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7화
곧 에린이 옷을 갈아입었다.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은 그녀가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자 사라가 안절부절못하며 에린의 뒤를 따라왔다.
“아가씨,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
사라의 말소리에 에린의 방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놀라서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에린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곧이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사들의 귀 끝이 붉었다.
‘저들은 황실에서도 뛰어나다 소리를 듣는 기사들인데…….’
사라는 그 모습을 보며 정말 자신의 아가씨가 훌륭한 검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에린은 그런 기사들을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사라, 갈 곳이 있어서…… 나중에 다시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긴 에린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방 근처 복도를 벗어난 에린은 페르딘을 찾기 위해 온 감각을 집중했다.
지금 당장 페르딘을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황궁 안을 헤집고 돌아다가, 문득 그녀의 감각에 페르딘의 기운이 잡혔다.
그 즉시 에린은 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에린 경?”
때마침 회의실을 빠져나오던 페르딘이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자리에 굳은 듯이 멈춰 섰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오던 알렉시스는 이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뒤에 있는 귀족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귀족들이 조용히 해산하기 시작했다.
페르딘이 에린에게 얼마나 지극정성을 다하는지에 대해 이미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저희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하지만 눈치 없이 구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에린, 깨어났구나!”
“이리 오시죠, 후작님.”
“마탑주, 이거 놓으시게. 우리 에린이 깨어났는데 어딜 간단 말인가.”
“저희는 약속이 있었잖습니까.”
“언제 당신과 내가 약속을 잡았어! 난 우리 에린을 봐야…….”
리서스 후작이 발버둥을 쳤지만 그는 이내 알렉시스에게 속절없이 끌려가야 했다.
결국 그곳에 남은 건 페르딘과 에린뿐이었다. 상황이 정리된 듯하자 에린은 그의 앞까지 뛰어갔다.
그 둘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건 페르딘이었다.
“깨어나실 때 옆에 있고 싶었…….”
페르딘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에린이 그를 강하게 껴안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페르딘은 얼굴을 붉힌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치 머릿속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에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더는 후회할 짓을 하지 않겠어.’
에린은 죽음의 위기를 겪었을 때 여러 가지를 후회했다.
그 후회들 중에는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지금까지 페르딘만 표현해 주었으니까.’
그녀는 페르딘에게 단 한 번도 먼저 다가간 적이 없었다.
항상 그가 거부할까 봐, 그로 인해 자신이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기만 했을 뿐.
과거의 그녀는 겁쟁이였다.
‘하지만 이제 겁내지 않을 거야.’
에린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페르딘은 당황한 채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손이 허공을 배회했다.
“페르…… 음, 이제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지…….”
이제 페르딘이 황제가 됐으니 경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폐하라고 부르며 거리를 두고 싶지도 않았다.
‘약혼한…… 사이니까.’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는 거 아닐까?
에린은 페르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페르딘의 상태를 알아차리자마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페르딘의 얼굴도 그녀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더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아 에린은 그에게서 몸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페르딘이 힘을 줘 그런 그녀를 다시 끌어당기는 게 빨랐다.
“정말, 정말 걱정했습니다.”
에린이 눈을 감고 있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이시스가 여신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페르딘은 그를 통해 에린은 무사할 거라는 여신의 확답을 받아 내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여신이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그는 정사도 돌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페르딘은 에린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를 껴안자 마음속 깊은 곳에 충족감이 차올랐다.
“보고 싶었습니다, 에린 경.”
* * *
어느 정도 몸이 낫자마자 에린은 아실리 공녀를 보기 위해 공작저에 들렀다.
“공작님께서 일이 있으셔서 시간이 좀 걸리신다고 하십니다.”
에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집무실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앞엔 이시스가 앉아 있었다.
에린은 어쩌다 이시스와 함께 있게 된 건지 생각했다.
그녀는 원래 모든 일이 끝난 뒤 아실리 공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 에린의 생각을 어떻게 안 것인지 이시스가 함께 가자고 청해 온 것이다.
에린은 이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두 눈 밑은 퀭하고 머리는 푸석했다.
항상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던 그답지 않았다.
‘교황이 되어서 많이 바빠진 걸까? 아니면 나를 살리기 위해 신성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걸까, 그 반동으로…….’
저주를 감당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에린은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이시스 역시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에린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얼마 전 페르딘과의 만남에서 에린은 일주일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들을 수 있었다.
