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09화
아몬과 필립은 철창을 구부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필립은 약간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더니, 철창이 눈에 띄게 구부러졌다.
‘아몬 경이 체력 단련을 열심히 하더니 확실히 달라졌구나.’
필립의 두 눈이 반짝였다. 아몬의 성장 속도는 확실히 놀라울 정도였다.
어느 순간부터 열심히 단련을 하더니,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냈다.
‘옛날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에린은 참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다. 필립은 그래서 그녀가 좋았다.
콰앙!
필립은 위쪽에서 갑작스럽게 들리는 거대한 소리에 인상을 썼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아몬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모르겠어…… 누군가가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
“싸우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다고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아몬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필립의 말대로였다.
누군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몬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간신히 한 사람이 나갈 수 있을 만큼의 간격이 확보되었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철창을 빠져나왔다.
“빨리 열쇠를 찾아, 필립!”
아몬은 검을 챙기자마자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상처가 그를 가로막았다. 아몬은 어깨에 난 상처를 손으로 감쌌다.
철창을 휘느라 상처가 더 벌어졌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코렐리아의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있으면 죽거나 인질로 쓰일 게 분명했다.
철창 안에 갇힌 예비 기사들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아몬을 향해 말했다.
“저희를 버리고 가십시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학생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게 뻔할 만큼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일 것이다.
아몬은 저런 어린 학생들마저 납치해 온 코렐리아에게 분노를 느꼈다.
“젠장,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무도 두고 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었다. 기사들의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곧 이곳에 기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미친 듯이 열쇠를 찾는 아몬을 보며 필립은 고민했다.
그의 갈등은 짧았다.
“죄송합니다, 아몬 경.”
“필립? 그게 무슨…….”
필립은 아몬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한 아몬은 반항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몬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필립은 아몬을 아까부터 눈여겨보던 탁상 아래에 숨겼다. 긴 천이 있어 그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졌다.
‘뭐, 들켜도 헤도르 공작가의 사람이니 죽이지는 않겠지.’
아몬은 매우 훌륭한 인질이었다.
그가 코렐리아 손에 잡힌다면 에린의 약혼자인 페르딘 경이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어도 지금 상태로 전투를 했다간 아몬 경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에린이 슬퍼할 것이다.
아몬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 에린과의 대련에서 승리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에린에게 빚을 갚겠다고 한 다짐을 지키는 게 먼저였다.
필립은 검을 바로잡았다.
곧이어 기사들이 나타났다.
“네놈! 어떻게 나와 있는 거지?”
싸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저들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초급반의 학부생인 그가 상대하기엔 코렐리아의 기사들은 너무 강했다.
기사들의 얼굴이 어딘가 겁에 질려 있었지만, 필립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몬 경과 나눈 말을 지킬 수 없겠군.’
명예를 위해 죽진 못했으나 다른 사람을 지키고 죽을 수 있게 됐다. 기사다운 최후였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덤벼라!”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의 검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혔다.
“감히 아카데미 학부생 주제에……!”
필립의 공격을 받은 기사가 살기를 담은 검을 내질렀다.
필립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그 검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사의 검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검이 기사의 검을 쳐냈다. 필립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에린이 기사들을 단칼에 해치우는 게 보였다.
그녀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기사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으며 쓰러졌다.
필립은 자신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쓰러지는 기사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순간 그는 아몬에게 했던 말이 떠올렸다.
“제 목표가 뭔지 아십니까, 아몬 경?”
“언젠가 에린을 대련에서 이기는 겁니다.”
그래. 확실히…… 너무 큰 목표일지도.
‘기사로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구나!’
필립은 고개를 저으며 약한 생각을 한 것을 반성했다.
기사들을 해치운 에린이 그에게 다가왔다.
“필립, 괜찮아? 너도 납치당했었구나.”
필립은 에린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의 상처를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에린, 다쳤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별거 아냐. 그것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나도 그렇고, 다들 코렐리아에게 당했어.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지.”
에린의 눈에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보였다.
코렐리아는 아몬을 납치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죄 없는 학생들도 납치한 것이다.
에린의 얼굴이 굳었다.
코렐리아가 했던 말을 에린은 허투루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더라도 황제가 모든 걸 파괴할 거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몬 경은 탁상 아래…….”
서둘러 아몬을 꺼내려던 필립은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이상할 정도로 불길하고 음습한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기운이었다.
“이 역겨운 기운은 대체 뭐야?”
그 순간 에린은 코렐리아가 했던 말들을 이해했다.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그녀가 방금 떠나왔던 아카데미였다.
* * *
알렉시스는 페르딘을 바라보았다.
그가 느낀 마나의 흐름은 정확히 아텐츠 아카데미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황제가 아카데미로 이동했다는 뜻이었다.
‘이 불쾌한 마나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군.’
알렉시스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전면전을 하자고 그에게 말하는 듯했다.
‘그만큼 힘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방 안에는 짙은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황제가 흑마법을 사용했습니다.”
“…….”
“아카데미가 위험합니다. 황제가 서쪽 숲으로 대규모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어요.”
“아버지가 결국엔 최악의 선택을 하셨군요.”
“군대를 움직이셔야 합니다, 전하. 마탑 역시 따르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페르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황제는 최악의 사람이었지만 제국인들에겐 자랑스러운 지도자였다.
아카데미를 침략하겠다는 건 그 주변에 있는 제국인들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과 시민들을 구분해서 공격하진 못할 테니.’
황제는 그의 마지막 인간성마저 저버린 것이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위험합니다.”
알렉시스의 말을 들은 페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들끓었지만, 지금은 이성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흑마법을 사용한 대가를 치를 겁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페르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렉시스는 자신의 옆에 있는 마법사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당장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라, 후작성에 계시는 아실리 공작님을 모시고 와.”
* * *
에린은 상처가 난 허벅지를 동여맸다. 그녀의 옆엔 필립이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는 방금 느껴진 불길한 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넌 알고 있어, 에린? 이렇게 불쾌한 마나는 처음이야.”
“나도 잘은 몰라. 하지만 아카데미 쪽으로 빠르게 이동해야 할 것 같아.”
에린은 필립을 지나쳐 아카데미 학생들이 갇혀 있는 철창 앞에 섰다.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보이지 않았어.”
“괜찮아. 열쇠가 없어도.”
에린은 검을 들어 올렸다.
필립은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에린이 검을 휘두르자 철창이 깔끔하게 베어졌다.
‘손으로 마나 제어석을 구부리는 사람이었지.’
놀라울 정도의 검술 실력에 그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몇 번의 칼질로 모든 학생을 구해 낸 에린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최대한 아카데미에서 멀리 대피하세요.”
“아카데미에서요?”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에린의 대답에 아카데미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필립을 향해 말했다.
“아몬 경이 다친 거지?”
“그렇긴 한데 에린, 너 설마 혼자 가려고?”
“어쩔 수 없어. 너는 그를 데리고 신전으로 가 줘. 시간이 얼마 없어.”
“…….”
“부탁해.”
에린을 바라보며 필립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가 하는 일에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에린의 말이 맞았다.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지 않는다면 아몬의 목숨이 위험했다.
“에린, 다시 만나자. 다치지 마.”
그 말을 남긴 필립은 아카데미 학생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잠시 그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던 에린도 빠르게 아카데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