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10화
아카데미로 향하는 내내 에린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에린은 코렐리아가 그녀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넌 행복해질 수 없어.”
“에린, 너는 나쁜 아이라 모두를 불행하게 해.”
“너는 모두를 죽게 할 거야.”
레이먼과 샬롯을 죽이고 난 뒤, 에린은 종종 악몽을 꾸고는 했다.
그들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그녀의 사람들을 죽이는 꿈이었다.
코렐리아의 악담은 에린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어느 순간부터 에린은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아마 페르딘이 빈 소원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그녀가 행복해질 기회를 주세요.”
그때부터 에린은 행복으로 이루어진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악몽을 전부 가져간 것 같이, 눈물 날 정도로 따뜻한 꿈이었다.
결국 모든 복수에 성공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 살아남는 꿈.
그곳엔 모두가 함께 있었다.
이전 생과는 달랐다. 아픈 사람도, 괴로운 사람도. 상실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웃으며 과거와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린은 코렐리아의 말이 전부 거짓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바꾼 미래였다.
아무도 죽지 않을 테고, 아무도 그녀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에린은 아카데미에서 근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기운을 느꼈다.
원래라면 그 기운에 불안해했을 테지.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향해 달리다가 넘어질 수도 있다. 그 길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터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페르딘이 빌었던 소원처럼, 에린은 결국엔 눈부시도록 찬란한 행복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해질 거야.’
에린은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행복을 위해서, 그녀는 지금 나아가야만 했다.
* * *
이시스는 여신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관인 그가 날마다 반복하는 일정 중 하나였다. 옆에 있던 교황은 차가운 눈으로 그런 이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시스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기도를 끝마칠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교황은 기도실을 살폈다.
기도실엔 단 두 사람만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한 그가 잠시 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시스, 당신은 여신을 믿고 있는 건가?”
교황의 말에 눈을 감고 있던 이시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다. 여신의 기적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 않은가.”
“…….”
“공녀가 신탁을 받는다고 했지만, 난 믿을 수 없다. 신탁을 받는다면 이 미래를 모를 리 없었겠지.”
교황을 바라보는 이시스의 두 눈이 차가워졌다. 공녀를 모욕하는 말만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미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페르딘 전하의 증언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시스는 얼마 전에 페르딘이 전해 준 말을 떠올렸다.
공녀가 영원한 잠에 빠진 이유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신탁을 발설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분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겁니다.”
“그 결과가 고작 이것뿐인가?”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이시스, 멍청한 짓 하지 마라. 결국엔 폐하께서 승리하실 거다.”
이시스는 이를 악문 채 교황을 노려보았다. 교황의 두 눈엔 광기가 어려 있었다.
“여신은 결국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껍데기일 뿐이야.”
교황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여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면 왜 황제를 막지 못했겠는가.
교황은 자신이 누구보다 여신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그런 강한 신성력을 타고나서 교황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거니까.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교황은 멀쩡하던 자신의 신성력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을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이유에 대해 거듭 고민해 본 결과, 그는 곧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었다.
‘여신의 힘이 다한 게 분명하다.’
황제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여신의 힘이 다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성력이 사라진 것이라고.
그렇기에 황제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의 편에서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황제께서 힘을 드러내셨다. 네가 섬기는 그자는 죽을 거야. 그뿐일까? 제국의 모든 게 변할 것이다. 여신이 사라진 이상, 신전 역시 쓸모가 없어지겠지.”
“…….”
“황궁에서 연락이 왔다. 아텐츠 아카데미 쪽으로 지원을 부탁하더군. 교황의 권한으로 지원은 거절하려 한다”
교황의 말에 이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신님이 힘을 잃었다고 하셨습니까?”
이시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여신의 힘이 건재하단 걸 본 사람이었다. 그의 몸에 넘쳐나는 신성력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여신은 힘을 잃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전부 마물이 되겠지. 이미 늦었어.”
교황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이시스를 조롱했다.
