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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05화 (105/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05화

서부로 돌아간 이시스는 바로 중앙 신전에 들렀다.

페르딘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날 이곳에 보낸 이유.’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노쇠한 노인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나오는 걸 느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앞에서 탐욕스러운 눈빛을 빛내는 자가 그들의 지도자인 교황이다.

“폐하께서 흑마법을 사용했다고?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아시지 않습니까. 전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진실을 확인할 성녀도 정신을 잃지 않았나, 쯧쯧.”

이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성녀님께서 함께하셨다면 교황을 설득하기 더 쉬웠을 텐데.’

그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교황은 그를 믿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 한들 교황은 지금처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할 수도 있겠지.’

이시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의 옆에 서 있는 헬릭스는 당장이라도 교황을 벨 듯이 날 선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시스는 헬릭스의 팔을 잡아 그가 발검하려는 걸 제지했다.

교황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헬릭스를 쳐다보며 외쳤다.

“저 불경한 놈! 감히 여신의 선택을 받은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봐?”

그의 곁에 있던 성기사들이 교황을 지키듯이 일제히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모두가 교황을 지키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이시스와 헬릭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성기사들 중에는 이시스에게 눈짓을 보내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시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헬릭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시스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페르딘을 위해서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참아 냈다.

차기 교황 후보로 거론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모욕을 견뎌 냈던가. 교황의 무시 정도는 이시스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잘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이시스가 그 말을 남기고 일어났다.

“성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의 편을 드시는지 모르겠군요.”

“…….”

“여신님의 진정한 뜻을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무언가 숨기는 게 있으신 건가요?”

알면서도 외면하지 말아라, 이시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교황은 분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헬릭스와 자신을 바라보는 성기사들을 보고 화를 억눌렀다.

이시스는 그대로 뒤돌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헬릭스는 그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교황이 아무리 반대해도, 결국엔 페르딘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는 걸 막을 순 없을 겁니다.”

대사제들은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다. 교황이 반대한들 대사제들의 과반수가 동의하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를 가만히 둘 수는 없겠지요.”

이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교황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원래부터 마음에 드는 자는 아니었지만, 지금 교황의 태도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명령을 내려준다면…… 베고 오겠어.”

헬릭스의 말에 이시스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헬릭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당신은 페르딘 전하와 에린 경에 관련된 일에 언제나 성급하게 결단을 내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시스도 헬릭스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교황을 없애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아시겠지만, 이미 신전의 사제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성력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니까요.”

교황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행사를 그는 몇 년간 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로 신성력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어.’

이시스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시간은 결국 그들의 편이었다.

저곳에 있는 교황도, 황제도 결국엔 무너질 것이다.

* * *

‘이건, 꿈이다.’

에린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몬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그의 얼굴 앞에 멈춰 섰다. 에린은 이때가 언제인지 깨달았다. 아몬과 처음으로 결투를 했을 때였다.

‘이때 아몬이 큰 충격을 받았었지.’

꿈은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빠르게 다른 기억을 보여 줬다.

아몬은 에린이 놀랄 정도로,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에린은 그의 노력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아몬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초급반 학생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그들 한 명 한 명을 전부 좋아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몬 경이 과거와 다르게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처럼만 열심히 훈련한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라고 에린은 생각했다.

그때였다.

꿈속의 아몬이 에린을 향해 말했다.

“에린, 난 페르딘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

“설령 내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이라도……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인랑족의 사건이 벌어진 뒤, 아몬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에린은 인랑족의 영토에서 아몬이 죽으려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군에게 피해를 주느니 자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고귀한 기사.

그의 사고방식은 누구보다 기사다웠다. 하지만 에린은 그가 스스로 포기하길 원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지 말아요. 페르딘 경은 당신이 살아 있는 걸 더 원할 테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해요, 아몬 경.”

그때, 아몬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순식간에 에린의 시야가 반전되었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자신의 앞을 응시했다.

코렐리아가 에린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그녀가 에린을 향해 표독스러운 얼굴로 쏘아붙였다.

“에린, 넌 쓸모없는 아이야.”

“너 때문이야, 전부 너 때문에…….”

“죽는 거야.”

에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꿈이어서 그런지 보여 주는 사건들이 두서가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더니, 이제는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에린은 언제나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뽑아 들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코렐리아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 웃기 시작했다.

코렐리아가 에린을 향해 말했다.

“내가 네 소중한 것들을 모두 빼앗을 거야, 에린.”

그 순간, 에린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불쾌한 느낌에 에린은 몸을 옅게 떨었다. 코렐리아가 나오는 악몽은 언제나 그녀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대체 왜 이런 꿈을…….’

에린은 이를 악물었다.

원래라면 그냥 넘어갔을 꿈인데 이번에는 왜인지 이상한 직감이 들었다.

‘아몬은 아카데미에 있어.’

당장이라도 아몬을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르딘 경과 아실리 공작님이 당장 아카데미 쪽으로 움직이긴 힘들겠지.’

그들은 황제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그를 무너뜨릴 계책을 실행하는 중이다.

그런 이들에게 불길한 꿈을 꾸었다고 아카데미에 가자고 하는 건 맞지 않았다.

에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신이시여, 아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제발 그를 지켜 주세요.’

에린은 공작이 공녀가 쓰려졌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부터 여신이 페르딘의 소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어요.’

공녀가 영원한 잠에 빠졌을 때부터 에린의 행복은 이미 이루어질 수 없게 됐다.

누군가의 희생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그녀는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에린은 기사복을 갖춰 입고 검을 허리춤에 걸었다.

* * *

아몬은 자신이 어두운 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돌이 얹어진 것처럼 상체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

어깨 쪽에선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고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에 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아몬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호흡이 점차 가빠지고 있었다.

“아몬 경, 괜찮으세요?”

아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필립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걱정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립이 대체 왜 여기 있지?’

아몬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코렐리아가 갑자기 나타났고, 그녀가 검을 휘둘러 날 찔렀어.’

필립 역시 그보다는 아니지만, 다친 상태였다.

그리고…… 이곳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몬이 인상을 쓰며 필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왜 여기 있는 거야?”

“후작 부인, 아니 코렐리아에게 잡혀 왔습니다.”

그의 말에 아몬은 두 눈을 찌푸렸다.

“나…… 좀 일으켜 줘.”

“상태가 좋지 않아요. 저는 괜찮지만, 아몬 경은 중상이라고요. 그냥 누워 계세요.”

아몬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외쳤다.

“그냥…… 일으켜!”

“하여간, 다쳤어도 성격은 여전히 불같으시네요. 충격받으실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건데.”

필립은 그렇게 투덜대며 그를 일으켰다.

아몬은 필립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필립의 말대로 그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갇힌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코렐리아 그 여자는…… 대체 뭘 하려는 생각이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저 마물들을 보면 일단 제정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몬은 필립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검술 학부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건, 남은 공간에 갇혀 있는 마물들이었다.

아몬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인랑족 토벌 때처럼, 짐덩이가 되었단 사실을.

필립은 아몬을 향해 물었다. 그의 두 눈에 담겨 있는 결연한 의지를 아몬은 보았다.

“아몬 경, 어쩌실 겁니까.”

“…….”

“저는 기사로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인질이 되어 목숨을 부지한들 의미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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