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6화
페르딘은 에린을 내려다보았다.
에린은 눈을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잠을 자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에린 경?”
페르딘의 눈이 까맣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에린의 몸이 어느새 축 처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그녀 얼굴의 반 이상을 뒤덮은 검은 반점이 보였다.
저주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걸까?
위기감을 느낀 페르딘이 황급히 에린의 팔을 붙잡아 보았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의 말에 대답해 주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페르딘은 더듬거리며 에린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에린의 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그의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더 이상 그녀가 움직이지 않았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 같이…….
페르딘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자신의 무력감과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여신에 대한 분노였다.
에린을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행복이란 걸 모르는 채 살아왔다. 그런 그녀와 함께하면서 행복이란 게 뭔지 알려 주고 싶었는데…….
“에린 경, 대답해 주세요.”
페르딘은 에린의 손을 붙잡은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절박하기까지 한 페르딘의 말에 옆에 있는 알렉시스마저 괴로워질 정도였다.
알렉시스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주가 온몸에 퍼진 모양입니다.”
“…….”
“아직 살아 계시지만, 곧 모든 기능이 정지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소드 마스터라 여기까지 버티신 거겠지요. 어쩌면…….”
그렇게 말하며 알렉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겐 에린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그의 입 안에 맴돌았다.
‘어쩌면 이만 보내 드리는 게 에린 경에게 더 나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감히 그런 말을 페르딘에게 꺼낼 수 없었다.
첨탑 안에 적막만이 흐르는 가운데, 별안간 페르딘이 고함을 질렀다.
“약속을 어기시는 겁니까?”
페르딘의 목소리엔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날 선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질문에 대신 답해 주었다.
“아직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십니다.”
알렉시스를 지나쳐 이시스가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알렉시스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계를 뚫고 들어온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의 결계를 뚫고 오려면 최소한 소드 마스터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다른 능력이 뒷받침되거나.
이미 에린의 몸 상태는 신성력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알렉시스는 페르딘을 배려해서 이시스와 신관들이 결계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시스가 그의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
알렉시스는 이시스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시스가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발, 알겠습니다. 화를 내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페르딘 전하는 듣지 못해요.”
“…….”
“애초에 여신님께서 에린 경을 아프게 하지 않으셨다면 들을 일도 없을 말 아닙니까.”
* * *
이시스는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그가 알렉시스의 결계를 지나칠 수 있었던 건 여신의 힘 덕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여신이 끊임없이 주절거리고 있었다.
주로 자신이 얼마나 고생한 줄도 모르고 화를 내는 페르딘이 괘씸하다는 이야기였다.
[저 불경한 녀석! 네가 지금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라서 그런 거란다.]
이시스는 페르딘이 한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여신에게 묻지 않았다.
여신에 대한 불경한 생각을 했다가 에린을 치유하는 데 문제가 생기면 안 됐으니까.
그는 최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페르딘의 마음이 약간은 이해가 되었다. 그만큼 지금 에린의 상태는 처참했다.
[그게 최선이었어.]
‘알고 있습니다.’
저주에 당해 저 상태에 이르기까지 에린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여신의 선택을 이해한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평화도 분명 존재했다. 결국 에린이 희생하지 않았다면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을 테니까.
‘나 역시 그녀에 의해 구원받았지.’
이시스는 씁쓸한 얼굴로 에린을 바라보았다.
에린이 없었다면 그가 당했을 최후를 여신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에린에게 빚을 갚아야 했다.
이시스는 곧장 페르딘의 옆에 앉았다. 페르딘은 그가 옆에 도착한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에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비어 있는 그의 두 눈…….
그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음울함이 느껴지는 게 왠지 불길했다. 이시스는 여신이 서두르라고 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에린이 위험한 것과는 별개로 페르딘의 상태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어서 시작하렴. 저 녀석이 완전히 정신을 놓기 전에. 이러다가 나를 죽이러 오겠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
여신이 골치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도 나를 베러 오겠다는 소드 마스터 녀석이 있었지.]
