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97화
* * *
에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리서스 후작에게 가는 중이었다.
목걸이의 힘을 받은 이시스는 가까스로 페르딘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성공했다.
에린은 페르딘의 심장 소리가 안정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버지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에린을 보고 숨을 죽였다.
더 이상 소드 마스터인 걸 숨기지 않는 에린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위압감을 풍겼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한편 방 안에서는 머리에 붕대를 두른 리서스 후작과 카론, 릴리아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된 카론은 분한 마음에 이를 바드득거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코렐리아…… 그 마녀가 감히 아버지를…….”
“…….”
“결국 도망치는 그녀를 잡지 못한 겁니까?”
“그래.”
“성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이 없는 것도…… 그들이 죄다 한통속이어서 그랬던 것이군요.”
“맞다. 사용인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코렐리아가 도주하는 데 협조했어. 그런 자들 때문에…… 에린이 홀로 고통받았던 거다.”
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린에게 들어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실상은 더욱 끔찍했다.
후작의 최측근과 사용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후작성의 모두가 코렐리아의 사람이었다.
페르딘에 의해 구출된 후작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들을 색출해 냈다.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리 오랫동안…….”
“카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구나.”
분노를 토해 내던 그는 후작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후작의 시선이 향한 곳에 에린이 서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카론은 어딘가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분명 누님이 맞는데 왠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후작 역시 카론이 느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카론과 릴리아를 향해 말했다.
“에린과 단둘이 할 말이 있다.”
머리를 다친 상태였으나 그의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론과 릴리아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만약 후작이 아무것도 몰랐다면 반갑다고 말하며 에린을 껴안았을 것이다. 그만큼 오랜만에 만나는 딸이었다.
“에린…….”
하지만 그는 차마 에린에게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후작이 다시 입을 뗐다.
“미안하다.”
에린은 그의 사과를 듣고 말없이 후작의 앞에 앉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오랫동안 잘 먹지 못한 듯 야위었고, 머리 쪽에 타박상은 의원에게 치료받은 건지 약 냄새가 났다.
후작이 에린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내가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 널 아프게 했구나.”
그는 에린을 보자마자 이 말을 꺼내고 싶었다.
후작은 자신이 무관심한 아버지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너를 잘 살피지 못했어. 나는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인간이다.”
그의 말에 에린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저도 죄송해요.”
“에린?”
“빨리 찾아오지 못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후작은 그런 에린을 껴안았다.
“괜찮다, 괜찮아. 에린, 난…….”
“…….”
“다 괜찮다. 나보다 페르딘 전하가 걱정이지. 날 지키려다가 심하게 다치셨다고 들었다.”
그 말에 에린이 고개를 들어 후작을 바라봤다. 후작도 그런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에린이 소드 마스터란 사실은 구속구의 열쇠를 가져온 기사들에게 전해 들었다.
검의 선택을 받은 걸로 모자라,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딸.
‘그래서 낯설게 느껴지는 건가.’
하지만 칼같이 날카로운 분위기는 수많은 실전을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아버지, 저를 도와주세요.”
에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코렐리아의 뒤에 있는 건 황제예요.”
“에린?”
“황제는 흑마법을 사용하는 대가를 치르려고 대량 학살을 벌일 틈을 노리고 있어요. 그를 막아야만 해요.”
리서스 후작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코렐리아의 뒤에 있는 자가 황제라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흑마법과 대량 학살이라니?
‘하지만 만약 에린의 말이 사실이라면…….’
후작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황제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황궁 지하에 마물들이 있어요.”
리서스 후작이 얼굴을 굳혔다.
현실감이 없는 말들이 계속 이어지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코렐리아가 그를 공격했을 때부터 후작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사실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에린…… 증거가 있어야 한다. 너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야.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분이 필요해.”
그러나 에린에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이뤄질 거란 증거가 없었다. 그래서 아실리 공작에게도 황제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유 없는 살육을 하는 사람은 마물과 다름없으니까.
‘역시 말만으로는 믿기 어려우시겠지.’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냉정한 중립파 귀족으로 행동하고는 했다.
어느 상황에서도 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사실 후작이 믿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황궁 지하에 마물이 있단 걸 알게 된 이상 그녀는 단신으로라도 황궁에 쳐들어갈 생각이니까.
많은 사람을 위협할 마물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때 후작이 에린의 손을 움켜잡았다.
“정말…… 기사가 됐구나.”
“…….”
“검을 들지 않고 싶단 말도 모두 거짓이었어…….”
리서스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녀가 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그는 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후작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는 코렐리아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짐했다. 더는 제국이 아닌, 가족을 위해 살겠다고.
“에린…….”
후작은 걱정 어린 얼굴로 에린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난 널 믿는다.”
“…….”
“내 힘을 빌려줄 테니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후작의 말은 비장했다.
국경을 지키며 힘을 키워 온 리서스 후작 가문의 병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에린의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아버지의 결연한 눈빛을 본 에린은 검을 세게 움켜잡았다.
* * *
아실리 공작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딸을 내려다보았다.
공녀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창백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공작 부인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울부짖다가 실신했다.
공작 역시 부인과 별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그는 울부짖는 아내를 말릴 수도,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 역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그의 등 뒤에는 언제나 그의 옆을 지키는 수석 기사가 완전 무장을 한 채 공작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실리 공작은 지금까지 지켜 온 신념을 떠올렸다.
‘절대 나를 위해서 검을 들지 않으리. 이 순간부턴 제국과 백성을 수호하는 검이 되리라.’
그가 소드 마스터가 되고 나서 굳게 다짐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한 약속이 먼저였다.
공작은 자신을 바라보던 딸의 단호한 눈을 떠올렸다.
아픈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이였다. 공녀는 종이에 손이라도 베이면 울면서 그에게 달려오곤 했다.
‘아팠을 테지…….’
아실리 공작도 성녀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예언을 할 때마다 끔찍한 고통을 겪는 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영원히 깨지 못할 잠에 빠진다.
남을 위해 희생하다가 그렇게…….
공작은 성녀로 발현한 그의 딸이 좀 더 이기적으로 자라나길 원했다. 그래서 언제나 그녀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게끔 지원해 주었다.
욕심을 부리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기를 원했으니까. 하지만 공녀는 그가 바란 대로 자라지 않았다.
공작이 공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가 태어난 순간, 너를 괴롭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여신님이라 해도 베어 버리겠다 약속했지…….”
공녀가 들었다면 기겁했을 말이었다. 공작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수석 기사를 향해 명령했다.
“마탑의 마법사가 도착하는 대로 출발한다.”
그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행동하기 시작했다.
* * *
코렐리아는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지금 황궁의 지하에 숨어 있는 상태였다.
십몇 년간 리서스 후작성에서 지내다 다시 돌아온 지하는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악몽을 꾼 것 같았는데…….”
어떤 꿈이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꿈이리라. 그녀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페르딘이 자신에게 입힌 상처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진작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진작에!’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었다. 2황자를 너무 우습게 여겼다.
후작의 절망 어린 얼굴을 볼 생각으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어긋났다.
코렐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철창에 갇힌 마물들이 포효하고 있었다. 눈을 번뜩이며 피를 갈구하는 그들의 모습에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지금을 즐기고 있으라지. 어차피 웃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코렐리아는 지하의 철문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이 문을 열고 나간다면, 당장이라도 지옥이 펼쳐지리라.
“페르딘, 에린…… 천박한 놈들을 한꺼번에 죽여 주지.”
팔의 상처를 바라보는 코렐리아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