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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11화 (111/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1화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페르딘은 아텐츠 아카데미가 불타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뒤 마주한 광경은 거센 화염에 휩싸인 건물들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불길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황군을 움직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

페르딘은 아직 즉위식을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황제의 자리가 비어 있긴 했지만 마음대로 황군을 움직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원로회를 이끄는 헤도르 공작이 귀족들을 설득해 준 덕분에 임시 통솔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페르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도운 이유는 바로 자신의 아들 때문이었다.

“아몬 경이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들려온 아몬의 실종 소식은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으리라.

사실 헤도르 공작이 아들을 위해 그렇게까지 한 건 다소 뜻밖의 행보이긴 했다.

왜냐하면 아몬이 그의 기사단에 들어온 뒤부터 헤도르 공작과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후계자가 아무런 힘도 없는 제국의 2황자의 기사단에 들어간 것에 기뻐할 귀족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아몬은 아카데미가 방학을 맞이할 때에도 헤도르 공작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페르딘은 그가 자신에게 평소 투덜거리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가문에서 쫓아낼 거라고 얼마나 벼르고 계신지 몰라.”

“하여간, 못된 영감탱이.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걸?”

아몬의 말은 틀렸다. 헤도르 공작은 아몬의 실종에 그 누구보다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헤도르 공작은 곧장 귀족 원로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설득하며 페르딘에게 부탁했다.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합니다. 아카데미에서 사라진 제 아들을 찾아 주십시오, 전하.”

“만약 죽었다면, 그 아이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해 주십시오.”

페르딘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생각을 멈췄다.

절망 어린 얼굴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황제가 마법으로 피워 낸 거대한 불길이 아카데미 곳곳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공포가 아카데미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페르딘은 검을 든 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마물을 베어 냈다.

그럼에도 마물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페르딘. 이곳에 오겠다는 걸 말리진 않았으나, 조심해야 한다.”

페르딘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아실리 공작과 알렉시스가 서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건 자는 아실리 공작이었다.

알렉시스의 곁에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함께였다. 그들은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마탑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의 결계를 아카데미 근처에 펼치는 중이었다.

마물들을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결계라고 했다.

“아카데미 중심부엔 생활에 필요한 마나를 공급하기 위해 거대한 마나석이 있죠. 그 마나석을 이용해 다른 마법사들과 힘을 합쳐 결계를 만들어 낼 겁니다.”

페르딘과 기사단은 그런 알렉시스를 옆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릴리아는 알렉시스의 옆에서 페르딘을 초조하게 바라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에린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어?”

마침 에린 경도 아몬을 찾으러 간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진 차였다.

릴리아의 질문에 페르딘은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그 애가 아텐츠 아카데미로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 달라고 했어. 에린이 뭔가를 알고 있었던 걸까?”

마법사인 그녀는 흑마법의 마나를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불안한 상태였다.

“그 애는 항상 무언가를 숨기잖아. 어쩌면…… 어쩌면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어.”

릴리아의 말에 페르딘 역시 마음이 불안해지는 걸 느꼈다.

“에린을 목격했다는 검술 학부생의 말을 들었잖아. 그녀가 아몬의 행방을 물었다고. 에린은 아몬을 찾으러 간 게 분명해.”

“난 에린 경을 믿고 있어. 만약 에린 경이 아몬을 찾으러 간 거라면, 아몬은 무사할 거야.”

페르딘은 에린을 믿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녀의 행동에는 항상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페르딘은 정면을 응시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병력을 풀어 에린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이끌고 온 대부분의 병력들은 시민들의 도주를 돕고 있었다. 에린을 찾으러 병력을 풀면 그곳에 구멍이 생길 게 분명했다.

“에린 경은 걱정하지 마라.”

페르딘의 곁으로 아실리 공작이 다가왔다.

아실리 공작은 완전 무장을 한 채였다. 갑옷을 입은 그의 온몸은 이미 마물들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 정도의 기사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이 제국에 안전한 곳은 없을 테니.”

그렇게 말하는 아실리 공작의 두 눈은 흉흉했다.