역시 페르딘의 생각을 여신에게 물어보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시스는 에린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곧 그의 몸에서 강대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몸에 있는 모든 힘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자,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여신의 신격이 그에게 강림한 것이다. 이시스의 귀에서 어느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시스는 멈추지 않았다.
까맣게 변했던 에린의 팔다리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옅어져 가던 숨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창백했던 안색에 혈색이 돌았다.
마치 죽었던 자가 다시 소생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세상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알렉시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시스는 보았다.
에린의 몸에서 저주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페르딘의 눈에도 빛이 돌아오는 것을.
하지만 그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가 신성력을 사용하며 에린을 낫게 하는 순간, 에린의 목에 있던 목걸이에 옅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 * *
창을 통해 햇살이 들어왔다. 에린은 자신의 볼을 간질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이는 낯익은 천장에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여기는…… 리서스 후작가인가?’
얼마 가지 않아 에린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눈이 보여?’
천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손에 놀라 흠칫 몸을 굳혔다.
분명 그녀의 몸은 황제의 저주로 인해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는 온몸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시각도, 후각도, 촉각도 멀쩡했다.
에린은 이불을 그러모은 뒤, 얼굴을 묻었다.
침대의 푹신함도,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도 느껴지고 있었다.
그녀는 죽지 않은 것이다.
살아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향긋한 꽃향기가 코에 맴돌았다.
에린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리서스 후작가엔 꽃이 별로 없는데?’
에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리서스 후작가라기엔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가씨?”
에린은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처음 아카데미를 갈 때 그녀와 함께했던 하녀 사라가 있었다. 리서스 후작이 코렐리아에게 넘어간 사용인들을 정리할 때 그녀는 살아남은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사라의 모습에 에린은 당황했다. 사라가 눈에 눈물을 한가득 담은 채 에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저는 못 깨어나시는 줄 알고 아니,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움직이시면 안 돼요!”
사라는 그렇게 말하며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에린을 침대에 다시 앉혔다.
“세상에, 정말 다행이에요. 너무 오래 정신을 잃으셔서 걱정했어요. 의원이랑 신관은 전부 괜찮다는 말만 하는데 아가씨는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요? 검도 못 잡던 아가씨가 소드 마스터라고 하질 않나. 저주를 혼자 감당하려다가 혼자 다치셨다고 하고…….”
사라가 그렇게 말하며 코를 훌쩍였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어?”
“일주일이에요. 아가씨가 잠들어 계신 동안 진짜 난리가 났었어요.”
“난리가 났다고?”
“네, 폐하가 그동안 하신 일들이 밝혀졌어요. 흑마법을 사용해 많은 백성을 죽이셨다고요. 그러곤 페르딘 전하가 황제로 즉위…… 아, 아직 즉위식은 치르지 못하셨어요.”
사라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들이 그녀도 당황스러운 듯했다.
결국 설명을 포기한 사라가 에린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아세요?”
“후작가가 아니야?”
“아니에요, 여긴 황궁이에요.”
사라가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손을 꼭 쥐었다.
“페르딘 전하, 아니 폐하께서 아가씨가 불편하실까 봐 황궁에 아가씨의 방과 똑같은 방을 만들어 주셨어요. 저도 데리고 오셨고요.”
“…….”
“그동안 얼마나 지극정성이시던지…… 오늘도 회의가 아니었다면, 아가씨가 깨어나시는 모습을 보셨을 텐데. 조금 전에 마탑주님께서 폐하를 데리고 가셨거든요.”
사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에요, 좋은 분을 만나셔서요. 아가씨를 정말 아끼시는 것 같아요.”
사라의 말에 에린은 침대에서 다시 일어났다. 사라가 당황한 채 그녀를 따라왔으나 에린은 고개를 저었다.
에린은 창가에 가 창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짙은 꽃내음이 맡아졌다. 에린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꽃잎 하나가 그녀의 볼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환상 속에서 보았던 호수가 그곳에 있었다.
에린은 그 순간 깨달았다.
봄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