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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12화 (112/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2화

수석 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린은 빠르게 아카데미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가 목격한 것은 소름 돋을 정도로 많은 마물들이었다.

그 엄청난 혼전 속에서 에린은 페르딘을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다치지 않았어.’

페르딘이 아카데미 안쪽으로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에린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실리 공작의 곁이 가장 안전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언젠가 보았던 악몽과 너무 흡사한 상황이었으니까.

페르딘의 곁에 마물이 있는 것만으로도 에린의 끔찍한 상상을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에린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가만히 관찰했다. 사방에 피가 가득했다.

죄 없는 사람들과 그들을 쫓고 있는 마물들이 보였다.

비명, 고통, 슬픔, 눈물, 두려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에린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이유가 뭐야?’

에린이 이러한 상황을 겪는 것은 분명 처음이었다. 전생의 그녀는 황제가 본격적인 야욕을 드러내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그런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진실은 더 참혹하고 잔인했다. 에린의 눈에 지금 도륙당하고 있는 이들은 그저 죄 없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어떤 자들이었을까.’

에린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들이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또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부에서처럼,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후우웅.

강한 바람이 불었다.

에린의 머리가 휘날렸다. 그녀는 이미 코렐리아와의 전투에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분노 때문일까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린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응시했다.

‘공작님도 눈치채고 계시겠지.’

다른 이들은 느끼고 있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눈치챌 수 있었다.

바로 저 첨탑 안에 황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아마도 몸을 숨기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결국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마물들을 조종하는 황제를 처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실리 공작은 결계를 치는 마법사들을 지키느라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움직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때였다. 그녀의 눈에 아실리 공작에게 달려드는 무수한 마물들이 보였다.

쿠아앙!

아실리 공작의 마나가 담긴 검이 긴 파공성을 내며 수십 마리의 마물을 베어 내었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그의 곁에 있던 기사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아실리 공작님이다.”

“엄청난 검술이야…….”

강맹한 육체에서 퍼져 나오는 강력한 힘은 같은 아군마저 기가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에린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숫자의 마물들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아실리 공작의 검이 끊임없이 마물들을 베어 냈지만 그만큼 몰아닥치는 마물들 역시 많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기사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실리 공작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기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괜찮은 상황 맞아?”

“결계는 언제 완성되는 거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린은 검을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검의 무게가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가 황제를 무찌르려면 저런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중심지를 지나쳐야만 했다.

그녀는 앞에 있는 마물을 베어 내었다.

차앙!

마물을 베어 내는데 마치 검과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황제의 마물들은 강했다.

그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공작님! 한계입니다.”

“마물들에게 저희의 검이 통하지 않습니다.”

기사들의 비명이 들렸다.

아실리 공작의 검이 통했으나 그 혼자선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러는 사이 에린은 첨탑에 있는 황제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였고 마물들은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미친 듯이 마물을 베어 내도 앞으로 가는 데 한계가 있었다.

에린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아실리 공작을 도우며 마물들을 막아서고 있는 페르딘이 보였다.

그녀의 검이 점차 평정을 잃고 거칠어졌다. 검에 조급함이 담기기 시작했다.

‘안돼, 내가 가지 않으면 페르딘 경이…….’

이 정도 마물 떼라면 그까지 휩쓸릴지도 모른다.

그런 가정을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마물들이 페르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서부에 갔던 페르딘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고개를 든 에린은 첨탑에 떠 있는 황제가 미소를 짓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페르딘이 위험에 처한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위험한 건 괜찮았다.

하지만 페르딘을 건드린다면 말이 달랐다.

어깨나 다리에 마물의 손톱이 스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페르딘을 구하기 위해 그녀가 서둘러 몸을 빼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저 멀리 있는 페르딘과 에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부릅뜨는 것이 보였다.

에린은 멀리서도 페르딘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절박한 외침이었다.

“안 됩니다. 에린 경, 도망치세요!”

페르딘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러기 전에 아실리 공작이 그를 막아섰다.

마법사들에게 향하는 마물들을 기사들은 무척 위태롭게 막아 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늦는다면 저들이 위험할 것이다.

그녀가 늦는다면…….

결국 이제까지의 노력이 수포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첫 번째 삶에서 맞이했던 최후가 반복되리라.

그 생각을 하자 에린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 에린의 귓가에 레이먼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린 내가 말했잖아. 너는 아무 쓸모도 없는 아이라고. 결국 똑같은 일이 벌어졌어. 넌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그런 너를 좋아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뒤이어 샬롯의 목소리도 들렸다.

“당신이 뭘 바꿀 수 있다고 그러고 있는 거죠? 그냥 포기하세요. 결국 황제께서 승리하시겠군요.”

디트리온 역시 자신을 향해 이죽였다.

“에린 리서스, 꼴 좋군. 그러니 진작에 나한테 오라고 했잖아. 그랬다면 페르딘이 이렇게 죽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마지막으로 코렐리아의 목소리도 말을 보탰다.

“에린, 넌 결국 패배할 거야. 곧 지옥에서 볼 수 있겠구나.”

웃기지 마.

“이제 너네 따위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에린의 검에 기이할 정도로 많은 마나가 어렸다. 그녀는 잡념을 떨친 후 자신이 겪었던 세 번의 삶을 떠올렸다.

상실에 익숙했던 삶들이었다.

그 삶을 살아가면서 에린은 몇 번이고 다짐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겠다고.

더 이상 괴로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지키기 위해 강해졌다. 그렇기에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져야 할 순간이었다.

그제야 에린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여신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 회귀를 끝낼 마지막 결말이 어디에 있는지.

에린은 가슴이 터질 듯한 고양감을 느꼈다.

그녀에게서 찬란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아카데미에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에린에게 향했다.

곧 그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마물들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 그녀의 검에 담겨 있었다.

혼자만의 힘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에린은 발에 마나를 담은 채 뛰어올랐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이 뛰어오르는 에린의 모습에 기사들이 싸우는 것도 잃고 넋을 잃은 채 에린을 바라보았다.

* * *

황제는 지금 순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마물들은 훌륭히 아실리 공작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의 의도대로 상황은 흘러갔을 것이다.

황제는 뛰어난 마법사인 알렉시스가 결계를 쳐 사람들을 보호할 것을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상대가 아카데미의 중심부까지 찾아오리란 것 또한.

아마 그들은 마물들을 상대하느라 취약해질 테고, 그 틈을 노려 황제는 아실리 공작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린이었다. 그녀의 강함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섰다.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온 마나에 황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저 정도로 강하다고?”

황제는 에린이 자신에게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인정받으러 황궁에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 속 에린은 이렇게까지 강하진 않았다. 아실리 공작과 비슷하거나 한 수 아래 정도의 실력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실리 공작보다 더 강하다.’

모든 게 틀어졌다.

황제는 자신에게 내려졌던 성녀의 예언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는 건가?’

아니,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지우고자 했다.

저런 형편 없는 인간들에게 자신이 질 리 없었다.

여신이 그에게 내린 저주 역시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되뇌이면서.

그러나 갑작스럽게 달라진 에린의 기세는 아무리 그라도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갑작스럽게 저렇게 강해지는 게 가능하다고?”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린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흑마법을 익히고 나서 그는 두려움이란 걸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여신마저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정도였다.

그런데 에린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치 먼 과거 그가 들었던 저주가 실현될 것 같은 그러한 예감이.

그리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곧 실체가 되었다.

마물을 베어 내던 에린이 첨탑을 향해 뛰어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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