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녀가 검을 든 이유 96화
* * *
“누님?”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에린은 자신의 어깨를 잡는 카론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릴리아의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후작성의 성문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들의 옆에서 릴리아가 지친 기색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공녀님이 조금 이상했던 거 같아서.”
“이상하다니?”
“그냥…… 안색도 안 좋으셨고…….”
그의 말에 대답하던 에린은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는 얼굴을 굳힌 채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왜 문지기가 없지?”
후작성의 성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에린은 기척을 죽인 채 후작성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론은 당황한 얼굴로 에린에게 물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다들 어디로 간 거지?”
“…….”
“제1 기사단이 아버지를 구출해 낸 걸까? 전투가 벌어졌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불길한 예감에 에린이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는 기감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무사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곧이어 성의 안쪽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마나에 에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페르딘 경이 왜……?’
탐색을 끝낸 그녀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다리에 마나를 씌운 뒤 힘을 주어 도약했다.
하늘을 나는 듯이 높이 뛰어오른 에린은 단숨에 후작성의 창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님?”
카론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그의 눈으론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저것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인가……?’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 있는 정문을 무시하고 창문으로 들어가다니…….
그런 카론을 릴리아가 잡아끌었다. 그녀도 고요한 성안의 분위기에 이상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카론,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린 후작님의 방부터 가 보자. 에린이 급하게 움직인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릴리아의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카론은 에린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 * *
이시스는 몸에 있는 모든 성력을 페르딘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만큼 심각한 상처였다.
차기 교황이라고 불리는 이시스가 아니라면, 감히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처참한 상처.
이시스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죽지 마세요, 페르딘 전하…… 저희를 두고 가시면 안 됩니다…….”
무리하게 성력을 쓴 탓에 그의 손이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순 없어요. 전하는 이런 곳에서 죽을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이시스가 아무리 성력을 쏟아부어도 페르딘의 상처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공녀의 예언이 떠올랐다.
“페르딘은 죽을 거야.”
결국 예언이 가리킨 미래대로 흘러가는 것인가. 페르딘 전하가 정말로 죽는다고?
이시스는 후회했다.
예언을 듣고도 그를 말리지 않았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시스가 천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에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에게서 엄청난 기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시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숨을 죽였다.
그녀가 페르딘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왜…… 페르딘 경이 여기에…….”
이시스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손끝에서 더는 성력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주변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시스는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예언이…… 있었습니다. 페르딘 전하가 후작성으로 가지 않는다면…… 후작님이 죽을 거라는 예언이…….”
에린은 페르딘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곤 의무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심장 소리를 확인했다.
‘저번과는 다르다.’
그의 심장 소리가 불규칙했다. 당장이라도 멈춰 버릴 것같이 약해져 있었다.
에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페르딘의 볼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이시스가 에린을 향해 말했다.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성력으로는 치유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닙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에린 리서스.
이시스의 말을 들으며 에린은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공녀님이 진짜로 페르딘 경이 죽는 미래만을 봤다면 내가 이곳에 오는 걸 돕지 않으셨을 거야.’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에린은 공녀를 믿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페르딘이 목걸이를 준 이후로 에린은 불안할 때마다 목걸이를 붙잡곤 했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더라도 그들을 다 죽여 버려야 했을까요……?’
그때였다.
목걸이가 강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 *
에린은 자신의 앞에 있는 페르딘을 바라보았다.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건 지금의 페르딘이 아니었다.
그가 쓰러져 있는 곳은…… 서부였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녀가 죽였던 마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건 이미 벌어졌던 과거의 기억.
과거 페르딘이 서부로 간 그날, 황제는 마물을 이용해 그곳의 인간들을 전부 학살하려 했다.
황제의 명으로 서부 원정을 떠난 페르딘이 죽는 건 정해진 미래였다.
에린은 페르딘의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나온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여신님께선 미래를 바꾸길 원하신다.]
여신은 황제에게 분노했다.
감히 신에게 도전하고 다른 이를 제멋대로 죽이는 자를 그녀는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페르딘이 죽음에 이른 순간, 여신은 그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페르딘 렉시아, 여신님의 뜻에 따라 황제에게 복수해라.]
성물이 페르딘에게 속삭였다. 그가 원한다면 황제를 벌할 힘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페르딘은 이능으로 여신이 시간을 되돌려 사라진 과거를 보았다.
그가 황제를 죽이길 선택하고 서부에서 살아 돌아간다면 코렐리아는 에린을 죽일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결말은 없을까? 아무도 죽지 않고,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결말…….
페르딘은 소원을 빌었다.
에린은 숨을 멈춘 채 귀 기울여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복수 따위 원하지 않아요.”
[…….]
“전 충분히 많은 걸 선택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럴 기회조차 없었죠.”
페르딘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에린 경에게 기회를 주세요. 그녀가 행복해질 기회를…….”
잠시 숨을 고르던 페르딘이 말을 이었다.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기를…….”
에린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왜 몇 번의 환생을 반복했는지를.
[어리석은…… 그녀의 행복은 너에게 달려 있단…….]
그 순간, 목소리가 멀어지며 에린의 시야가 반전됐다.
그녀는 익숙한 장소에서 눈을 떴다. 서부에서 죽음에 이를 뻔한 날, 꿈속에서 보았던 숲이 보였다.
에린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번에 보았던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죽지 않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린은 불안했던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여자의 목소리에는 그녀의 말을 믿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방금 그건…….”
“여신님께서 끔찍한 미래를 바꾼 것에 보답하고자 당신이 궁금해하던 진실을 알려 주신 거예요.”
“…….”
“당신이 황궁으로 가지 않았다면, 황제는 마물들을 풀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끔찍하게 싫어하거든요.”
여자는 에린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굳히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끔찍한 학살이 이루어졌겠죠.”
“…….”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모든 사람을 구할 순 없어요. 결국 당신의 눈이 닿지 않는 자들은 죽었을 겁니다.”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에린의 눈앞에 어두컴컴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엔 철창에 갇힌 마물들이 잔뜩 있었다.
에린이 마물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몸이 뒤로 당겨졌다.
‘여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여러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온 에린이 도착한 곳은 황궁의 복도였다.
마물들이 가득 차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황궁의 지하였다.
에린은 몰려오는 역겨움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아래 황제가 벌인 짓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궁의 지하에 있던 마물의 수는 보육원에 있던 마물 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눈앞의 모든 이미지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 여자는 괴롭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황제는 언제든지 마물들을 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
“하지만 당신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이죠. 서부에서 벌어진 일과는 달라요.”
황궁 안에 있는 마물들이 밖으로 나온다면, 끔찍한 학살이 벌어질 터였다.
좁은 공간에서 에린만을 쫓던 서부의 마물들과는 달랐다.
그 마물들을 놓치지 않고 상대하는 건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소한 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전부 힘을 합쳐야 상대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누구죠?”
에린의 물음에 여자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녀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에린 경, 돌아가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 * *
에린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시스가 그녀의 옆에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에린에게 물었다.
“에린 경, 그 목걸이는…….”
그녀의 목걸이가 빛을 내고 있었다. 이시스는 그 목걸이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페르딘 전하가 가지고 있던 성물…….”
이시스가 에린의 손에 있는 목걸이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고갈되어 있던 신성력이 빠르게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시스는 그 순간, 공녀가 왜 이곳으로 자신을 보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신성력이 회복되자마자 그는 다시 페르딘을 치유하기 시작했다.