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5화
페르딘은 에린을 내려다봤다.
약해진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끊길 듯, 작은 숨소리가.
그가 땀으로 범벅이 된 에린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런 뒤 그곳에 작게 입 맞췄다.
에린이 많이 해치웠겠지만,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는 마물들이 제법 되었다.
알렉시스는 페르딘이 에린을 살피는 동안 마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결계를 쳤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두 사람의 끝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페르딘은 떨리는 손으로 에린의 손을 연신 어루만졌다.
그녀의 아픔을 자신이 받고 싶었다. 에린의 눈은 이제는 까맣게 변한 채,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페르딘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린은 보이지도 않을 그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허공을 배회하는 그녀의 손을 페르딘이 붙잡았다.
그가 에린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게 했다.
에린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두…… 지키고 싶었어요.”
“…….”
“제 목숨을 바쳐서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면 상관없었어요…….”
“…….”
“그러니 전 괜찮아요.”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차라리 자신이 모든 이들의 불행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기도했었다. 여신은 그녀의 소원을 누구보다 잘 들어준 걸 수도 있었다.
이걸로 되었다.
에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페르딘의 품에서 눈을 감는 것만큼 그녀에게 어울리는 최후는 없으리라.
마지막 순간이라도 페르딘이 곁에 있어서 에린은 행복할 수 있었다.
“아니요, 에린 경. 그건 옳지 않아요.”
“페르딘 경……?”
“당신 없이는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어요. 행복은 그런 게 아니에요.”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에린을 향해 웃었다. 에린에겐 그의 미소가 보이지 않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행복은 함께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겁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질 수 없어요.”
“…….”
“그러니 에린 경이 없는 제 삶 역시 의미가 없어요.”
페르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 뒤 에린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니 에린을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페르딘은 간절한 어조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에린 경과 봄에 피는 첫 꽃을 보고 싶어요. 제가 자란 황자궁 뒤편에 호수가 있어요. 그곳 근처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정령꽃이 피어납니다.”
“…….”
“에린 경과 정령꽃의 향기를 맡고 싶어요. 함께 비를 맞아도 좋겠지요. 그러다가 추워지면 황궁에 들어가 몸을 말리고…….”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에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에린은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 보는 지방으로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나도 좋을 겁니다.”
페르딘의 말에 에린은 작게 웃었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다면 페르딘은 황제가 될 테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말을 꺼내진 않았다.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렇게,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저 평범한 날들.
그녀가 어린 시절 가지지 못했던 사소하고 가슴이 간질거리는 시간.
페르딘이 그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고 에린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에린도 마찬가지였다.
“에린 경도, 함께하고 싶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그러다가 같이 늙어 가는 삶을 살고 싶잖아요. 그러니…… 나쁜 말을 하지 마세요.”
정적이 흘렀다.
알렉시스가 만든 결계는 견고했다. 그의 결계 안에서 에린은 이 세상 속에 페르딘과 자신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우린 아직 해 보지 못한 게 너무 많아요. 제가 죽은 과거에서 에린 경은 행복하지 못했잖아요.”
“…….”
“당신이 없다면…… 저 역시 마찬가지로 불행해질 거예요.”
그의 말에 에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페르딘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감각은 모두 마비되었다.
시각도, 촉각도 이제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온전히 남아 있는 거라곤 청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청각마저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황제가 내린 저주의 말처럼 그녀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저는…….”
에린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저주를 홀로 감당하는 건 아프고, 외로웠다.
더는 외로움을 느끼기 싫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이전에 공녀가 갖게 해 줬던 파티 시간처럼 같이 웃고 떠들고 그런 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저는…… 페르딘 경, 저는 사실…….”
그때였다. 에린은 뱃속 깊은 곳에서 저주가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비명을 내리눌렀다.
에린은 페르딘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살고…… 싶어요. 모두와 함께하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그의 말대로였다. 이대로 죽는다면 그녀는 행복하지 않으리라.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이제야 말할 수 있었다.
에린은 당장이라도 감기려는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지금 눈을 감는다면, 다시는 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자 두려움이 들었다.
한때, 지독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죽음이 두려웠다.
“페르딘 전하! 에린 경! 설마, 설마 늦은 건 아니겠지요?”
다른 이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는지 에린은 알 수 없었다. 마수들을 무찌르고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온 것일까?
보이지 않는 눈으론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었다.
이미 거의 모든 감각을 잃었기 때문에 에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이 하는 말을 최대한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곧 에린은 누가 왔는지 알아내는 걸 포기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행복하지 않…… 아요.”
“…….”
“페르딘 경과 함께…… 하고…….”
에린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는 와중에 에린의 귓가에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로 충분하단다.]
* * *
에린은 눈을 떴다.
그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잔한 바람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쳤다. 에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서부의 모든 사건을 해결했을 때와 같았다.
자신의 앞에는 몇 번 보았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품 안에는 티티가 편안한 얼굴로 안겨 있었고 말이다.
여자는 에린을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선 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신께서 힘을 사용하는 데에도 제약이 있습니다. 과거로 시간을 돌리기 위해 그분은 그 대가로 많은 신격을 사용하셨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의 티티를 쓰다듬었다.
“신격은 한정되어 있기에, 여신께선 몇 번의 미래를 ‘가정’하셨죠. 시행착오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또다시 과거로 시간을 돌릴 수 없으니까요.”
여자는 이어서 말했다.
“성녀들이 하는 예언은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를 미래입니다.”
여신은 수십 번의 미래를 반복해서 보았다. 그리고 알아챌 수 있었다.
페르딘과 약속한 대로 에린 리서스의 행복을 이뤄 주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단 걸.
“몇 번의 미래에서 페르딘은 죽었습니다. 그의 기사단이 몰살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안타깝단 표정을 지었다.
“서부에서 이시스와 헬릭스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서부가 몰살당하는 일 역시 벌어질 수 있는 일 중 하나였죠.”
“레옹 백작에게서 당신이 카론을 지키지 못한 미래도 있었네요.”
“리서스 후작이 코렐리아에게 죽는 미래 역시 존재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미래였다. 전부 에린이 행복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여신은 공녀를 통해 그 미래에 개입했다.
이미 과거로 시간을 되돌림으로 인해 많은 신격을 사용한 뒤였다. 그럼에도 도저히 미래를 바꾸기 불가능할 땐 자신의 신격을 사용하기도 했다.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소원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신은 페르딘에게 에린을 행복하게 만들겠다 약속했다.
세상에 개입하기 위해선 이유가 필요했고 성물을 이용해 페르딘과 한 약속은 그녀에게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깨달았어야 했어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이 약속은 당신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에린의 머릿속의 짧은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페르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영원한 잠에 빠진 공녀가 깨어나 밝게 웃는다. 아몬과 릴리아는 말싸움을 하고 데렉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헬릭스는 묵묵히 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시야가 반전되면서 장소가 변했다.
에린은 난생처음 보는 곳에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호수가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호수는 그녀의 마음마저 비출 것 같이 맑았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에린은 그곳이 페르딘이 말했던 황자궁의 뒤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페르딘이 에린에게 꽃을 내밀며 웃었다.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이미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겠죠.”
에린은 그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어요.”
야옹!
티티가 여자의 품에서 에린을 바라보며 외쳤다.
“티티가 자신은 인내심이 강한 고양이라고 하네요.”
“…….”
“정말로 오래오래 기다릴 수 있으니까. 최대한 천천히 찾아오래요.”
에린은 그녀의 말에 무어라 대답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그릉거리는 소리를 내는 티티와 자신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 여자의 모습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