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06화
아몬은 생각했다.
예전이었다면 그도 필립의 말처럼 행동했을 터였다. 어떻게 해서든 페르딘의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에린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난 살아…… 남을 거야, 필립.”
필립은 잠시 아몬을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놀랐다는 얼굴로 아몬에게 물었다.
“전, 경이 그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필립의 말에 아몬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역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으니까.
“에린이 말하더군.”
“…….”
“살아 달라고. 그 애는 참 이상해. 항상 위험하게 행동하는 건 본인이면서 마치 주변 사람들이 죽는다는 듯이 굴고는 했어.”
그렇게 말한 아몬은 필립과 눈을 마주쳤다.
“난 아직 에린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어. 죽기로 다짐한 목숨을 그 애가 살려 줬거든.”
그의 말을 들은 필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전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사입니다.”
“너…….”
“하지만 당신의 말도 맞습니다. 저 역시 에린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어요. 그전에 삶을 포기하는 건 책임을 회피하는 거나 다름없겠죠.”
“…….”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어요.”
필립은 그렇게 얘기하며 어딘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군요. 제 목표가 뭔지 아십니까, 아몬 경?”
“뭔데 그래?”
“언젠가 에린을 대련에서 이기는 겁니다.”
아몬은 필립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압니다. 힘든 거! 하지만 옷깃이라도 스쳐 보고 싶다고요.”
아몬은 필립을 바라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더더욱 오래 살아야겠군.”
그는 에린을 제외하고 초급반의 학생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필립 역시 에린과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었다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꽤 괜찮은 녀석이었군.’
아몬은 그렇게 생각하며 철창 밖을 응시했다.
이제야 필립이 괜찮은 녀석이란 걸 알았는데 그들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전체가 위험해.’
코렐리아가 그와 같은 예비 기사들을 노린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페르딘이 쫓고 있는 무리가 아카데미에 몰래 잠입했다는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이지만 어쩌면…… 황제의 목적이 아카데미일지도 모른다.
아몬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최악이야.’
엉망이 된 필립의 상의를 보니 그가 급한 대로 옷을 찢어 그의 어깨를 지혈해 준 것 같았다.
하지만 상처가 깊은지 출혈은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처를 꿰맬 수 있는 실과 바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몬은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다행히 마나 제어석으로 이루어진 철창은 아니야.’
마나 제어석으로 이루어진 철창은 매우 비싸다. 그래서 중요한 죄인을 가둘 때를 제외하고는 일반 철창을 사용하고는 했다.
지금 그들이 갇힌 철창도 그러했다. 무기를 빼앗았으니 그들을 가둬 놓기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아몬의 두 눈이 반짝였다.
* * *
에린은 릴리아에게 공간 이동 마법을 부탁해 무사히 아텐츠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릴리아는 에린의 급박한 표정을 보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에린은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에린은 이 길의 끝에 그녀가 원하는 답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을 느꼈다.
“그 소문 들었어? 페르딘 전하가 이번에 즉위식을 할 거라고…….”
“뭐? 폐하께서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텐츠 아카데미에 도착한 에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을 느꼈다.
“에린 리서스야.”
“세상에. 아카데미를 아예 떠났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잠깐 들른 거겠지. 소드 마스터가 왜 아카데미를 다녀.”
“대련해 달라고 하면 해 주실까?”
“무례한 짓 하지 마.”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에린은 아몬이 있던 의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어리숙해 보이는 학생 한 명만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에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 에린 경?”
“혹시 아몬 경을 보지 못하셨나요?”
에린의 질문을 받은 학생은 손을 덜덜 떨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감격 어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에린의 질문을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꺼냈다.
“아, 그게…… 저도 여기 누워 있는 처지라 잘 모르지만 어제부터 아몬 경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아카데미에서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어제부터요?”
“네. 어제 의무실을 나가시면서 저한테 바로 수련을 하러 갈 거라고 하셨거든요. 워낙 성실하신 분이시니까요. 그런데 연무장에 있던 사람들도 못 봤다고 합니다.”
“…….”
“아몬 경뿐만이 아니에요. 몇몇 예비 기사들이 함께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고마워요.”
