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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100화 (100/121)

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100화

디트리온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에린이 망설임 없이 제게 검을 들이밀지 몰랐다.

“에린…… 바보같이 굴지 마.”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황궁이다.

황궁에 걸린 마법을 에린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황족을 죽이기 위해선 그녀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가 에린에게 했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디트리온은 정말로 그녀가 탐이 났으니까.

예전의 어리숙하고 멍청했던 에린과 지금의 에린은 달랐다.

그녀는 강했다. 새로운 제국의 일원으로 선택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디트리온은 에린이 다치길 원하지 않았다.

“나를 선택하면 넌 더 편해질 수 있어. 너를 황후로 만들어 주지. 네가 원하는 건 전부 다 들어 줄 거야.”

“…….”

“원한다면 코렐리아에게 합당한 벌도 내려 줄 수도 있어. 내 진심을 곡해하지 말고 들어 주었으면 좋겠군.”

디트리온은 주춤주춤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검을 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에린을 향해 애절한 어조로 말했다.

“난 네가 다치길 원하지 않아. 죽는 건 더더욱…… 그러니 검을 내려놔.”

에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죽이려고 한 주제에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당신은 정말 뻔뻔한 인간이야.”

디트리온은 그녀의 인생을 기만했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던 에린을 비웃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의 고백이 싫은 걸 넘어 끔찍하게 느껴졌다.

에린은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디트리온, 난 다른 이에게 내 복수를 부탁할 생각이 없어.”

에린은 페르딘이 자신에게 준 기회를 떠올렸다. 그는 과거에 황제에게 복수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었다.

단지 그녀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에린은 여신이 페르딘의 부탁을 들어준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결국 복수할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린은 이 모든 복수가 끝난 뒤에야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디트리온은 자신을 바라보는 에린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에린,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황족을 공격하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야. 만약 네가 나를 죽이면…… 앞으로 이 제국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

“게다가 이곳은 황궁이지. 고대 마법이 있으니 날 죽이면 너도 죽어.”

디트리온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마물들은 내 명령에 따라 얌전히 있는 거야. 내가 죽는다면 이 녀석들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학살할걸?

디트리온의 말에 에린은 검을 내렸다.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아무리 그래도…….”

디트리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에린이 다시 검을 들어 그대로 그에게 휘둘렀기 때문이다.

“으악!”

어깨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으로 인해 디트리온은 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보며 에린은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학살하려고 했구나?”

디트리온은 한쪽 팔을 이용해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는 다친 어깨를 부여잡았다.

‘대체 어떻게……?’

고대 마법이 에린에게 통하지 않는 건가? 디트리온은 그녀에게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에린의 팔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보였다.

역시 고대 마법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

디트리온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두 손이 덜덜 떨릴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상태여야 할 에린은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멍청한 선택을…….”

“…….”

“그 꼴로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디트리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말에 에린은 웃었다.

“네 말대로 여기서 널 죽이는 건 불가능하겠지.”

에린은 디트리온을 내려다봤다. 황궁의 마법을 무시하고 이곳에서 디트리온을 공격한다면 그녀는 결국 죽을 것이다.

그리고 마물들 역시 막지 못할 테지.

에린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디트리온을 내리쳤다.

* * *

페르딘은 인상을 썼다.

그는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었다.

서부에서 자신이 죽어 가는 꿈이었다. 그는 죽어 가는 와중에도 에린의 행복을 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린이 결코 행복해지지 못하는 지독한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의 끝에서…….

에린이 디트리온을 단칼에 베어 냈다.

“헉!”

페르딘은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배를 더듬었다. 코렐리아의 검이 낸 상처가 느껴졌다.

분명 후작을 향한 검을 몸으로 막고 나서 그대로 죽을 거라고 여겼는데…….

‘살아 있어……?’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복부가 욱신거리며 아파 왔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곤 이내 이곳이 리서스 후작성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후작님은 괜찮으신 건가?’

