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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03화 (103/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03화

에린은 눈을 떴다.

마물이 남아 있는데 페르딘을 두고 정신을 잃다니.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빠르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녀가 일어나지 못하게 누르고 있었다.

에린은 자신을 누르는 게 마법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누가 마법을 사용한 거지?’

무뎌졌던 감각이 점점 돌아오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에린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일찍 깨어나셨군요.”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보며 인상을 썼다.

페르딘과 함께 황궁 지하에 왔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릴리아가 그를 타박하는 모습이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제 이름은 알렉시스입니다.”

알렉시스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며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마탑주…… 님?”

알렉시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뭐, 별건 아니지만 그런 일도 하고 있습니다.”

에린은 그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국의 마탑주 알렉시스는 황제의 명이 없는 이상 마탑에서 나오길 꺼린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자가 왜 페르딘 경과 함께 있었던 거지?’

에린은 페르딘을 찾으려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일어나지 마십시오. 조금 더 누워 있는 게 좋을 겁니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말에도 에린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페르딘 경은 괜찮나요? 제가 마물들을 전부 처치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무슨 그런 겸손한 소리를. 에린 경께서 마물들 대부분을 처치해 주신 덕분에 나머지는 금방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친 사람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렉시스는 에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마음속의 차기 황제로 페르딘을 생각하고 있었다.

2황자와 함께하기로 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알렉시스가 보기에 페르딘은 에린을 좋아하는 듯했다.

마법을 오래 배우다 보면 일반인보다 안목이 높아지는 법이다.

알렉시스는 내심 그녀가 자신과 한편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상급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황궁의 지하를 초토화한 사람이었다.

그 광경을 떠올리자 알렉시스는 뒷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무시무시한 숫자의 마물들이었지…… 그 마물들을 혼자서 상대한 사람이다.’

상급 마물들로 이루어진 마물 떼를 혼자서 상대하는 건 세상의 진리를 깨우친 그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렉시스는 눈앞의 에린이 다른 사람과 무언가 다르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군. 운명이…… 뒤틀려 있어.’

에린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거란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강함이 말이 되는군.’

알렉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릴리아가 본다면 경악할 만큼 다정한 미소였다.

본질을 보는 마법사답게, 앞에 있는 기사가 어떠한 운명을 헤쳐 왔는지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디트리온은 어떻게 되었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어울리는 곳에 가둬 두었으니까요.”

알렉시스의 말에 에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디트리온은 도주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황제와 코렐리아는 이미 도주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쉽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신전에서 황궁에서 흑마법을 이 사용됐단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을 잡는 건 시간문제니까요.”

“…….”

“마침 페르딘 전하께서 오고 계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알렉시스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에린 경께서 누워 계신 동안 온종일 침대 옆에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알렉시스의 갑작스러운 말에 에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 분의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사람들이 떠들어 대던 말과는 딴판이군요. 곧 혼인도 하시겠지요.”

“……?”

“혼인하실 게 아닙니까?”

“혼인이요?”

에린은 상상해 본 적조차 없는 일이었다. 페르딘과 혼인이라니.

물론 그녀가 그를 좋아하고, 페르딘에게 좋아한다는 고백도 받았지만 당장 눈앞에 일들을 신경 쓰느라 그 미래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당황은 잠시였다.

에린은 금세 냉정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모든 일의 가장 중심이 되는 황제와 코렐리아가 도망쳤으니까.’

에린은 이불을 그러쥐었다.

그때였다. 알렉시스의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딘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에린을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린 경? 깨어나셨……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알렉시스의 질문 때문에 에린의 얼굴에 아직도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에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페르딘이 알렉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페르딘은 에린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 몸 상태를 확인한 페르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한참 못 일어나시는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페르딘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디트리온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그는 에린이 걱정되어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알렉시스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마음 같아선 그도 이 상황에서 빠져 주고 싶었지만, 페르딘과 할 얘기가 있었다.

‘이거야 원, 눈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군.’