사라가 왜 설명하기 어려워했는지 이해가 갈 만큼 수많은 일의 연속이었다.
이시스는 교황이 되었고 전대 교황은 흑마법사인 황제에게 동조한 죄로 잡혀갔다고 들었다.
또한 황제파의 귀족 중 상당수가 정리되었다.
이후 귀족 원로회와 마탑, 그리고 신전의 지지를 받아 페르딘이 다음 대의 황제로 결정되었다고…….
생각에 빠져 있던 에린에게 이시스가 말을 걸었다.
“에린 경, 곧 아카데미로 돌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페르딘…… 아니, 폐하의 즉위식이 끝나면 바로 돌아갈 것 같아요.”
그 말을 하는 에린의 귀 끝이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이시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얼굴에 다정한 웃음을 띄웠다.
페르딘과 에린의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것보다 이시스, 몸이 어디 아픈 건가요?”
에린의 질문에 이시스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아픈 건 아닙니다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었던 이시스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야 아실리 공녀의 마음이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에린에게도 여신의 괴팍한 성격에 대해 일러바치고 싶었다.
이시스는 회한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렸다.
“제가 과거에 교황을 왜 하고 싶어 했을까요?”
“설마…… 신전에서 당신을 곤란하게 하는 자가 있나요?”
에린이 그렇게 말하며 표정을 굳혔다. 교황과 이시스 사이에 불화가 존재했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시스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신관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시스가 여신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에게 완전히 충성을 바쳤으니까.
“그렇다면 무슨 일인가요?”
“여신님이…… 정말…….”
“여신님이요?”
“정말 좋은 분이라서요.”
그의 말에 에린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고 보니 여신님께서 에린 경께 전해 달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여신님께서요?”
“네, 악인들을 벌주는 건 자신에게 맡겨만 달라고 하시더군요.”
이시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에린에게 전한 말은 여신이 실제로 했던 말을 그나마 좀 순화한 것이었다.
그녀는 악인들을 벌주는 일에 대해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여신의 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해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강하게 커야지, 교황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약해서야…… 쯧쯧.]
여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녀가 말을 걸수록 자신의 신성력 역시 늘어나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여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교황은 몇 세대 만에 처음이라고 들었다.
성녀의 경우에도 예언을 꿈으로 접하긴 해도 직접적인 대화까지는 불가능했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여신은 모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무척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는 여신과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에린이 놈들을 차례로 지옥으로 보내 준 덕분에, 제대로 처리하고 있단다.]
여신은 그렇게 말하며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황제는 특별히 끔찍한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지. 어떤 벌을 내렸는지 자세한 걸 설명하기엔 넌 너무 어려서 불가능하지만 말이야.]
[뭐,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란다. 에린, 그 애는 너무 착해서 단칼에 보내 버렸잖아. 죗값을 제대로 알려 주는 건 나 같은 사…… 아니 신이 대신하는 거야.]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벌을 내렸다고만 생각하면 돼. 아실리 공녀와 약속했던 게 있거든.]
[요즘 밤마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듣는 게 일이야. 감히 신에게 까불어? 지옥이 왜 지옥인지 제대로 보여 주마. 오호호.]
이시스는 잠시 자신이 섬기는 여신이 선신인지 악신인지 헷갈렸지만 믿음을 공고히 하기로 했다.
그 역시 힘이 있었다면, 여신과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이시스, 정말 괜찮은 것 맞나요?”
“네, 괜찮습니다…….”
이시스는 그쯤에서 왜 역대 교황들이 과묵해졌는지 깨달았다.
신도들이 ‘여신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어째서 그들이 침묵을 택했는지를.
이제야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이시스는 에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시스는 백지장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교황직을 그만둬야…….’
그렇게 생각하자 귓가에
[감히 어딜 도망치려고?]
라고 외치는 여신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이시스는 그 음성을 잊으려고 고개를 저은 뒤 에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몬 경의 상처가 거의 다 나았다고 들었습니다. 조만간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코렐리아의 검에 상처의 회복을 방해하는 특수한 흑마법이 걸려 있어서 시간이 좀 오래 걸린 듯합니다. ”
이시스의 말에 에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공녀를 본 뒤에 아몬의 병문안도 가려 했지만, 그가 에린의 방문을 사양해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게 된 탓이었다.
이시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기사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세상에, 병문안을 창피하다고 거절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아몬 경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까요.”
이시스의 말에 에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공녀를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니.’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아실리 공작이 드디어 집무실의 문을 열고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