페르딘은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코렐리아가 달아나는 모습은 봤지만 리서스 후작이 무사한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방금 꾼 꿈 때문인지 이상할 정도로 불쾌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빨리 움직여야 할 것만 같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할 때였다.

“페르딘?”

피곤함에 지쳐 눈을 붙이고 있던 릴리아가 일어났다.

“릴리아? 네가 왜 여깄지?”

“세상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너 괜찮은 거 맞지, 페르딘?”

릴리아가 서둘러 페르딘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멀쩡한 걸 깨닫자마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지? 에린 경은 황궁에서 무사히 돌아온 건가? 리서스 후작님은 무사하셔?”

페르딘의 물음에 릴리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

“에린은 아실리 공작님과 함께 황궁으로 갔어. 리서스 후작님은 네 덕에 무사하시고.”

그 말에 페르딘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방금 꿨던 꿈이 떠올랐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 줬던 그 꿈이.

“황궁으로? 아실리 공작님과 함께? 대체 왜? 소드 마스터란 사실을 아직 인정받지 못한 건가?”

릴리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동안 벌어졌던 일을 페르딘에게 설명했다.

페르딘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어디 가려고?”

“에린 경에게 가야 해.”

“그 몸 상태로 가 봤자 네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어.”

“…….”

“아실리 공작님께서 이곳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어. 공작님과 제1 기사단이 에린 경과 함께 있으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들은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이야.”

릴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페르딘을 만류했다. 하지만 페르딘은 엄습하는 불안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도 릴리아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한 사람이라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안돼, 릴리아. 난 가야겠어. 그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였다. 문밖을 지키고 있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아 경, 마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릴리아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빠르게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릴리아가 활짝 웃었다.

“바한!”

바한이 쪼르르 달려와 릴리아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마탑의 마법사들이 걸어 들어왔다. 페르딘은 의아한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들어온 익숙한 이의 모습에 그의 눈이 커졌다.

30대 초반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 남자였다. 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페르딘은 그 남자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겉모습만으로는 감히 실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자, 마탑주 알렉시스.

알렉시스의 나이는 최소 백 살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이지, 그보다도 나이가 많을 것이다.

알렉시스는 풍채가 크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탑주님.”

“릴리아, 네가 전해 준 말이 맞았다.”

페르딘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릴리아가 숨을 들이켰다.

“설마…….”

“그래, 히타치아의 매입한 건 황실이 확실해.”

“…….”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황제의 주도하에 흑마법을 이용해 실험을 진행했단 뜻이겠지.”

알렉시스의 두 눈이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히타치아를 사용하려면, 고대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히타치아는 그저 평범한 약초에 불과할 뿐이지.”

“…….”

“그렇다는 뜻은, 내 눈을 속이고 고대 마법을 사용할 정도로 그자가 매우 뛰어난 흑마법사란 거야.”

탑주의 말을 들은 릴리아가 탄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몇 년 뒤에 알았더라면 나도 상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건지…….”

함께 있는 마법사들과 릴리아는 끔찍한 말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썼다.

방을 둘러보던 알렉시스는 그제야 페르딘을 발견하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차기 황제께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황제라니요?”

“흑마법을 사용한 게 누구든 간에 황제가 그걸 몰랐을 리 없죠. 그런 자를 계속 황제로 모실 순 없지 않겠습니까?”

페르딘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가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차기 황제라니, 결코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릴리아는 그런 알렉시스를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마탑주 알렉시스의 괴팍한 성정은 마탑 밖에서도 유명했다.

“탑주님, 페르딘을 인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마탑의 원로들이 그 말을 들었으면 기겁했을 겁니다.”

릴리아의 말을 들은 알렉시스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었다.

그는 빠르게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갑작스런 표정 변화에 놀란 건 릴리아였다.

언제나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는 알렉시스가 표정을 바꿀 땐, 정말로 큰일이 벌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알렉시스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

“황궁에서…… 고대 마법이 사용되었어.”

“…….”

“누군가가 황족을 해치기라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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