알렉시스는 페르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했다.

“방금 신전과 연락을 마쳤습니다. 신전의 공증이 끝나는 대로 황제와 1황자가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공표할 예정입니다.”

“네.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잠시만요.”

알렉시스의 말에 페르딘은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귀족들이 황궁으로 찾아오겠지. 아버지의 편을 드는 귀족들도 있을 거야.’

황제 혼자 모든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이번 일에 관여한 자들을 찾아야만 했다.

황제가 사라진 제국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황제의 편에 선 귀족들을 색출하고, 신전과 마탑 그리고 귀족 원로회의 승인을 받아 그가 황제 위에 오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에린 경이 소드 마스터임을 널리 알리고 황제와 코렐리아의 만행을 밝혀야 해. 당장 모든 진실을 알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페르딘은 에린을 바라보았다.

‘아실리 공작님과 리서스 후작님께서 큰 힘이 되어 주시겠지.’

그는 생각을 이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가 과연 순순히 물러날까?

아니, 애초에 왜 황제를 황궁에서 발견하지 못했을까.

페르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적으로 든 한 가지 생각에 그는 알렉시스를 바라보았다.

“리서스 후작님이 위험합니다. 아버지는 절대 자신을 거스른 자들을 가만히 둘 분이 아닙니다.”

“…….”

“코렐리아가 정체를 들킨 순간부터 리서스 후작가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으셨을 겁니다.”

“…….”

“알렉시스 님, 공간 이동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설마 황제가 리서스 후작성으로 갈 거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확실합니다.”

“자신을 거스른 후작가를 먼저 없애려 한다라. 그다운 발상이긴 하군요.”

황제는 이런 그의 생각까지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후작성으로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페르딘은 에린을 위해 일말의 위험한 가능성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에 알렉시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코렐리아의 예상대로, 그녀는 리서스 후작성 근처 저택에서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이 당한 일은 무조건 돌려주어야 속이 시원한 분이니…….’

자신의 기사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리서스 후작을 해치울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황제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마물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가 이제까지 벌어진 일들을 모를 리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코렐리아에게 물었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세히 보고해라, 코렐리아.”

코렐리아는 지금껏 벌어졌던 일들을 그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황궁의 마물들이 아실리 공작과 에린에게 전부 처리됐다는 것과 디트리온이 인질로 잡혔단 사실까지.

그녀의 말을 들은 황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에린 리서스…… 그 아이를 진즉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아실리 공작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낼 줄 알았어.”

“…….”

“전부 다 가만두지 않겠다.”

“하지만 폐하, 디트리온 전하가 인질로 잡히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코렐리아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디트리온은 잊어라.”

“하면…….”

“내 앞길을 방해한다면, 어쩔 수 없지. 자식은 언젠가 또 만들면 된다.”

실로 황제다운 생각이라고 코렐리아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아끼던 아들마저 바로 버릴 수 있는 자였다.

“리서스 후작성으로 가실 겁니까?”

“원래는 그러려고 했지.”

“…….”

“하지만 페르딘은 어떻게 생각할까? 영악한 녀석이야. 내 생각을 읽었을 수도 있지.”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생각에 잠겼다.

아실리 공작을 상대할 준비는 언제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완벽한 상태에서 공격해야 모든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더 강한 마물이 필요하다.

“아텐츠 아카데미로 간다.”

“폐하?”

“그곳엔 훌륭한 제물이 많지. 제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

“먼저 그곳으로 가 있어라, 코렐리아.”

그곳을 습격해 몇 번의 실험을 거치면 더 강한 마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황제는 코렐리아를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그의 눈에 짙은 살기가 맴돌고 있었다.

코렐리아는 그 살기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소름이 돋았다.

황제는 코렐리아에게 마나석을 건넸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건네주마.”

“…….”

“소드 마스터를 만난다면 그걸 먹고 상대해라. 너 정도의 경지면 충분하겠지.”

코렐리아는 그가 준 마나석을 말없이 받고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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