댔었던 곳.

그녀가 아카데미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실리 공작이 흔쾌히 사용하라고 제공해 준 장소였다.

“아카데미에 간다면 검을 연마할 시간이 없겠지. 나는 아카데미에 자주 가지 않으니 내 연무장을 경이 사용해도 좋다.”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묵직한 검의 무게가 기분이 좋았다.

아침의 연무장에서 아몬을 만난 뒤 에린은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깨달았다.

그녀는 검의 극의를 보고 싶었다.

세상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만약 그녀가 정체되어 있고 아몬이 노력한다면, 그는 그녀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호승심이 들었다. 이미 복수는 끝마쳤지만 여전히 검은 그녀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한참 검을 휘두르던 그녀는 점차 가슴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에린이 검을 멈췄다. 자신이 검을 잡기 시작한 이유인 페르딘이 떠올라서였다.

페르딘을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들떴다.

‘아카데미가 쉬는 날에 그를 보러 가야겠다.’

당장이라도 그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에린은 꾹 참았다. 바쁜 그를 시시때때로 귀찮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생각을 마친 에린은 다시 검에 빠져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들리는 바람 소리가 기분이 좋았다.

“에린 경.”

그때, 환청이라도 들린 걸까.

에린은 익숙한 목소리에 감고 있는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척이 환청을 들은 게 아니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에린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페르딘이 있었다.

그는 볼을 붉게 상기시킨 채 에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언제 오신 거예요? 바쁘시잖아요. 황궁에서 자리를 비워도 괜찮나요?”

에린의 말에 페르딘은 고개를 저었다.

“바쁜 일은 거의 끝냈습니다. 즉위식 준비도 거의 끝마쳤으니까요.”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 * *

바쁘지 않다는 페르딘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알렉시스는 지금 페르딘을 간절히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즉위식 준비 말고도 그는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전대 황제가 처리하지 않았던 일들도 쌓여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에린을 찾아오지 않으면, 그녀는 여간해서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에린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바쁜 걸 알고 황궁에 더더욱 오지 않을 거야.’

에린을 보게 될 때쯤엔 호수의 꽃이 전부 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페르딘은 에린을 보고 싶은 마음을 결국 참지 못하고 릴리아에게 부탁해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 아카데미에 오고 말았다.

그리고 에린에게 바쁘지 않다고 거짓말까지 해 가며 이렇게 제안했다.

“봄이 가기 전에 에린 경과 꼭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가야 할 곳이요?”

“네, 그런데 즉위식을 할 때쯤이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페르딘이 에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에린은 그 순간 기분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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