“신전 자체가 교황의 영향력 안에 있는 걸 알고 있겠지? 이시스, 너는 여기 내내 갇혀 있어야 할 거다.”
교황이 허락하지 않은 자는 신전에서 나가지 못했다. 여신의 대리자인 교황 위에 오르면 가질 수 있는 이능 중 하나였다.
“대신관들에겐 이시스 사제 역시 지원을 반대했다고 전해 주지.”
“…….”
“폐하께선 누명을 쓰신 거고 이 일의 주동자는 페르딘 렉시아라고 말이야.”
교황은 그대로 이시스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진 이시스의 말에 그대로 멈춰 섰다.
“당신은 전부 틀렸습니다.”
“내가 틀렸다고?”
이시스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교황은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그는 생각보다 성격이 좋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사람들을 건드렸을 땐 화를 참는 법이 없었다.
때마침 여신께서도 교황이 하는 꼴을 두고 보기 힘드신 것 같았다.
이시스는 자신의 몸에 차오르는 강대한 신성력을 느꼈다.
그는 그 순간 여신에게 자신이 선택받았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교황은 틀렸다.
여신의 힘은 건재했다.
그리고 여신은 배신자를 내버려 둘 자비로운 신이 아니었다.
이시스는 교황의 어깨를 밀치고 그를 지나쳤다.
“이 건방진……!”
“지금 이곳을 나서는 순간부터, 교황은 제가 되겠군요.”
“뭐?”
이시스는 그대로 교황을 지나쳤다.
“대신관들에겐 제가 대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교황께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 교황직에서 물러나셨다고요.”
교황은 이시스의 행태에 비웃음을 지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말을 하는 그가 우습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은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박였다. 이시스가 망설임 없이 기도실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뭐야, 어떤 술수를 부린 거냐?”
그의 허락 없이 신전 내부를 오가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황은 서둘러 이시스를 따라가려 했다.
“지금 당장 이 문을 열어! 이시스 이그자르트. 당장!”
그는 교황이었다. 신전은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 하지만 기도실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에린은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마물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봐도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었다.
에린은 눈을 감은 채 느껴지는 마나에 집중했다. 익숙한 사람들의 마나들과 흑마법의 끔찍한 마나가 뒤섞여 그녀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주변에 기사들의 기척도 느껴지고 있었다.
‘대규모 병력도 있어.’
이에 에린은 마탑이 힘을 보탰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아카데미의 위험을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한 듯했다.
‘알렉시스 님의 도움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병력을 순간 이동 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
알렉시스를 통해 추가 병력이 도착해도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아텐츠 아카데미를 벗어나면 바로 민가가 있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하급 마물을 상대하기도 역부족이다.
만약 마물이 한 마리라도 탈출한다면 큰 피해를 입힐 것이 뻔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요!”
“마물이 등장했어요!”
“엄마, 으아앙!”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에린은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마물에 쫓기는 모습이 보였다.
에린은 검을 쥔 채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곧 그녀의 검이 아이들을 쫓고 있는 마물의 목을 베었다.
순식간에 마물 한 마리를 해치운 그녀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또 다른 마물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단칼에 마물 두 마리를 해치운 모습에 사람들은 도주하는 것도 잊고 에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린은 공포에 떠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 에린 경!”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아실리 공작의 수석 기사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괜찮으십니까? 어디서 그런 상처를 입으신 겁니까!”
수석 기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에린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아실리 공작님은 어디로 가셨죠?”
마나가 섞여 있어 아실리 공작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힘들었다.
그녀의 질문에 수석 기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페르딘 전하께서는 탑주님과 함께 아텐츠 아카데미 안쪽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마물들을 가두는 결계를 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에린은 얼굴을 굳혔다. 그건 수석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섬뜩할 정도로 압도적인 마나에 그가 충격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공작님께서 지금 전투를 벌이시는 걸까요?”
아카데미의 중심지에서 아실리 공작과 황제의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