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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13화 (113/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3화

에린이 첨탑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날개 달린 마물이 그녀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실리 공작마저 고전을 면치 못했던 마물들이었다.

황제가 특별히 공들여 만든 마물들.

그것들이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에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섬뜩한 살의가 쏟아짐과 동시에 그녀의 어깨가 마물의 손톱에 의해 꿰뚫렸다.

다리에는 뼈가 드러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결국 황제가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기가 질린 얼굴로 에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옆에서 그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던 마물들이 에린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녀의 검에 의해 종이 썰리듯 썰려 나갔다.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에린은 본능적으로 여신이 원했던 결말이 이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는 에린을 보며 분노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혼자 죽을 줄 아느냐? 내가 죽어도, 네년은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에린은 그의 말을 듣고 옅은 웃음을 지었다. 황제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에린을 노려보았다.

에린이 그의 지척까지 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마물들이 그녀를 막아서지 못한 건 분명 변수이긴 했으나, 황제는 에린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나를 죽이면 그 즉시 이 아카데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끔찍한 저주가 내려질 것이다.”

“…….”

“그렇게 되면 페르딘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기사 놈들도 전부 죽게 되겠지.”

“아니요, 당신의 저주는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못할 겁니다.”

에린은 그렇게 말하며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설마…….”

“맞아요, 소드 마스터가 되면 마나로 쉴드를 만들 수 있지요.”

마나 쉴드로 그의 마법을 막아 내려면, 그의 근처에 있어야만 했다.

한마디로 쉴드를 만들어 낸 에린은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황제는 저신이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에린에게 물었다.

“그런 짓을 하면, 너 역시 무사하진 못할 텐데?”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

황제는 에린의 말을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그는 에린이 끔찍한 상황에서 허세를 부리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저주를 바꾸지. 저주에 걸리는 사람을 너 혼자로 한정할 테다. 그게 얼마나 강한 저주일지 상상이 가나?”

황제는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온몸이 천천히 썩어 들어가게 되겠지.”

“…….”

“소드 마스터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오히려 늦게 죽는 게 괴로울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맛보게 되겠지.”

“…….”

“마물들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얼마나 높은 경지를 이룬 마법사인지 알 수 있겠지?”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광소를 터트렸다.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해서 강해졌다. 그 목숨을 전부 너를 죽이기 위해 사용하는 거야!”

물론 에린도 황제의 말이 전부 사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마나가 용솟음치는 게 느껴졌으므로.

“그것도 상관없어요. 전 각오했으니까요.”

에린의 말에 황제는 코웃음 쳤다.

그는 삶을 갈구하는 자들의 눈빛을 알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 자신에게 살려 달라 외치던 이들의 눈. 에린의 눈도 그런 그들과 닮아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사실은 누구보다 살고 싶으면서.”

황제의 말에 에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황제의 말이 맞았다. 에린은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그녀는 욕심쟁이였다.

페르딘과 그의 기사단이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원했다. 그리고 모두 멀쩡히 살아 있는 그곳에서, 자신도 함께하기를 원했다.

언젠가 그들의 축복을 받으며 페르딘과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는 꿈도 꾼 적이 있었다.

어느새 에린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검을 들어 올렸다.

에린의 행동에 황제는 인상을 쓴 채 외쳤다.

“기어이 멍청한 선택을 하겠다는 거냐!”

회귀의 순간 그녀는 다짐했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페르딘과 다른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 주었으니, 이번엔 그녀의 목숨을 바쳐야 할 때였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에린의 소중한 이들이었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 황제를 쓰러트리지 않는다면, 마물들은 학살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믿어 주었던 사람들.

지금도 믿고 있을 이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그들을 지켜 내야만 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가슴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린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페르딘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옥에서…… 당신이 죽인 사람들에게 속죄하세요.”

그 말과 함께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 * *

아실리 공작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나머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첨탑을 오르는 에린의 육체적인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아실리 공작은 그런 에린을 보며 그녀가 자신의 경지도 한 단계 뛰어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만든 마물들을 해치울 수 있었겠지.’

그가 상대하기 버거웠던 마물들을 에린은 망설임 없이 베며 나아갔다.

아실리 공작은 등 뒤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는 에린이 이루어 낸 경지에 경외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녀는 더 성장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기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마물들이 약해졌습니다.”

“검이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에린 경이 무슨 일을 해내신 거죠?”

“기적,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아실리 공작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마물의 목을 베어 냈다. 기사들의 말이 맞았다.

그들을 버겁게 했던 마물들이 이제는 손쉽게 썰렸다.

공작의 얼굴에 화색이 어렸다.

그때 마물을 상대하던 기사 중 한 명이 감격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에린 경이 흑마법사를 무찌른 것 같습니다!”

마물들이 약해졌다는 건 정신이 연결되어 있는 흑마법사가 쓰러졌단 뜻이었다.

우와아아아!

그 사실을 깨달은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아카데미를 둘러싸는 거대한 결계가 생겨났다.

마침내 마탑의 마법사들이 결계를 완성해 낸 것이다. 알렉시스는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페르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전하, 결계의 생성을 끝마쳤습니다.”

“…….”

“무언가 이상합니다.”

알렉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에린이 사라진 첨탑 쪽을 바라보았다.

결계의 생성에 집중하고 있어서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 역시 에린이 첨탑으로 사라졌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죽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없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페르딘의 얼굴도 굳은 채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렉시스가 페르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는 음습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쉽게 끝날 리 없어요.”

“…….”

“최악의 경우 대규모 살상 저주를 내리고 갈 인간들입니다. 조용한 게 오히려 불안합니다.”

페르딘은 알렉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간단히 해결될 거라곤 페르딘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척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페르딘의 시선은 에린이 향한 첨탑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페르딘의 시야가 반전된 것은.

그는 휘청이며 머리를 짚었다. 곧 찌를 듯한 두통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그의 시야에 에린의 모습이 잡혔다.

“에린 경? 괜찮으신가요? 이게 대체 무슨 일…….”

페르딘이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에린에게 닿지 못하고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에린을 바라보았으나, 에린은 그가 이곳에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페르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내 에린의 코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에린의 손끝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 즉시 페르딘은 그 증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끔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해 주었던 말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스쳐 지나가듯이 얘기했던 그 말들이 떠올랐다.

“페르딘, 흑마법사의 저주는 끔찍하단다. 가끔 그들이 목숨을 걸고 건 저주는, 더더욱 고통스럽고 말이야.”

에린이 당한 건…… 그의 아버지가 내린 끔찍한 저주였다.

아아아.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 같은 비명이 들렸다.

에린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페르딘은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에린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안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에린에게 닿지 못했다.

또다시 두통이 시작되었다. 페르딘은 그 순간, 자신이 여신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에린을 행복하게 해 달라 청했던, 그와 여신의 약속이.

이제까지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었다. 그의 두 눈이 분노를 담고 낮게 가라앉았다.

‘여신님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시야가 반전되었다.

페르딘은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페르딘은 알렉시스의 팔을 붙잡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 첨탑으로 공간 이동 마법을 부탁합니다.”

페르딘의 말에 알렉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마나가 불안정합니다. 흑마법사가 아직 어떤 상태인지도 확신할 수 없고요. 위험한 곳으로 전하를 보낼 수 없…….”

알렉시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페르딘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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