그는 크게 분노했는지 평소엔 제어했었던 소드 마스터 특유의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옆에 있던 기사들이 몸을 조아릴 정도로 매서웠다.

“황제는 정신이 나갔다. 그는 제국의 적이야.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아실리 공작은 분노가 담긴 눈으로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았다.

선택 하나로 달라지는 게 인생이라지만, 아실리 공작은 자신이 맹세했던 제국의 검이 되겠다는 선택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올 거란 걸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나의 실책이다.”

아실리 공작의 말에 페르딘은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흑마법을 사용한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페르딘 역시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불타오르는 아카데미, 죽어 가는 사람들. 기사들이 최선을 다해 마물들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휘오오…….

음산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땅에서부터 강렬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아실리 공작은 그 진동을 익히 알고 있었다. 국경 근처에서 그가 자주 겪고는 했던 현상이었다.

바로 대규모의 마물들이 움직여서 일어나는 진동이었다.

잠시 후 이제까지 등장한 마물들은 장난이었다는 듯, 더 많은 마물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실리 공작의 옆에 있던 기사들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이, 이게 무슨…….”

“도망쳐야 합니다!”

“저 정도의 마물을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무리 굳건한 정신을 가진 자라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실리 공작은 검을 쥔 채 정면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 * *

황제는 멀리서 페르딘과 아실리 공작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쓸모없는 것.”

코렐리아가 에린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그는 그 사실을 코렐리아의 눈을 통해 낱낱이 알 수 있었다.

마나석을 먹어 그와 코렐리아의 정신을 연결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한 에린의 인영은 망설임 없이 코렐리아를 베었다.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가족을 베었다기엔 다소 자비 없는 손속이긴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냉철한 아실리 공작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해 보였다

‘그래도 에린 리서스에게 상처를 입히긴 했군.’

그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다니…….

황제는 상황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는 황궁의 깊은 곳에서 흑마법서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그가 오랜 세월 동안 꾸며 온 일이었다.

그런 만큼 코렐리아와 그가 했던 계획은 완벽했다.

만약 그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이 땅의 모든 건 그의 손안에 떨어졌을 것이다.

수명을 연장하는 흑마법 역시 준비해 둔 상태였다.

쓸모없는 것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서 평생 신으로 군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어그러졌다.

“망할 소드 마스터 녀석들. 전부 다 죽였어야 했어.”

그는 이를 갈며 마물을 상대하고 있는 아실리 공작을 노려보았다.

이때를 위해 그가 만들어 낸 걸작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있다면 아실리 공작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 여자의 말대로 이루어질 줄 알아?”

황제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자주 성녀를 불러 미래에 자신의 모습에 관해 묻고는 했다.

미래에 대해 예언하면 그녀의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죽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묻는 황제의 물음에 성녀는 비웃음을 지으며 악담을 쏟아 내었다.

“당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실패할 거야.”

“짐이 실패한다고?”

“그래, 당신의 최후를 말해 줄까? 당신은 이제까지 저지른 모든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끔찍한 지옥에서 억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통받겠지.”

“네년이 미친 게로군.”

“진짜 미친 게 누군데? 내가 예언 하나 해 주지.”

“…….”

“당신이 가장 없애고 싶어 하던 자들이 당신에게 끔찍한 최후를 안겨 줄 거야.”

“…….”

“그러니 여신께서 손수 안겨 주실 고통을 기다리기나 해.”

황제는 그녀의 말에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든 건 성녀가 그러한 예언을 하고 나서 급속도로 몸이 약해지기 시작했단 것이다.

그것은 성녀가 진실된 예언을 했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그것들은 거짓을 말하지 못하지.’

다행인 점은 그는 자신이 없애고 싶어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아실리 공작 같은 자들을 증오했다. 자신의 명령을 벗어날 수 있는 강자들.

어차피 자신이 만들어 낼 새로운 세상에선 필요 없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강해질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손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한 짓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 또한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그가 시선을 돌려 아실리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물들이 아실리 공작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황제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이어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황제의 두 눈에 경악이 담겼다.

마물보다 더 마물 같은 자가 빠른 속도로 아실리 공작과 페르딘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바로 에린이었다.

그런 에린을 보며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런…… 괴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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