에린이 인사하자 학생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의무실을 나가는 에린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어제 사라졌다면, 아직 늦지 않았어.’
아직도 뭐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녀가 꾼 꿈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아몬의 납치에 코렐리아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에린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서둘러 그를 찾아야 한다.
* * *
그 시각.
아몬은 철창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이 빨개지며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몬 경, 뭐하십니까?”
필립은 괴이쩍다는 눈빛으로 아몬을 바라보았다.
“여기 갇혀서 죽을 순 없잖아. 발악이라도 해 봐야지.”
“…….”
“코렐리아가 오기 전에 저 밖에 놓인 무기를 들고 탈출해야 할 거 아냐. 빨리 너도 도와.”
“정말 이렇게 해서 탈출하실 수 있을 거라 봅니까? 아무리 마나 제어석이 아니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필립의 말에도 아몬은 얼굴을 벌게지도록 힘을 주며 창살을 휘려 했다.
“에린도 탈출할 때 이렇게 했어.”
필립은 할 말을 잃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에린이 마나 제어석으로 만들어진 감옥 창살을 손으로 구부려 탈출한 이야기는 유명했다.
그 역시 그 일을 들었을 때 충격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을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그렇지 사람이 마나 제어석을 구부리는 게 가능할 줄은 몰랐지.’
지금 에린이 한 일을 아몬은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 철창이 마나 제어석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터무니없는 일인 건 변함이 없었다.
“코렐리아에게 들킬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몸 상태도 안 좋으신 분이…….”
“뭐, 그땐 명예롭게 싸우는 거지.”
“비키십시오.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번갈아 가면서 하자.”
필립은 한숨을 내쉰 채, 아몬을 돕기 시작했다.
* * *
코렐리아는 기사들과 함께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아래에 있는 예비 기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폐하께서 오시면 처리하실 거다.”
“…….”
“아몬 헤도르 정도는 인질로 쓸 수도 있겠군.”
“아, 그렇군요. 헤도르 공작은 귀족파의 수장이지요.”
“맞아. 그리고 그의 아들은 2황자의 예비 기사단원이지. 황제 폐하께서 가장 원하실 인질이다.”
코렐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아몬을 마물로 만드는 것도 재밌을 테지만, 그를 인질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상처는 절대 치료해 주지 말도록. 저항이 거셌던 놈이야. 치료해 줬다가는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코렐리아는 아몬의 부상이 꽤 심하다는 걸 알지만 방치했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른 자이니 그 정도 상처로 죽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마물로 만들든, 인질로 활용하든 코렐리아는 아몬에게 끔찍한 고통을 줄 심산이었다.
지난번 아카데미 방문 때 그가 에린과 꽤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에린을 대신해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어. 그러게, 친구는 가려 사귀었어야지.’
사실 코렐리아는 내심 에린을 죽이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녀를 처음부터 죽이지 못한 것도, 그리고 서부의 마물들을 잃게 된 일도.
그녀가 리서스 후작가에서 쫓겨나게 된 것도.
전부 그들의 패배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폐하의 마물들은 강해. 하지만 과연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황궁에서 에린을 봤을 때부터 느껴지던 감정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 이후부터 잠들 때마다 끔찍한 악몽이 반복되었다.
코렐리아는 자신의 옆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경은 예지몽을 믿나?”
“예지몽 말씀이십니까? 신을 믿는 자들은 예지몽이 신의 마지막 안배라 말하더군요. 저는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나도 꿈 따위 믿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코렐리아는 앞을 응시했다. 요즘 그녀가 꾸는 악몽은 단순했다.
‘이런 저택이었지.’
저택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에린이 찾아오는 꿈이었다. 코렐리아는 가슴 속에 섬뜩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말도 안 되는 꿈이다. 불안해할 필요도 없는…….’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던 코렐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코렐리아 님, 괜찮으십니까?”
코렐리아의 곁에 있던 기사들도 그녀의 동요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코렐리아는 앞을 응시했다. 아실리 공작에게서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곳으로…… 오고 있어.”
기사들이 코렐리아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숲 쪽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린 리서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